생각을 그냥 하는 사람은 답답한 사람이다. 배우지 못한 것이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기술을 쓴다는게 보여야 한다. 시를 읊더라도 압운과 평측이 있다. 마구잡이로 단어를 투척하는지 나름대로 터득한 기술을 구사하지는 단박에 알 수 있다. 대화의 상대가 되는지는 거기서 가려진다. 두 사람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가다가 충돌한다. 밖을 보지 않고 자기 내부를 바라보고 있다. 다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소개다. 모든 차별과 불화의 본질적 원인이다. 패스를 하지 않고 단독드리블만 하는 사람과는 함께 축구를 할 수 없다. 오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생각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자기소개 하지 마라'는 네거티브보다 '기술을 구사하라'는 포지티브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 대화가 된다. 과학적 탐구에 있어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을 근거로 무언가를 주장하면 안 된다. 관측자의 입장과 상관없이 객체 자체에 내재한 질서를 찾아야 한다. 거기에 기술이 들어간다. 조건반사와 같은 무의식적인 반응은 곤란하다. 문제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자기소개를 하게 된다는 점이다. 무의식이 자신을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햄버거가 맛있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햄버거를 기준으로 내 입맛을 소개한 것이다. '햄버거는 콜라와 어울린다'고 말해야 한다. 일상적인 대화는 햄버거가 맛있다고 해도 되는데 과학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공간에서의 조리 있는 말하기는 다른 것이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는가? 사유의 함정 때문이다. '나는 짜장이 좋다.'고 말하면 상대는 '나는 짬뽕이 좋은데?'로 받는다. 인간은 대칭을 세워서 사고하는 동물이다. 본의 아니게 말대꾸를 한다. 내가 '짜장에는 군만두지.'라고 해야 상대가 '짬뽕에는 탕수육이지.'로 받는다. 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서 대화가 풍성해진다. 패스가 있는 말하기라야 한다. 상대를 받쳐주는 말하기라야 한다. 달팽이가 둥글게 말리듯이 말꼬리를 자기 집으로 갖고 가면 상대는 선택지가 없다. 똑같이 말하면 반향어다. 맞장구를 치면 추종자다. 반대로 가면 싸움 난다. 어느 쪽이든 좋지 않다. 사유는 나뭇가지처럼 한 방향으로 뻗어가야 하는데 보통은 제자리를 맴돈다. 중심이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외연이 차단된다. 자기 자신을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역린이 그렇다. 논객은 대중의 말대꾸를 유도하는 구조로 몰아가는 실수를 저지른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가 분리되지 않아 난류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를 분리하려면 대립된 둘을 통일하는 더 높은 관점을 제시해야 한다. '공을 찬다'는 좋지 않다. 축구를 한다가 되어야 한다. 공은 내가 차는 것이다. 내가 개입되어 있으므로 자기소개다. 축구는 두 팀 사이의 일이다. 공을 보지 말고 그사이를 봐야 관중도 역할이 있다. 그래야 볼보이도 할 일이 있다. 힙합가수의 랩은 죄다 자기소개다. 결국 서로 디스를 주고받는다. 그것도 문화라면 문화지만 왜 힙합 가수는 서로를 비난하는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힙합가수 이하늘이 욕을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생각할 줄 모른다. 그렇게 훈련되었다. 그런 사람은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그게 소아병이다. 내가 '산은 높다'고 선창하면 상대는 '물은 깊다'로 받는다. 다 같이 '천하는 넓다'로 나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 사유의 지평이 확대된다. 말은 이렇게 바깥으로 가지를 쳐야 한다. 보통은 내부로 기어들어 간다. 그 경우 모든 대화는 '난 이게 싫어'가 된다. 수렁에 빠져버린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게다. 바보들의 대화는 공식이 있다. 나는 어떤 음식이 싫어. 나는 어떤 사람이 싫어. 각종 '싫어'와 혐오와 포비아를 확대재생산하는 방향으로 대화한다. 오직 그런 쪽으로만 뇌를 작동시킬 수 있다. 그럴 때만 머리가 팍팍 돌아간다. 그들은 무언가를 반대하고 거부하고 혐오하는 쪽으로만 창의할 수 있다. 긍정어법은 사실 쉽지 않다. 막연한 긍정은 추종에 불과하다. 긍정모드로 가면 '좋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잘했어.' 정도를 말하고 대화가 끝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진다. 결국 누군가를 까고, 씹고, 물어뜯는 대화를 하게 된다. 남의 흉을 보게 된다. 나는 그런 자리를 피한다. 역설은 대화의 상식이다. 한 바퀴 꼬아서 들어가야 한다. 그게 기술이다. 내가 원하는 말을 상대방 입에서 끌어내야 한다. 뇌를 사용한다는 증거를 보여야 한다. 저절로 생각이 나는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라야 한다. 자체 엔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난류의 문제다. 에너지의 입구와 출구는 하나이고 쌍방은 에너지의 방향성을 공유해야 한다. 삼국지만 읽어봐도 말을 꼬아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척하는 방법으로 상대방을 격동시킨다. 상대가 화를 내면 '내 말이 그 말이야.'로 받는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쓰는 것이다. 사유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다. 남과 대화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한다. 그래야 말을 한마디라도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보이지 않는 권력게임이 벌어진다. 서로 면박을 주고 약을 올린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대화는 점잖게 한다. 자신이 받아낼 수 있는 토스를 올린다. 되도록 랠리가 길게 이어지는 배구를 한다. 애초에 그게 목적이기 때문이다. 명사와 동사의 차이다. 동사의 메커니즘을 공유하면서 명사를 살짝 틀어야 한다. 명사를 공유하며 동사를 차별하므로 '난 좋다', '난 싫다'가 된다. 상대가 '좋다'를 선점했으므로 나는 '싫다'로 받을 수밖에.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잘못된 대응을 강요한다. 바람이 부는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움직이는 메커니즘을 머리에 띄워야 한다. '때렸다'가 아니라 권투를 보고 '찼다'가 아니라 축구를 봐야 한다. 보다 큰 단위로 올라선다. 난쏘공의 굴뚝 청소부 이야기와 같다. 상대가 어떻게 했는지가 아니라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인가에 주목해야 한다. 인간들의 대화는 스쿼시와 같다. 공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사유는 주변을 맴돈다. 좋다. 싫다. 밉다. 나쁘다. 짜증 난다. 괴롭다는 말밖에 못한다. 방어만 한다는 것은 공격기술이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폭력적인 사람은 폭력적인 행동으로 주변을 제압하는 기술을 은연중에 터득한 것이다. 문제는 본인이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기술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본인은 그냥 화가 나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왜 화가 날까? 화를 내는 방아쇠가 만들어져 있다. 몸에 배어 있다. 심리학을 배운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귀족이 나쁘다. 지주가 나쁘다. 부르주아가 나쁘다. 자본가가 나쁘다. 양반이 나쁘다. 하는 식의 사고는 초딩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아틱한 사고다. 귀족과 지주와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를 벽으로 세워놓고 스쿼시를 한다. 공은 언제나 자기에게로 되돌아온다. 수준은 제자리를 맴돈다. 생산력이라는 본질은 깨닫지 못한다. 이게 전형적인 자기소개다. 내가 화가 났다는게 행동의 근거가 된다. 인간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동력이 있기 때문이고 그 동력은 역사의 흐름에서 나오는 것이며 인간은 거기에 편승한다. 왜? 내게 그만한 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며 자기소개 하지 말고 그 기술을 보여줘야 한다. 놀고 있는 개 두 마리 사이에 울타리를 설치하면 갑자기 서로를 향해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한다. 인간의 실패도 동물의 본능이다. 개는 상대가 싫어서 짖는게 아니라 내 앞을 막아선 울타리를 보니까 왠지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짖는 것이다. 일종의 최면에 걸린 것이다. 울타리가 난류를 일으켰다. 울타리가 내 앞을 막고 나와 대치했다. 내게 적대행동을 했다. 그렇다면 나는 공격한다. 인간은 거의 개다. 현해탄이 울타리가 되어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짖어댄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은 코어가 있다. 계에 속한 자원은 코어를 쳐다본다. 아기는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가 집단의 중심이다. 패거리는 동료를 쳐다보며 집단사고에 빠진다. 경계면에서 인지충격이 일어난다. 인지충격을 회피하여 눈을 내리깔고 자기를 쳐다본다. 난류의 원인이자 불화의 이유다. 의식적으로 밖을 바라봐야 한다. 더 큰 단위로 올라서야 한다. 동사의 방향성을 보면 계 내부의 압력이 발견된다. 유체는 압이 걸려 있다. 기압과 수압과 유압이 있다. 계에 밀도가 걸려 있다. 민중의 분노는 집단 내부에 걸린 압력이다. 한일도 내부에 스트레스가 걸려 있다. 일본의 섬나라 스트레스에 한국의 반도 스트레스다. 중국 주변에 있으면 스트레스 받는다. 러시아 주변, 인도 주변도 같다. 압은 방향성이 있다. 압력의 방향성을 발견한 사람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압은 조절된다. 입구와 출구가 분리된다. 입구와 출구의 간격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불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다. 대화를 하든 생각을 하든 조절장치를 작동시켜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