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얼굴 쳐다보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게임을 봐야 한다. 사람이 착하냐 나쁘냐 따지는 것은 초딩 관심사다. 그 사람이 야구를 하는지 축구를 하는지 봐야 한다. 단기전을 하는지 장기전을 하는지 봐야 한다. 개인전을 하는지 단체전을 하는지 봐야 한다. 진중권은 개인전이고 김어준은 단체전이다. 그렇게 키워졌다. 나처럼 밑바닥에서 굴러먹은 사람은 살면서 별 이상한 사람을 다 만나봤기 때문에 떨거지들을 제압하는 훈련이 되어 있다. 엘리트는 그런 기초훈련이 안 되어 있다. 대중의 기세와 변덕을 두려워한다. 상고 나온 노무현과 장사해 본 김어준은 그런 훈련이 되어 있다. 인문학의 유시민과 이공계 출신 김어준이 합이 맞다고 보는 이유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한다. 에너지를 다룰 때는 뒤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 김어준은 본능적으로 안다. 왜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인가? 권력 때문이다. 좋은 것을 주면 받아먹었으니 이제부터 형님으로 모셔야 하느냐 이 생각을 한다. 진보정권이 좋은 것을 주면 국민 세금으로 왜 자기 권력을 만드냐 이런 생각을 한다. 주는 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득을 주기 전에 나쁜 것을 막아주는 것이 먼저다. 에너지 작용은 뱀처럼 S자 구조다. 곧장 들어가는게 아니고 한 바퀴 돌아서 들어간다. 오른쪽으로 살짝 꺾었다가 직진성에 의한 반발력이 만들어지면 그 반발력을 타고 왼쪽으로 들어가는게 기술이다. 오른쪽에 발을 담가서 상대의 반발을 유도한 다음 들어가기다. 삼국지만 봐도 이 정도는 안다. '조조 승상님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하고 상대가 반발하게 만든 다음 본심을 꺼내는 공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 입에서 나오게 만드는게 기술이다. 김어준은 이런 것이 체질이다. 졸라와 씨바에 음모론을 구사하는 이유다. 일단 몸부터 풀어서 자체 에너지를 끌어낸다. 이쪽으로 가자고 선동하는건 바보짓이다. 몸을 풀어서 대중을 흥분하게 만든다. 흥분한 대중이 어느 쪽이든 가려고 할 때 저쪽을 막고 있으면 대중은 이미 이쪽으로 가 있다. 자발적 대칭성 깨짐을 유도하는 기술이다. 나를 따르라고 외치면 아무도 안 쫓아온다. 가는 순간 숙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매우 어색해진다. 진보는 대중의 자발성에 의지해야 한다. 판을 짜고 흥을 돋우면 신명이 나서 대중은 스스로 앞장선다. 그 경우는 게임의 주도권이 대중에게 있기 때문이다. 정권이 명운을 걸고 한 개인과 싸우다니 한심하다. 사실 이것이 작은 일은 아니다. 유튜브 신문명과 레거시 미디어의 한판승부가 벌어졌다. 조중동과 한경오가 원팀이 되었다. 모든 구세력이 일치단결했다. 그럴 만도 하다. 다가오는 미래는 경험한적 없는 신세계다. 그동안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 베끼고 미국 베꼈다. 선진국 선배님들 발뒤꽁무니만 쫓아가면 되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우리 앞에 아무도 없다. 더 이상 베낄 대상이 남아있지 않게 되자 덜컥 겁이 난 것이 진중권 현상이다. 우리는 그 비겁함과 싸워야 한다. 우리가 당당하게 인류 문명의 선두주자가 되어야 한다. 일이 주어지면 그 일을 하는 것이며 결과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문명은 단체전이기 때문이다. 결과는 법칙에 맡기고 우리는 큰수의 법칙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쓰던 시기 같다.
제2,3신분 부르주아가 1792년 시민과 손잡고 왕을 죽였다가 3,4신분의 덜 다듬어진 폭력성에 실망하여 기득권이 되었던 그 시기같다.
시민과 학생을 놔 두고 기득권에 가담하여 기득권끼리 똘똘 뭉쳐
부르주아라는 단어에서 개혁의 이미지를 지우던 1848년 파리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