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의 하이퍼루프가 생각만큼 잘 안된다는 사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게 된다고 믿는 밥통들은 진짜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보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분위기 맞춰준다고 리액션을 그렇게 하는건지 모르겠다. 다들 흥분해 있을 때는 나도 굳이 입바른 말로 초 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다. 구조론은 좀 아는 사람들이 모여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므로 따질 것을 따지는 것이다. 물론 하이퍼루프가 전혀 안 된다는 말은 아니다. 초음속 여객기도 되기는 되는데 소음문제 때문에 지금은 못하고 있고, 자기부상 열차도 되기는 되는데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꽃 피는 바람에 상업적인 운행은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이런 것은 초딩도 알 수 있다는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단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기는 한가? 생각을 왜 하지? 생각을 해야할 동기가 없잖아. 권위 있는 사람 뒤에 편하게 묻어가는게 맞지 위험하게 생각을 왜 해? 투자를 하더라도 개인의 판단을 따르기 보다는 전문가 뒤에 묻어가는게 결과가 좋더라고. 스티브 잡스의 삽질도 그렇다. 스마트폰이 청바지 뒷주머니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스티브 잡스 개인의 강박증에 불과하다. 딱 봐도 아스퍼거네. 기술자들이 죽어보자고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말 안 듣는 공돌이는 탐미주의가 약이다. 니들이 미학을 알아? 니들이 미니멀리즘을 알아? 니들이 디자인을 알아? 갈구는 거다. 인문학을 모르는 기술자들에게 끌려가지 않겠다는 기업가의 권력의지다. 여기에 권력문제로 프레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 각별하다. 이는 잡스 개인의 열등의식이 상당부분 반영된 것이다. 천재병이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니까 틀린 사실을 알아도 고집을 부린다. 사실 오너가 전문가 집단에 끌려가다가 망한 기업이 많다. 내 고집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버티는 거다. 한 번 잘해서 실력을 증명한 다음에는 집요하게 프레임을 걸어서 자신이 모르는 분야까지 힘으로 찍어누르다가 망하는 삽질은 역사에 무수히 많다.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다 자기 분야는 천재인데 그걸로 한 번 실력을 증명하더니 모르는 분야에 개입해서 망쳐 놓는다. 다들 한 끗발은 하는데 두 끗발에서 망한다. 김어준도, 스티브 잡스도, 일론 머스크도 맞을 때 맞고 틀릴 때 틀렸다. 대중은 쉽게 프레임으로 나온다. 김어준이 한 번 맞으면 다 맞는 거고, 스티브 잡스가 한 번 맞으면 다 맞는 거고, 일론 머스크가 한 번 맞으면 다 맞는 거라는 우격다짐이다. 바른 말 해봤자 조회수만 떨어진다. 사실 포기했다. 인간들은 답이 없다. 대중에게 아부하여 조회수를 올릴 것이냐, 사실대로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할 것이냐? 결단할 밖에. 문재인도 틀린건 틀렸고 이재명도 틀린건 틀렸다. 프레임이 걸리면 작가는 입장이 난처해진다. 나는 원래 사회적 기술이 떨어져서 아부를 못한다. 이제는 바른 말을 하는 것이 프레임이다. 대중에게 안 먹히면 좀 아는 사람으로, 국내에서 안 먹히면 외국으로, 현재 세대에 안 먹히면 미래 세대로. 인류의 수준에 걸어볼 밖에.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거다. 사람들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다. 프레임을 걸고 진영논리에 의지하며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니가 잡스보다 잘났어? 니가 일론 머스크보다 돈 많냐? 이러면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대꾸할 밖에. 프레임 기술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는 비겁한 자세다. 중요한 것은 이게 초딩도 판단할 수 있는 쉬운 문제라는 점이다. 초딩한테 큰 폰과 작은 폰을 줘봐라. 당연히 큰 것을 고른다. PC정책도 그렇다. 초딩한테 흑인 여성이 백설공주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 보여줘봐라. 아무 불만없이 잘 본다. 초딩들은 성소수자가 주인공으로 나와도 개의치 않는다. 어른들은 자신의 눈이 오염된 사실을 모르는 것이댜. 불쾌한 골짜기 이론은 어른들에게만 통한다. PC정책을 기성세대에 강요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다. 이건 물리학이다. 어린이는 불쾌한 골짜기에서 유쾌함을 느끼고 어른들은 불쾌감을 느낀다. 몸이 생리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인정하자. 에너지의 비가역성이다. 어른들은 그렇게 살라고 내버려두고 젊은이가 잘해야 한다. 필자에게 엉뚱한 시비를 하는 사람의 특징은 필자를 이겨먹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팬이 연예인한테 갑질하듯이 독자가 작가에게 갑질한다. 한 번 밀리면 끝까지 밀리니까 서열부터 정하고 들어가자. 독자가 갑이고 작가는 을이다. 서열확인 됐냐? 역시 프레임 기술이다. 그들은 입에 맞는 떡을 넣어주기를 원한다. 내 귀에 달콤한 거짓말을 해줘. 그건 내가 원하는 거짓말이 아냐. 왜냐하면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들은 진실에 관심없다. 구조론은 작정하고 배워야 하는 이론이다. 스승을 이겨먹으려는 제자는 가르칠 수 없다. 필자에게 적대적인 포지셔닝을 미리 설정하고 들어오면 독자 자격이 없다. 광장에서는 그래도 되는데 이곳은 연구소다. 어린이의 동물적 본능이 작용한다. 어린이는 관심이 가는 대상에 해꼬지를 한다. 다른 방법으로 말을 걸 수 없으므로 화가 나고, 화가 나므로 화풀이를 하는게 해꼬지다. 어린이에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다들 장난치고 괴롭히다가 서로 친해지잖아. 어른이 그러면 안 된다.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고 말이 통해야 하고 대화는 그 다음이다. 지나가다가 그냥 한 번 찔러보겠다는 사람과는 진지한 대화가 불능이다. 정치는 자기편 만들기 게임이므로 자기 진영에 아부한다. 꼴통을 거르려고 정치를 언급하므로 감수할 부작용이다. 예술분야나 체능분야라면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권투도장을 처음 갔다고 치자. 일단 줄넘기 3천 번을 해보라고 한다. 요즘은 다르겠지만 옛날에 그랬다더라. 몸을 만들어와야 기술을 가르쳐주지. 악보를 못 읽는 사람이 피아노 레슨을 시켜달라고 하면 피곤한 거다. 도무지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문간에서 배제하는게 원칙이다. 하나가 맞으면 다 맞고 하나가 틀리면 다 틀리는 것이 원리다. 원리가 프레임이다. 그래서 하나를 잡으려는 싸움이 치열하다. 철학의 역사에 온갖 이야기들이 있다. 무슨주의 무슨주의 하며 수십가지가 넘는다. 구조론은 그것을 에너지의 방향성 하나로 모두 정리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 하면 '프레임을 비판하면서 너는 왜 프레임을 거느냐' 하고 시비하는 사람 꼭 있더라. 그들은 패턴이 같다. 맥락을 무시하고 상대방 말을 그대로 받아치는 초딩 반사놀이. 프레임을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조잡한 이항대립 논리로 잘못된 프레임을 거니까 문제지. 일항타개 논리로 정당한 프레임 걸어야 정답이지. 이 부분에서 똥오줌은 스스로 가려야 한다. 똥오줌을 대신 가려달라고 요구하면 피곤한 거다. 프레임은 원리다. 원原은 언덕이니 우뚝한 것이다. 원은 높은 것이다. 원은 꼭대기다. 원이 근원에 딱 하나만 있어야 하는데 중간에 마구잡이로 끼어들므로 잘못된 것이다. 원은 첫 단추를 꿴다. 두 번째 단추에 프레임을 걸면 안 된다. 사람들이 어려운 것은 잘 아는데 쉬운 것은 모른다. 복잡한 것은 다 짝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자동차 부품이나 컴퓨터 부품이라면 아귀가 맞는 짝이 정해져 있으므로 속일 수 없다. 부품을 끼워보고 안 맞으면 빼면 된다. 바다에서 등산장비를 팔거나 산에서 선박용품을 팔 수 없다. 짝이 없는 것을 말하면 일제히 바보된다. 사람들이 작은 부분을 속이면 안 속는데 큰 전체를 속이면 잘만 속는다. 전체는 아귀를 맞출 짝이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천안함, 한강의대생 음모론의 공통점은? 물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타블로 사건은 바다 건너에서 일어났다. 마술사는 커튼 뒤나 상자 속에서 관객을 속인다. 컵이든 손바닥이든 반드시 감추는 것이 있다. UFO나 초능력이나 초고대문명설처럼 엉뚱한 것은 맞는 짝이 없다. 사람들은 짝이 없으면 아무 거나 가져다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친이 없다고 아무나 껄덕대는 격이다. 별 일이 다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계에 에너지를 태워보면 가는 길이 명백해진다. 한 개라면 그 자체의 속성이 결정한다. 콩은 콩이고 팥은 팥이다. 백만 개가 되면 그것을 담는 그릇이 결정한다. 실재론에 유명론, 일원론에 다원론, 합리주의에 실용주의, 물질에 영혼, 유물론에 유심론, 진화론에 창조설, 자본주의에 사회주의 하는게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프레임을 걸어서 도매금으로 먹겠다는 원리싸움에 그릇싸움이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있다. 여기서 하나만 이기면 나머지는 줄줄이 사탕으로 다 이긴다고 믿는 것이다. 그것은 에너지의 방향성에 관한 것이다. 모든 주의주장이 같은 그릇싸움을 이름만 바꾸어 재탕한 것이다. 에너지의 성질 하나를 백 가지 버전으로 복제한 것이다. 에너지가 공간보다 많으면 뭉쳐서 하나가 되고 공간보다 작으면 흩어져서 여럿이 된다. 이게 이해가 안 되면 아무거나 그릇에 넣고 흔들어보면 된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요소요소에 짱박히거나 아니면 가운데로 몰려서 떡이 되거나 둘 중에 하나다. 중국인은 숫자가 많으므로 떡이 져서 한 덩어리가 된다. 숫자에 치어서 획일화 되는 것이다. 시켜먹는 사람의 숫자가 많으면 짜장면 하나로 통일해야 빨리 배달된다. 숫자가 적으면 구심점을 못 만들고 한국의 좌파들처럼 분열한다. 입으로는 이념이 어떻고 노선이 어떻고 하지만 그냥 하는 말이고 본질은 손에 쥐고 있는 무기의 차이다. 인맥으로 먹느냐, 미디어로 먹느냐다. 정의당, 녹색당, 여성의당, 노동당 하며 분열한다. 네티즌은 쪽수가 많으므로 노무현과 김어준을 구심점으로 뭉친다. 막연히 세상은 복잡하므로 별 일이 다 있겠지 하지만 복잡할수록 획일화 되고 단순해진다. 색을 섞으면 섞을수록 검은 색이 된다. 일본인은 말한다. 한국인 한 명을 만나보면 좋은 사람들인데 두 명만 모이면 반일이 된다고.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다. 혼자 있을 때는 대부분 착한데 열 명이 모이면 무단횡단을 일삼는다는 말이 있다. 원리를 알면 한 방에 된다. 움직이는 것은 방향이 맞으면 다 맞고 방향이 틀리면 다 틀린다. 원리를 구체적으로 알 필요는 없고 그런게 있다는 확신이 중요하다. 세상이 복잡한데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복잡해서 무너진다면 진작에 다 무너졌을 것이다. 복잡해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원리가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결과적으로 언어가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믿든 안믿든 언어로 하는 것인데 이미 언어를 신뢰한다는 전제를 깔아놓고 있는 것이다. 진리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해도 그 전에 언어를 신뢰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언어를 불신한다 치면 동물처럼 닥치는 것이 맞다. 혹시 다른 나라는 1+1=3일지도 모르잖아. 작은 확률이라도 예외는 항상 있잖아 하는 밥통들과 대화하지 않는다. 권투도장에 오려면 몸부터 만들어와야 한다. 그것도 프레임이다. 진리 자체가 프레임이다. 우리가 진리의 프레임을 사용하지 않고 엉뚱한데다 안 맞는 프레임을 거는 것이다. 첫 단추만 프레임으로 채우는게 맞다. 스티브 잡스 말은 다 맞아. 일론 머스크 말은 다 맞아. 김어준 말은 다 맞아 하는 식으로 프레임을 걸지 말고 에너지 방향성에 프레임을 걸어야 한다. 에너지의 밸런스는 마이너스다. 에너지는 움직이고 움직임은 누가 멈춰세울때까지 계속되므로 마이너스다. 권력은 에너지다. 대중은 에너지를 생산하려고 권위에 의지한다. 동물은 언제나 모여서 군집을 이루고 인간은 언제나 모여서 권력을 만든다. 권력적 기동에 의한 오염을 피하고 냉정하게 진실을 보는 사람은 예로부터 적었다.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이 한 방에 갈라야 진짜다. 움직이는 것은 방향만 만들어주면 알아서 간다. 상호작용으로 가는 것은 되먹임이 1보다 크게 구조를 만들어주면 된다. 질에서 밸런스가 안 맞으면 입자에서 맞추고 입자에서 안 되면 힘으로 맞추는게 마이너스다. 처음 100으로 밸런스를 이루었는데 95로 깨지면 홀수라서 밸런스가 안 맞다. 이때 외부에서 5를 가져와서 밸런스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5를 버리고 90으로 내려와서 맞춘다. 닫힌계 때문이다. 세상이 언제나 한 방향으로 가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