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유는 복제된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집합이다. 복제는 마이너스이고 집합은 플러스라서 방향이 다르다. 인류의 모든 실패가 여기서 비롯된다. 방향을 헷갈린 것이다. 존재는 만남이다. 만남과 맞섬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나의 동전을 별개의 앞면과 뒷면으로 착각하는 것이 인류의 실패다. 세상을 맞섬으로 보는 사고를 버려야 한다. 물질과 영혼, 부드러운 것과 굳센 것, 안정과 불안정, 합리와 실용 따위 모든 이항대립은 하나의 만남과 맞섬을 복제한 것이다. 둘을 버리고 상호작용 하나를 찾아야 한다. 만유는 복제된 결과이므로 원본이 있다. 사본은 원본과 연결된다. 연결되면 하나이므로 일원이 맞고, 연역이 맞고, 기능이 맞고, 성질이 맞고 상호작용의 밸런스가 맞다. 연결된 하나는 에너지의 방향성이다. 에너지는 움직이므로 관측자의 시선에는 원인과 결과 둘로 나누어진다. 변화는 하나에서 둘로 늘어나므로 방향을 헷갈리게 된다. 인간은 뭐든 둘씩 짝지어서 비교하기 좋아한다. 둘은 숫자가 많아 감당이 안 되므로 줄이려는 것이다. 대립된 둘 중에 하나를 배척하는 이항대립적 사고에 빠지게 된다. 이항대립적 사고에는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권력의지가 숨어 있다. 이는 관측자의 입장이 개입하여 오염된 것이며 객체 자체의 내재적 질서 곧 물리적 실재가 아니다. 불변에 주목하는 원자론과 변화에 주목하는 인과율은 서로 상충된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성질이며 성질은 변화다. 변화를 반영하는 인과율에 주목하는 것이 옳다. 광자는 있지만 암자는 없다. 1이 움직이면 관측자 입장에서는 2다. 모든 이항대립은 관측의 편의에 따른 왜곡이다. 인간이 원인과 결과에 모두 대응하려 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불변이 될 수 있지만 불변은 변화가 될 수 없다. 불안정은 안정이 될 수 있지만 안정은 불안정이 될 수 없는 계 내부 에너지의 일방향성이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우리가 물질로 여기는 것은 위치다. 위치를 연출하는 것은 성질이다. 바탕은 둘일 수 없다. 물질과 성질이 공존할 수 없다면 성질이 답이다. 성질이 관측된 것이 물질이다. 성질은 변화다. 변화는 불변으로 변화한다. 우주는 변화다. 에너지는 변화다. 변화는 생겨나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나 은폐된다. 계에 변화를 감추는 것은 나란함이다. 계는 내부에 대칭을 가지며 대칭은 하나 이상 비대칭의 요소를 가져야 한다. 비대칭은 연결이다. 모든 존재는 복제된 존재이므로 반드시 외부와 연결하는 비대칭이 있다. 우리가 아는 물질적 존재는 관측자와의 대칭이며 객체 자체의 내재적인 대칭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상호작용계 내부 에너지의 밸런스다. 그것은 수학으로만 접근된다. 밸런스는 공간을 생산하므로 척력이다.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려면 둘이 짝을 지어야 한다. 척력 둘이 짝을 지어 더 쉽게 밸런스의 평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인력이다. 물질에 성질이 깃드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일정한 조건에서 물질로 도약한다. 명사가 어떤 이유로 동사로 움직이는게 아니고 동사의 패턴이 반복되면 명사로 도약한다. 동사 중심 사유를 얻어야 한다. 변화 중심의 사유, 변화를 조절하는 밸런스 중심의 사유, 변화가 계에 갇히는 상호작용 중심의 사유, 메커니즘 중심의 사유를 얻어야 한다. 지식의 창의는 연역이고 귀납은 전달이다. 귀납은 전달과정에 방향이 바뀌므로 모든 귀납은 하나 이상 오류가 있다. 귀납추론은 노이즈를 제거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각인으로 연역한다. 뇌가 흥분하여 별도로 폴더를 만드는 것이 각인이다. 우연히 일어나는 패턴의 각인으로는 저급한 수준의 창의가 가능할 뿐이다. 귀납은 차별하고 연역은 보편한다. 생각하지 않고 대신 자극하여 되돌아오는 반응을 통해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차별이다. 연역이 지식을 대량으로 복제하게 한다. 인간은 선과 악처럼 짝지어 비교하기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둘의 밸런스에서 오는 긴장상태를 원한다. 인간은 긴밀하게 환경과 연결되고 사회와 연결된 상태를 원한다.
### 우리는 세상을 집합으로 이해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우주를 집합시킨 주체는 누구인가? 집합에 드는 비용은 누가 지불하는가? 집합하려면 거마비가 필요하다. 자연이 스스로 집합되는 것이 복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주는 복제된 것이다. 수학은 집합론으로 시작한다. 틀렸다. 복제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우리는 집합의 플러스 세계관에서 복제의 마이너스 세계관으로 갈아타야 한다. 모든 헷갈림과 시행착오의 원천이 집합과 복제의 진행방향의 차이에 있다. 집합되는 것은 물질이고 복제되는 것은 성질이다. 물질은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해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성질은 복제되므로 계속 늘어난다. 성질의 총량이 늘어나서 그것을 통제하는데 드는 비용이 증가하는 것이 엔트로피의 증가 법칙이다. 집합은 플러스다. 집합의 방향은 1에서 2다. 어디까지 가는가? 무한대다. 곤란해진다. 결론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끝맺음이 불가능하다. 반면 복제는 마이너스다. 하나가 내부모순에 의해 둘로 쪼개진다. 비용은 계 내부에서 자체조달된다. 집합은 끝이 없으나 복제는 질에서 시작하고 입자와 힘과 운동을 거쳐 량에서 끝난다. 비용의 자체조달에 따른 손실이 일어난 것이 엔트로피의 증가다. 집합과 달리 복제는 방향성이 있다. 비용의 조달이 가능한 방향으로만 복제되기 때문이다. 집합은 방향성이 없다. 모이라고 하면 사방에서 모여든다. 복제는 방향성이 있다. 하나가 둘로 쪼개질 때는 정확히 가운데서 쪼개진다. 대칭의 코어에서 복제된다. 대칭이 복제의 동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계의 균형을 이룬 다음 쪼개진다. 세상이 복제라면 원본이 있다. 생물은 세포의 집합이 아니라 복제다. 세포가 붙어서 진화한게 아니라 세포가 분열되어 진화한 것이다. 하나가 둘로 나뉘면 접점이 공유되므로 구조가 복잡해진다. 진화는 연결지점의 공유로 복잡해진 것이다. 집합은 단순하다. 쪽수가 많아 봤자 역할이 중복된다. 반면 복제는 쪼개지는 접점이 공유되므로 역할이 나눠진다. 밸런스의 가운데 축과 가장자리 대칭이 다르다. 이혼을 하면 자녀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하므로 역할이 나눠진다. 복제의 원본과 사본은 연결된다. 연결되는 라인의 한쪽 끝은 원본에 남고 반대쪽 끝은 사본에 남는다. 선을 하나씩 나누어 가지므로 모든 존재는 복제의 흔적을 가진다. 어미의 자궁과 연결된 흔적인 배꼽과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비대칭이다. 우주는 복제다. 복제는 대칭이나 이 대칭에서 저 대칭으로 갈아타는 부분은 비대칭이다. 우주는 대칭이지만 모든 대칭에는 하나 이상 비대칭이 숨어 있다. 닫힌 구조물은 하나 이상 짜맞추기가 아니라 억지로 끼워야 하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 지구는 중력이 끼워주므로 대충 돌을 쌓아두면 집이 되지만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비대칭의 불완전성에 의해 진정한 완전성에 도달한다. 비대칭의 사본이 비대칭의 원본을 연결하여 대칭을 완성한다. 우주는 대칭이나 계는 비대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