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변화를 해명한다. 환경 속에 내던져진 인간은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해야 한다. 변화를 추적하는 도구는 인과율이다. 사건을 구성하는 원인과 결과의 대칭성으로 변화를 추적할 수 있다. 원인과 결과의 대칭성은 각운동량 보존을 따른다. 변화는 공간의 거리가 시간의 속도에 숨는 것이다. 변화의 원인을 통제하여 결과를 유도하는 것이 권력이다. 권력은 거리를 좁혀서 속도를 얻는다. 권력의 근거는 둘이 공존할 때 일어나는 간섭이다. 집단 속의 간섭을 조절하여 변화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권력이다. 자연의 기세든 시장의 이윤이든 권력의 변종이다. 원인을 알려면 내부를 봐야 한다. 원인은 권력이고, 권력은 간섭을 통제하고, 간섭은 집단 내부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간섭이 구조다. 구조는 얽힘이고 얽히면 간섭한다. 원인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한자라도 원인의 인因은 사각형 내부에 갇혀 있다. 마르크스 이래 서양철학은 외부를 바라보는 남탓에 매몰되어 있다. 이게 다 귀족 때문이라거나 이게 다 부르주아 때문이라거나 하는 식이다. 그게 유아적인 남탓행동이다. 중학생이라면 이 정도는 극복해야 한다. 원인을 밖에서 찾는 서양철학의 오류가 자연과 인간을 이항대립으로 놓는 전통적인 세계관 때문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신유물론이다. 뿌리를 찾자면 세상을 선과 악의 다툼으로 보는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이 기독교에 수입되어 하느님과 사탄의 대립으로 복제된 것이다. 근대철학으로 구조주의가 알려져 있지만 인류학자와 언어학자의 소박한 웅성거림에 불과하다. 서양철학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 이항대립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서구 구조주의 사상에 구조가 없다. 개인의 에세이를 철학으로 포장한다면 넌센스지만, 이분법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구조에 눈길을 준 점은 평가할 수 있다. 21세기의 신유물론은 이항대립적 세계관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 진일보했지만, 유물론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유물론이든 유심론이든 그게 조로아스트교 변종이다. 알아야 한다. 모든 원인은 내부에 있다. 내부에 거리를 속도로 바꾸는 권력이 있다. 권력은 거리를 조절하여 결과를 유도한다. 모든 갈등은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다수자와 소수자, 남자와 여자 간의 거리조절 문제다. 자전거의 기어 단수 변화와 같다. 거리를 속도로 바꿀 뿐 그 역은 없다는 점에서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이항대립은 없다. 빅뱅 이후 우주는 궁극적으로 비대칭이다. 닫힌계 안에서 권력은 일방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