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물론에 대해서는 검색해도 나오는게 없다. 대략 자연과 인간을 대립항으로 놓는 이분법적 사고를 극복하는 일원론이고, 외부에서의 남탓이 아니라 내부에서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21세기 철학의 새로운 조류라고 한다. 큰 틀에서 구조론과 방향이 맞다. 구조는 사건 내부의 의사결정구조다. 구조론은 남탓을 반대하고 자발성을 강조하는 일원론이다. 그러나 본질의 차이가 있다. 구조론은 유물론을 반대한다. 모든 유물론은 이원론이다. 인간과 자연을 대립항으로 놓는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 신유물론의 출발점이다. 사실이지 유물론과 유심론은 이항대립적 사고의 부산물이다. 유심론이 틀렸다면 유물론도 틀렸다. 문제는 대체재다. 이항대립을 극복하는 신유물론의 대체재는? 구조론의 대체재는 의사결정구조다. 일원은 하나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는 실은 하나라야 한다. 그 하나의 실을 제출해야 한다. 구조는 엮임이다. 구슬이 엮여서 세상으로 꿰어졌다. 신유물론은 그것이 없다. 알맹이가 없다. 주어가 없어서 말이 겉돈다. 남의 이항대립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일항구조를 제출해야 한다.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다. 객체와 기능이다. 구조론은 Object가 아니라 Function이다. 유물론은 Object에 매몰된다. 객체를 붙잡는 것은 주체다. 주체는 인간이다. 왜 이런 혼선이 생겼을까? Function을 설명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라면 프로그램을 보여주면 된다. 자연의 소프트웨어는 무엇인가? 영혼인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존재의 소프트웨어는 뭐지? 구조다.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대충 둘러댄 말이 영혼이다. 그리스 사람은 시시콜콜 따지기를 좋아한다. 영혼 말고 그럴듯한 단어가 없을까? 플라톤이 주워온 말이 이데아다. 사람의 주체는 영혼이고 물질의 주체는 이데아다. 영혼이 없는 사물에 거짓 영혼을 부여한다. Object가 존재의 소프트웨어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딱 봐도 아니잖아. 직관적으로 안다. 하드웨어만 가지고 컴퓨터가 작동하냐? Object가 답이 아니면 Subject다. Subject가 뭐지? 영혼이다. 영혼이 뭐지? 이데아다. 이데아가 뭐지? 신이다. 아니면 말고 마구잡이로 단어를 투척해 본다. 구조를 모르고 Function을 모르는 옛날 철학자가 벌인 아무말 대잔치다. 영혼은 사람이고 사람은 주체다.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영혼과 물질의 이항대립을 끝내 졸업하지 못한다. 문장은 주어와 동사다. Object가 주어, Function은 동사다. 우주는 동사로 설명되어야 한다. 주어는 인간이 차지했다. 동사는 변화다. 변화는 수학으로 설명된다. 물질은 매개할 뿐 수학이 자연의 Function이다.
진리 - 객체가 아니라 기능, 주어가 아니라 동사, 존재가 아니라 변화다. 유심론 - 객체가 답이 아니라네. 그럼 주체인가? 주체는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면 영혼? 영혼도 아니면 이데아? 이데아도 아니면 신? 아무나 하나만 걸려라. 마구잡이로 던져보자. 유물론 - 사람은 주체니까 빠져. 주최측이 선수로 뛰는게 어딨어? 주체가 아니면 답은 객체네. 주체는 찌그러져. 주체 미워. 인간 미워. 물질 사랑해. 신유물론 - 주체가 답이 아니라면서 왜 자꾸 주체를 끌어들여? 순수하게 객체를 바라보라고. 객체 안에 뭔가 있다구. 자발성이 있네. 근데 그게 뭐지? 나도 몰라. 구조론 - 객체가 아니라 기능이다. 기능은 구조다. 답은 구조다. 구조야말로 우리가 찾으려 하는 존재의 소프트웨어다. 주체와 객체가 핑퐁을 한다. 지난 수천년 간 논의가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객체가 아니면 기능인데 객체 내부의 기능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밖에서 주체와 객체가 반사놀이를 하며 뺑뺑이를 돈다. 신유물론 역시 내부에 관심을 둘 뿐 기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유물론은 게임의 주체인 인간의 간섭을 배제하고 건조하게 자연을 본다. 반대로 자연에는 눈을 감고 인간의 희망사항에 맞추어 소설 쓰는 것이 유심론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그러하다. 그런게 있었으면 좋겠다. -> 그런게 있다고 치자. -> 그런게 있다. 이렇게 해먹는다. Function은 수학이다. 수학이 존재의 기능이다. 기능은 일원론이다. 수학이 일원론이기 때문이다. 수학은 기능이 주어질 뿐 주체와 객체가 없다. 대신 둘을 연결한다. 수학은 인간과 자연을 연결한다. 수학이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듯이 자연도 그렇게 구조로 연결된 존재다. 수학은 객체의 내부사정이다. 세상은 물질이 아니라 수학이 만든다. 물질이 컴퓨터가 아니고 프로그램이 컴퓨터다. 물질은 기능을 매개할 뿐 고유한 성질이 없다. 바둑판이 바둑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두뇌가 바둑을 둔다. 깨달음은 객체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어떤 사람이 화장실에 간다면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내부사정에 있다. 어떤 외적인 목적이나 동기나 의도나 음모나 계획 따위가 있는게 아니다. 그냥 속이 불편해서 화장실에 간 것이다. 우리가 찾는 답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만약 원인이 외부에 있다면? 더 큰 단위의 닫힌계를 지정하여 내부구조를 찾아야 한다. 세상은 수학이며 수학은 내부사정이다. 그런데 유물론과 수학이 충돌하므로 신유물론이든 구유물론이든 틀렸다. 문제는 수학도 깊이 따져보면 외부를 바라본다는 점이다. 1에서 2를 보는게 수학이다. 수학은 둘의 비교이며 둘 사이에 이퀄이 있다. =가 있다. 작대기가 두 개다. 수학이 1에서 2를 바라본다면 구조론은 2에서 1을 찾아간다. 구조론의 1은 둘의 교차점이다. 두 선이 교차하는 접점이 점이다. 점을 도출하는 절차가 구조론이다.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은 내부에 숨은 일점의 도출로 규명된다. 범인이 칼로 찔렀든, 총을 쐈든, 불을 질렀든 반드시 사건의 시작점이 있다. 찌르는 칼날의 일점, 날아가는 총알 끝의 일점, 불을 옮겨붙이는 성냥개비의 일점이 있다 . 구조론과 수학은 방향이 반대다. 1에서 2를 바라보면 3과 4와 5를 거쳐 계속 가지만 2에서 1을 바라보면 거기서 멈춘다. 수학은 발산되고 구조론은 수렴된다. 수학은 둘을 세고 구조론은 둘을 상자 하나에 담는다. 구조론은 둘의 만남을 주선한다. 구조론은 하나의 객체 내부를 들여다 보고 수학도 두 객체 사이의 내부를 보지만 구조론은 순수하게 내부를 바라보고 수학은 다시 내부의 둘을 비교한다. 서울과 부산은 대한민국 내부에 있다. 구조론은 서울과 부산을 하나의 KTX로 연결한다. 수학은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를 잰다. 구조론은 하나의 일치를 찾고 수학은 둘의 불일치를 변별한다. 우리가 알아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의 성질이다. 1은 성질이 없다. 2는 집단이다. 집단이 움직이면 내부 자원이 떨어져 나간다. 떨어지지 않으려면 붙잡아야 한다. 붙잡으면 간섭받는다. 내부의 간섭이 원인이다. 세상 모든 사건에 공통되는 원인은 내부간섭이다. 언제나 내부에서 발목을 잡는게 있다. 개체는 성질이 없다. 집단은 성질이 있다. 집단의 성질은 변화에서 나타난다. 움직이지 않으면 간섭도 없기 때문이다. 물질의 성질은 간섭에 의한 것이므로 물질의 여러가지 성질은 우주가 원래부터 변화하며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빅뱅 때의 간섭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무에서 간섭이 발생한게 아니라 숨어있는 내부의 간섭이 들추어진 것이다. 외부 간섭은 무에서 발생하지만 내부 간섭은 원래부터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간섭은 탯줄로 연결된 시점부터 있었다. 자동차가 정차해 있어도 엔진은 돌고 있다. 우주는 언제나 움직이고 있으며 자연의 변화는 내부의 간섭이 드러난 것이다. 존재는 외부의 작용에 대응하면서 내부간섭이라는 조건에 제한이 걸리며 변화는 그 조건을 충족하는 한도 안에서 일어난다. 그 제한이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다섯 차례의 내부간섭을 통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둘 사이의 외부 간섭은 수학이 규명한다. 어떤 하나 안에 원래부터 있었던 내부 간섭은 구조론이 규명한다. 커플이 결혼해도 외부의 방해자는 수학이 규명하고 내부의 방해자는 구조론이 규명한다. 커플 내부에서 밸런스가 맞느냐는 구조론이 규명하고 외부의 제 3자와 비교하여 어떻냐는 수학이 계산한다. 화살을 똑바로 쐈는데 바람의 영향으로 휘어져 날아가는 것은 수학이 규명하는 외부의 간섭이다. 궁수가 활시위를 놓지 않으면 절대로 화살이 날아갈 수 없다는 제한이 걸리는 것은 내부의 간섭이다. 역사이래 인류의 지식은 모두 수학이 규명하는 외부간섭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를 떠올릴 수 있다. 수학의 발견이 인류의 첫 번째 모노리스라면 구조론이 인류의 두 번째 모노리스가 된다. 멍청이와 똑똑이를 구분하기는 쉽다. 무슨 말이든 시켜보자. 객체를 나열하면 멍청이고 기능을 설명하면 똑똑이다. 객체를 열거하면 지루해서 긴장이 풀리고 기능을 연결하면 조여져서 긴장하므로 차이를 금방 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