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독자 중에서 누구에게 권력이 있는가? 아라비안나이트는 살아남은 이야기다. 민간의 무수히 많은 이야기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이야기 1001개가 종이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이 경우는 독자에게 권력이 있다. 복카치오의 데카메론도 마찬가지다. 페스트를 피해서 시골로 숨은 귀족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면 야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대중은 균일하다. 그 공간에 열 명의 독자가 모여 있다면 열 명이 모두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경우 문학의 수준은 하향평준화 된다. 일베충 말로는 민주화 되는 것이다. 구조론 말로는 중국화 되는 것이다. 영국화 되어야 하는데.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보자. 의리의 아킬레스는 장비, 충의의 헥토르는 관우, 지혜의 오디세우스는 유비다. 삼국지 캐릭터와 같다. 삼국지 평화는 가난한 소설가들이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한다. 어린이 수준에 맞추어진다. 장비가 주인공인 이유다. 어린이는 장비니까. 셋 중에 막내가 장비다. 문학은 하향평준화 되고 캐릭터는 정형화 도식화 된다. 세익스피어와 같은 심리 묘사는 불가능. 소설가는 애드립이 중요하다. 소설가는 판소리 비슷하게 거리에서 떠든다. 고도의 심리 묘사를 하면 소설가의 개인기를 살린 즉흥연기를 못 한다. 그런데 종이책이 등장하면서 권력의 갑을관계가 변했다. 이제는 작가가 권력자가 된다. 독자는 그 작가를 싫어한다. 그럼 다른 신문을 보라고. 독자는 각자 자기 취향에 맞는 연재를 골라 읽는다. 모두를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세익스피어의 지성은 당시 인류 중에서 가장 앞서 있었다. 인류 중에 가장 앞서 있는 한 사람의 사유를 만인이 복제하므로 인류 전체의 지성이 향상되었다. 돈 키호테는 근대소설 특유의 입체적인 캐릭터다. 선인 듯 악이고 악이면서 선이다. 용감한 듯 멍청하고 멍청한 듯 용감하다. 이런 이중적 캐릭터는 길거리에서 꼬맹이들에게 암송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가의 방식과 맞지 않다. 중세 음유시인의 노래와도 맞지 않다. 종이책이 있어야 먹히는 형태다. 그런 권력의 갑을관계에서 거대한 전복이 일어났다. 조폭 유튜브가 뜬다. 야한 BJ가 뜬다. 박막례 할머니가 뜬다. 지하철 시가 뜨고, 뽕짝이 뜨고, 이발소 그림이 뜬다. B급문화를 넘어 C급문화, D급문화로 퇴행한다. 점차 중국화 된다. 길거리에서 대변을 싸지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게 생리현상인데 뭐 어쩌라고? 축구를 보려면 메시를 보고, 야구를 보려면 이정후를 봐야 한다. 모방하려면 스티브 잡스를 복제하고 일론 머스크를 복제해야 한다. 꼴찌만세.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영구없다. 인생극장. 슈퍼스타 감사용. 7번 방의 선물. 이런 자위행위에 나르시시즘 퇴행은 이제 그만. 텔레토비 친구들 헤어질 시간이에요.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백 년 전에 나온 이상의 말이다. 한 발짝이라도 전진하려거든 20세기는 이제 그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