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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행복은 작은 것에 있지 않을까? -.-;』 |
서유견문 대 조선책략
구한말 조선사회를 움직인 두 권의 책이 있다.
하나는 유길준(兪吉濬)이 서구 여러나라를 돌아보고 와서 쓴 서유견문(西游見聞)이고,
하나는 청국인 황준헌(黃遵憲)이 쓰고 일본에 수신사로 갔던 김홍집(金弘集)이 받아와서
고종에게 바친 조선책략(朝鮮策略)이다.
두 권의 책은 물론 배경이 다르고 내용이 다르므로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아니지만, 당시 조선을 움직인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고, 그 책의 내용에 있어서도 기묘한 대칭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한국인이 썼고 하나는 청국인이 썼다. 서유견문은 아래로부터의 개화운동을 주장하고 있고, 조선책략은 위에서 어떻게 외교적인 책략을 잘 구사해서 나라를 건져보자는 주장이다. 서유견문에는 철학이 있고 조선책략에는 술수가 있다. 서유견문이 자주라면 조선책략은 외세의존이다.
문제는 2003년 이 시대의 지식인들도 그 시대 조선의 선비들과 발상법이 비슷해서 ‘서유견문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선책략적 발상’을 하는 인간들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선거철만 되면 나타나는 황태연류 강단전략가들의 4자필승론이니 지역연합론이니 하는.. 혹은 강준만류 우리당필패론이니 하는 따위 말이다.
이런 류의 치졸한 발상들은 그 사고의 방식에 있어서 100년 전 조선책략의 ‘러, 일, 청, 미’ 사강틈새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전율하게 한다. 물론 조선책략에도 일부 긍정적 내용은 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미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은 당시 기준으로 보면 탁견(?)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외세의존적 발상이다. 그 때의 외세의존이 지금은 지역주의의존, 보스정치의존, 구태정치의존, 기존의 정치판도의존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이른바 강단책략가들이 끊임없이 아류 조선책략들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개혁세력의 총체적 역량을 키울 생각은 안하고, 어떻게 기존의 짜여진 판도를 이용해서 우리의 희생없이 공으로 권력을 얻어낼 생각만 한다. 개혁세력의 총체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선거에 질 각오를 하고 고난의 행군을 감수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민노당은 의석 하나 없어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진정으로 말하면 우리당의 40여석 만으로 분에 넘치는 숫자다. 대한민국 안에 진정한 개혁세력이 몇프로나 된다고 보는가? 적게 잡으면 5프로고 많이 잡아야 30프로다. 그 이상 얻고자 하면 벌써 오바다.
노무현의 당선은 어떻게 보면 기적이다. 기적이 두 번씩 반복되기를 기대해서 안된다. 겸허하지 않으면 안된다. 개혁에도 거품은 걷어내야 한다. 지역주의에 의존하지 말고 개혁세력의 본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우리의 솔직한 본실력으로 말하면 30여석이 과분하다.
100년전 당시는 개화가 이슈였고 지금은 개혁이 이슈이다. 서유견문적 사고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사람 하나하나가 다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조선책략적 사고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합종연횡을 잘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사람 하나하나가 다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 하나하나가 다 개화하는 더디가는 길을 참아내지 못하고 지름길을 꾀하다가 나라를 통째로 들어다 바치고 만 것이다. 남의 힘을 빌려 개화에는 성공했는지 모르지만 보시다시피 그 결과가 이렇다.
기존에 짜여진 판도를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 잘 적응해보자는 발상이 조선책략적 발상이다. 고종황제가 선비들에게 권장하여 강제로 읽게 한 그 100년 전의 해악이 지긋지긋한 망령이 되어 아직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불행은 강준만과 같은 지식인들도 사고의 유형에 있어서는 ‘조선책략적 발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주어진 판도에 적응하는 슬기로움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거기에는 개척정신도 도전정신도 희생정신도 없다.
필자가 주장하는 ‘서유견문적 사고’란 무엇인가? ‘가능성을 개방하기’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기존의 힘들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일어설 때 까지 더디 가더라도 바른길로 가야한다는 말이다.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형세와 판도를 역이용하려다가 그 ‘판도와 형세’라는 이름의 악들이 터줏대감으로 뿌리를 내리도록 방치해서 안된다는 말이다.
선거철만 되면 마키아벨리즘이 난무한다. 개혁이란 이런 저런 수를 쓴다고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미래는 여전히 안개속이다. 우리는 단지 되는 방향으로 가는 확률을 조금씩 높여갈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상황을 약간 더 부드럽게 하는 정도이다.
기득권이라는 완고한 틀이 짜여지지 않게 말이다. 우리 주변에 늘어선 지역주의의 힘, 보스정치의 힘, 레드컴플렉스의 힘, 적대적 언론환경의 힘.. 그 강한 힘들이 고질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차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편으로라도 적들의 힘에 의존해서 안된다.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빠져나오기 힘든 길로 들어서서 안된다.
원초적으로 ‘종자가 다른’ 정균환, 박상천들의 힘에 의지해서 안되고, 지역주의의 힘에 의존해서 안되고, 합종연횡의 술수에 의존해서 안된다. 필패로 가는 한이 있더라도 ‘힘의 논리’ 그 자체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된다. 다수당에 실패하더라도 10보를 전진하여 저 고지에 개혁의 깃발을 꽂을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그게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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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뒤통수나 쳐서 떠보겠다는 추미새정치, 김민새정치 이제는 탈피해야 함다.』 |
끝으로 서유견문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 인용하면
세계 어느 나라를 돌아보든지 간에 개화가 극진한 경지에 이른 나라는 없다. 대강 그 등급을 구별해 보면 개화한 자, 반개화한 자, 미개화한 자 등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개화한 자란 천만가지 사물의 이치를 따져 밝히며, 경영하여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기를 기약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게으름도 찾아볼 수 없으며, 또 사람을 대접하는 데에 있어서도 언어와 행동거지를 공손하고 단정하게 하여 능한 자를 본받으며 능치 못한 자를 불쌍하게 여기되, 모욕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며, 야비스러운 용모를 갖지 않음으로써 지위의 귀천이라든가, 형세의 강약에 이해 인품의 구별을 하지 않는 등을 말한다. 나아가 온 국민들이 합심하여 앞에서 열거한 바와 같이 여러 조목에 걸친 개화에 공동 노력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힘쓰고 노력하기를 그치지 않으면, 반개화한 자와 미개화한 자라 하더라도 개화한 자의 근처에 이를 수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듯이 힘써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루지 못하겠는가.
당시의 개화사상이나 지금의 개혁사상이나 다르지 않다. 5프로의 진정한 개혁세력이 있는가 하면 30프로의 반쯤 개혁세력도 있고 절대다수의 아둔한 자들도 있다. 결국은 사람이 바뀌고서야 진정한 개혁이 가능하다. 사람 모두를 바꾸기 위해 더 견디고 희생하지 않으면 안된다.
100년전 우리는 결국 남의 힘을 빌어 개화를 했고 그 결과는 이렇듯 참담하다. 여전히 외국군대를 자국의 수도에 주둔시키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런 때 윤동주의 자화상(自畵像)이 생각키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