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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6591 vote 0 2003.11.16 (21:43:45)

-본문이 영화의 결말을 알려주지는 않으나 혹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매트릭스 레볼루션’을 봤습니다. 거기에 기대했던 혁명은 없었습니다. 제 기준으로는 기대에 못미쳤지만 전투장면 좋아하는 젊은이라면 8000원이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화는 장르에 따라 개인적인 선호도의 차이가 크지요. 심지어 그날 컨디션에 따라 재미가 달라지기도 하구요.

못마땅한 대목

『 매트릭스의 한 장면.. 대략 안성기 박중훈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생각나오.』


● 프랑스인을 반복적으로 비난 혹은 암시하는 대목.. 이라크전 때문에 삐친듯.. 아니 이라크전 이전부터 헐리우드는 교묘한 방법으로 프랑스적인 가치들을 깎쟁이로 비난 혹은 조롱하곤 했음. 프랑스문화에 대한 열등감이 뼛골에 사무친듯.

상투적인 대목
● 인도인은 프로그래머 시키기 (실제로 실리콘 밸리엔 인도인 프로그래머가 많다고 함)
● 동양인은 괜히 따라다니기 (중국 액션배우 하나가 가방들이 비슷하게 따라다녔음, 홍콩액션 베끼기에 대한 일종의 인세?)
● 여주인공은 사랑밖에 나는 몰라 (분위기에 안맞는 사랑타령, 여성에 대한 편견)
● 그외 다양한 인종이 참여했으나 각기 하나씩 역할을 나눠줌. (그 역할의 결정은 편견에 기초함)

역할 나누기가 아니라 역할바꾸기가 참된 것입니다. 안민가 식으로 군은 군다이, 신은 신다이, 민은 민다이, 백인은 백인다이, 흑인은 흑인다이, 동양인은 동양인다이.. 오라클은 흑인여성 그 상대는 백인남성. 미쁘지 않은 발상입니다. 그 역할의 벽을 넘어서야 진짜일 수 있겠지요.

썰렁한 대목
● 악당 스미스의 많은 분신들은 아무런 하는 일이 없이 놀았음.
● 웅장한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총만 쏘아댈 뿐 그 몸집에 걸맞는 격투신은 보여주지 않음.

우낀 대목
● 노숙자가 전철역장 혹은 전철운전기사 (우리나라 지하철도 노숙자들이 꽉 잡고 있음)

영화적인 실패
미학적 완결성의 면에서 검토한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민중이 아니라 귀족(크샤트리아 계급)이고, 문제가 해결된 후 엔딩신에서 사실은 두 승려(바라문 계급)간의 게임으로 결론을 내리는 데서 실소함. (장난하자는 거냐?)

엘리트계급으로 오해되어 민중들에게서 버림받았던 주인공 전사가 다시 민중과 하나되면서 민중이 위기에 처한 주인공을 도와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형태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미학적 표준에 맞는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목숨 걸고 싸운 많은 민중들의 영웅적인 활약이 몽창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밑에서는 목숨을 던져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데 위에서 스위치 한번 눌러서 전원을 내리는 방식으로 ‘전쟁 끝’ 하고 선언함.. 분위기 왕 썰렁해짐.

영화 중에 토론할만한 내용은 없다시피 하고 철학은 물론 꽝이었는데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대사..

영감 “알고 있었나?”
할멈 “믿었을 뿐이지.”

여기서 앎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앎이 공간적인 것이라면 믿음은 시간적인 것입니다. 즉 앎은 어떤 공간적 위치에 도달하는 것으로 성립하지만, 믿음은 시간 상에서 그것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거죠. 무엇인가? 그 앎이 미래에 대한 앎이라면, 믿음은 그 미래에 영향을 미쳐서 미래를 바꾸는 즉 능동적 실천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지요.

불확정성의 원리 처럼 미래는 가변적인 것.. 앎이 미래를 아는 것이라면, 문제는 그 미래가 여전히 불확정적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앎으로 부족하고 실천이 필요하지요. 예컨대 “노무현이 파병하지 않을줄 알고 있었다” 혹은 “파병할줄 알고 있었다”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영향을 미쳐서 그 결정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해야만 하는 거지요.

그러므로 앉아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으로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곧 때로는 알아도 의도적으로 모른 체 해야한다는 거죠. 안다고 해서 곧 아는 체 하면 그 아는 체가 영향을 미쳐서 미래를 바꿔버리게 됩니다. 이 경우 그 앎은 틀려지는 거죠.

그러므로 훌륭한 부모는 자녀가 힘겨운 도전에 직면했을 때, 믿기 때문에 오히려 모른체 하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혼자 힘으로 일어서도록 방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노무현을 믿는다면, 믿기 때문에 오히려 노무현을 비판해야 하고, 믿기 때문에 오히려 노무현의 어려움을 모른체 해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노무현을 믿는가? 그렇다면 모른 체 하라!”

매트릭스 레볼루션에서 믿음은 반복적으로 강조되었으나 실제로는 소극적으로 처리되었습니다.

“난 믿어!”
 “이 사람은 기적을 믿는다구.”

이렇게 말로 믿음을 ‘선언’하기만 하고 그 믿음을 실천하지는 않더군요. 그것이 실패. 믿음은 실천이며 그 실천은 알면서도 모른체 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역으로 실천에 의해 담보되지 않은 종교적, 혹은 맹목적 믿음은 ‘무지’일 때가 많습니다. 진짜 믿음은 참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거죠.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과거라면 정치지도자와 민중의 사이를 종이신문이 차단하고 있어서 지도자의 의사가 민중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노무현이 선보이고 있는 ‘고단수 정치’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인터넷 덕분에 지도자의 의사가 보다 분명하게 유권자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장문의 인터뷰를 가감 없이 싣고 있는 오마이뉴스, 정치담론의 밀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 서프라이즈 등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정치지도자의 의사가 보다 분명한 형태로 민중들에게 전달되므로서 공동체 구성원 각자의 보다 세분된 형태로의 의사결집과 이념적 정치기동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과거라면 뭉뚱그려진 형태로 투박하게 진행되었을 논의들이 보다 세밀한 형태로 진행되므로서 유권자의 의사를 더 빠르고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근 부쩍 늘어난 방송토론과 언론사의 즉각적인 여론조사도 이러한 쌍방향 의사소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봅니다.

 과거 정치지도자들이 ‘무조건 나를 믿고 따르라’는 식의 독선적인 정치행태를 보인 이유는 열악한 미디어 환경 덕분에 ‘세밀한 정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강준만의 오판도 이 때문으로 봅니다.(강준만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러하다는) 지도자와 민중사이에서 밀도있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때는 강준만 주장대로 안전하게 행보하는 것이 좋으나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속된 말로 정치가와 지지자 사이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때 어떻게 하는 것이 제대로 ‘짜고 치는’ 것일까요?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차이는 여기에서 갈라집니다. 우리가 노무현을 위하여 알아서 긴다면 ‘아는 것’이 되겠지만 ‘알고도 모른 척’ 우직하게 밀어붙인다면 ‘믿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노무현의 의사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보다 왼쪽으로 5보 더 전진하므로서 노무현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라 봅니다. 그렇게 공간을 만들어주었는데도 잘 안된다면 또한 진인사대천명, 제 2의 노무현을 발굴하여 '리로디드'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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