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 노는 꼬라지를 보라지. 참으로 역겨운 것이다. 예를 들자면 롤리타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인간들 행태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금서목록에 여러 번 올랐던 작품이지만 위대한 영문학 작품이라며 필독서로 추천되어 있다. 뭔 개수작이냐구. 갈피를 잡아야지.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욕하면서 추천하는건 뭐냐구. 나무위키 롤리타 항목은 주인공 험버트를 매우 까고 있다. 작가 나보코프가 봤다면 비웃는다. 그게 문학을 대하는 태도냐? 하여간 예술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머저리들은 매우 많다. 양심적으로 머저리들은 나무위키에 손대지 말도록 하자. 하긴 나무위키 이용자도 대개 머저리니까 할 수 없지만 말이다. 머저리는 머저리로 다스리는 것도 방법이 된다. 문학을 좀 아는 사람이 수준 높은 내용으로 나무위키 항목을 고쳐놓는다면 더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할 것이다. 한국인들은 조또 모르는 주제에 다 아는 척하며 의견을 내려 들기 때문이다. 하여간 방법이 없다. 이 지구라는 명함도 못 내미는 촌구석 별에서는. 황당한 현상이 생긴 이유는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이데아, 이성, 절대정신, 혁명, 생태, 성찰, 진정성도 마찬가지로 우상화 되어 있다. 우상을 깨야 한다. 우리는 본질을 버리고 도구를 얻어야 한다. 성찰이 대표적으로 우상화된 말이다. 민주당은 성찰하라면서 조국을 까고, 인간사냥을 하고, 죽은 사람 또 죽이고 마음껏 야만성을 휘두른다. 누가? 박지현이. 그렇게 우상을 이용하여 인간은 악마가 된다. 사람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은 성찰 때문에 사람 잡는 세상이 되었다. 하여간 웃기고 자빠진게 사피엔스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뭐든 용서가 되는 걸로 되어 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사랑장사로 밥 먹어야 하니깐. 그게 밥 먹는 기술일 뿐. 도구일 뿐. 사랑은 잠시 동안의 호르몬 반응에 불과하다. 물론 길게 가는 수도 있다. 짧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진정한 사랑이 따로 있고 가식적인 사랑이 따로 있는게 아니다. 호르몬에 진정성 호르몬과 가식적 호르몬이 있는게 아니다. 호르몬이 무엇을 정당화 시키는 것은 아니다. 까놓고 이야기하자. 인간들이 너무 어린 고양이를 입양한다. 아기를 엄마 품에서 떼놓는다. 잔인하지 않은가? 험버트의 범죄와 무엇이 다른가? 브리더는 강아지의 유전자를 변형시킨다. 많은 견종은 탄생 때부터 병을 달고 태어난다. 롤리타는 어떤 어른 남자의 어떤 여자 아이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간들이 늘상 저지르는 일이다. 쥴리가 대통령 자리에 손을 댄 것이나 어린 아이에 손을 댄 험버트의 범죄나 뭐가 다른가? 호르몬에 미쳐 광분하는 것은 똑같다. 강아지를 사랑한다며 학대하고, 롤리타를 사랑한다며 학대하고, 캣맘들은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지 않고 길에서 키운다. 그게 동물학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랑한다며 저지르는 동물학대, 인간학대는 용서가 되는가? 많은 범죄가 사랑의 이름으로 물타기 된다. 애드거 앨런 포가 유명하다. 영화감독 중에도 많다. 홍상수 행각도 일종의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그게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유치하다. 눈앞에 멋진 것이 있다면 손을 대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 인간적인가? 이성으로 극복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진지 빨고 답하려는 등신들과는 대화하지 말자. 누군가 대마초를 주면 피울 인간은 많다. 분위기를 잡으면 넘어가는게 보통이다. 그런 시험에 들지 않으면 운이 좋은 것이다. 인간은 가벼운 동물이다. 그런건 확실히 거렁뱅이들의 대화주제가 된다. 글자 아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 본질은 탐미주의다. 작가의 의도는 사람들을 놀래키는 것이다. 인간은 무수히 운명 앞에서 시험에 든다. 부족민은 열세 살이면 독립한다. 우리 나이로는 열다섯이다. 롤리타는 열두 살인데 우리 나이로 열넷이다. 열넷이면 남자를 꼬셔야 하는 나이다. 부족민이라면 말이다. 문명인은 다르다. 문명사회에서는 가족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보호연령은 계속 높아지는 추세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을 놀래키는 것이다. 부족민의 본능을 들고나온다. 열두 살이면 확실히 남자를 꼬실 만하다. 이왕 꼬시려면 힘 있는 중년 남자를 꼬셔야 한다. 살인범 이은해도 중학생 때부터 그런 짓을 했다지 않는가? 필자가 말하려는 것은 사랑의 우상이다. 사랑이라고 하면 뭐든 용서가 된다? 천만에. 나무위키 머저리들은 그 문제로 혀가 꼬인다. 12살 꼬마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 험버트의 사랑도 진짜가 아니다. 그걸 주장하려고 한다. 유치하다. 모든 사랑은 진짜다. 사랑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다. 호르몬이다. 단 유통기한이 짧다. 사랑이라고 정당화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면 대개는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주변에서 관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는데 말리면 당사자가 자살할지도 모르고. 말려서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더라는건 경험칙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는 관여한다. 사회가 그 방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버려진 애들이 많았다. 가출하는 애들도 많고. 그때는 거둬주는게 고마웠다. 16살이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었다. 일본은 아직도 그렇다고. 버려진 애들을 누군가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은 원래 내일이 없는 동물이다. 눈앞에 예쁜게 있으면 손을 댄다. 아무 생각이 없다. 정선 카지노에 그런 인간들 삼천 명 있다. 한순간의 도박심리나 한순간의 성적 유혹이나 같다. 윤석열도 눈앞의 반짝이는 대통령 자리에 손을 댄다. 그런 애들은 말릴 수 없다. 인간이 다 그렇다. 글자 아는 사람은 달라야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이런 것이다. 나는 너를 유혹할 수 있다. 너는 넘어오고야 만다. 내가 언어의 유혹을 보여주겠다. 인간은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다. 음악이든 그림이든 문학이든 사랑이든 돈이든 재주든 몸이든 뭐든. 어떤 원시인은 길에서 우연히 주운 반짝이는 돌로 사람을 유혹했다. 그냥 돌인데 말이다. 사실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동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당신은 이미 내게 유혹되어 있다. 인간이 유혹에 약하다는 사실 자체가 매혹적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점잖은 사람들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는 척해 주는게 예의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은 예술을 감상할 자격이 있다.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벽계수가 욕을 먹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