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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907 vote 0 2022.04.14 (17:42:47)

    도구주의라는 말은 용어가 선점되어 있어서 오해될 수 있겠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도구는 다른 것이다. 도구는 주체와 대상의 연결수단이다. 그곳에 우리가 찾으려 하는 답이 숨어 있다. 인위적 연결은 도구다. 사회적 연결은 관계다. 자연의 연결은 구조다. 뭐든 연결이다.


    자연은 구조로 보고, 사회는 관계로 보고, 인간의 실천은 도구로 봐야 한다. 세상을 도구로 보는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연장을 날카롭게 다듬으면 되기 때문이다. 도구가 없으므로 좌절하고 좌절하므로 화를 내는 것이다. 화를 내면 상대가 내 쪽으로 조금 다가온다. 


    상대를 유인하여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다. 인간의 분노는 도구를 잃은 자가 상대를 유인하여 유리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그것을 도구로 삼으려는 행동이다. 상대를 유인하려면 그만큼 내 땅을 내줘야 한다. 러시아처럼 땅이 넓은 나라가 자주 쓰는 기술이다. 


    보통은 상대를 유인하려고 뒷걸음질하다가 궁지에 몰린다. 일체의 감정적 기동은 도구가 없는 자가 상대를 자극하여 뭔가 수를 내보려고 하는 것이다. 도구가 없다는 사실을 들키는 행동이다. 본질주의냐 도구주의냐 하는 말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도 있다. 


    본질주의냐 구성주의냐 하는 말도 있다. 다양한 인간들이 본질이라는 단어에 뭔가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왜인가? 본질은 외통이기 때문이다. 궁지는 불안하다. 인간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북극에 도달하면 뭔가 허황되다. 양파껍질을 계속 까면 언젠가 본질에 도달한다. 


    본질은 무다. 없다. 세상의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떤 둘의 사이에 있다. 다이아몬드를 계속 까면 탄소가 남는다. 불에 탄다. 사라진다. 뭔가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는 프리마돈나의 목에 걸려 카메라 기자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인생의 종착역은 없다. 최종 목적지는 없다. 천국은 없다. 철학자가 꿈꾸는 이상향은 없다. 과정이 중요하고 상호작용이 의미 있고 게임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사건이다. 사건은 게임이다. 게임은 대칭이다. 대칭은 어떤 둘의 팽팽한 맞섬이다. 


    언어는 주어와 목적어의 맞섬이다. 주체와 객체, 관측자와 관측대상, 주인과 손님이 대칭을 이룬다. 그사이에 관계가 있다. 그 관계의 내막이 우리가 알아야 할 구조다. 도구로 접근된다. 문제는 인간의 관점이다. 우리는 무심코 주어를 생략한다. 대칭을 잃고 외통에 몰린다.


    가늠쇠Front에 홀려서 가늠자Rear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주어를 생략하지 않는 영어권이 더 과학적으로 사유한다. 우리는 주어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목적어에 매몰된다. 본질은 주어가 바라보는 목적어다. 주어는 인간이고 목적지가 본질이다. 그런데 그 본질은 없다. 


    언어의 진실은 주어도 아니고 목적도 아니고 동사다. 주어와 목적어는 동사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에 불과하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인간도 없고 천국도 없고 여행이 있다. 동사가 존재의 진실이다. 집과 집 사이에 길이 있다. 길은 둘 사이에 걸쳐진다.


    우리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려고 하지만 인생에 도달되는 집은 없다. 길이 인생이다. 길을 찾으려면 두 채의 집을 찾되 다시 그 두 채의 집을 버려야 한다. 문제는 출발점의 망각이다. 주어를 잊어버린다. 서브젝트를 망각하고 오브젝트만 쳐다보는 것이 원자론의 관점이다. 


    많은 사람이 본질을 부정하려고 실존이니 구성이니 도구니 한 것은 직관적으로 막다른 곳에 있는 객체는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봤자 도달하는 본질은 결국 죽음이다. 원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원자는 오브젝트고 서브젝트가 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원자론은 논리적으로 불성립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쪼갤 수 없다고? 누가 그것을 쪼개는데? 인간이? 주체가 사건에 개입한다. 오브젝트라는 원자는 서브젝트라는 저울에 올려져 있다.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항상 숨은 전제가 있다. 


    가정이 있다. 대화는 두 사람이 한 편이라는 가정하에 일어난다. 한 편이 아니고 적이면? 적이 아군을 잘 죽이면? 훈장을 받는다. 선행을 한 셈이다. 선악의 논리, 정의의 논리는 모두 우리가 한 편이라는 가정을 하는 것인데 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씨가 먹히지 않는다.


    푸틴에게 평판공격을 가해봤자 쇠귀에 경 읽기다. 우리가 주술적 사유를 넘어 과학적 사유에 이르려면 그런 숨은 구조를 낱낱이 들추어야 한다. 구조론은 주어와 목적어 둘의 대칭을 동사 하나로 보는 것이다. 사실은 하나다. 주체와 대상은 둘이지만 사건 1로 환원된다.


    주어와 목적어는 동사 1로 환원된다. 서브젝트와 오브젝트는 사건 1로 환원된다. 그럴 때 방향성이 드러난다. 화살의 머리와 꼬리 2는 몸통 1로 환원된다. 기관차와 객차 2가 아니라 기차 1이다. 우리 편과 상대편 둘이 축구시합 하나로 환원될 때 주최측의 관점을 얻는다.


    구조로 보면 마이너스가 있을 뿐 플러스는 없다. 플러스는 마이너스를 설명하기 위한 전제다. 사건은 방향성이 있고 방향성은 화살표로 나타낼 수 있으며 화살표는 머리가 마이너스, 꼬리가 플러스다. 실제로는 우주 안에 마이너스가 있을 뿐이고 플러스는 마이너스의 전제다. 


    플러스는 설명이 필요 없다. 플러스는 닫힌계 밖에서 일어나므로 나의 통제권 밖이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을 계산하면 이중계산이다. 나가는 돈만 계산하면 된다. 자연에는 저축이 없다. 자연은 언제나 지출만 계산할 뿐 수익은 전혀 계산하지도 않는다. 


    나의 수익은 타인이 결정한다. 월급은 사장이 결정하고 용돈은 아빠가 결정한다. 그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에너지의 수렴이 있을 뿐 확산은 없다. 확산은 수렴의 전제다. 수요와 공급, 능동과 수동, 주는 쪽과 받는 쪽을 합쳐서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도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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