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지금 존재하여 있는 무언가를 혐오하고, 배척하고, 부정하고, 회의하고, 의심하고, 반대하고, 저항하는 단절의 문명에서 널리 아우르는 연결의 문명으로 갈아타야 한다. 자연의 본 모습이 연결이므로 인간도 연결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는 근본적인 딜레마가 있다. 닫힌계 안에서는 단절만 가능하다는 모순이다. 우물에 빠진 개와 같다. 누군가 찾아와서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단절은 내부에서 자기 힘으로 가능하나 연결은 반드시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만 가능하다. 누가 밖에서 잠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누구 한 사람은 포위된 성을 탈출하여 외부에서 지원군을 불러와야 한다. 그것은 특별한 것이며 훈련된 사람만 할 수 있다. 그것은 집단의 리더만 할 수 있고, 함선의 선장만 할 수 있고, 핸들을 쥔 운전사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외부의 새로운 자원과 연결할 수 있는 지성인이 되어야 한다. 선장은 배와 환경을 연결한다. 항구와 연결하고, 바다와 연결하고, 선원과 연결하고, 파도와 연결한다.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눈으로 사물을 연결하고, 귀로 소리를 연결하고, 코와 혀로 음식을 연결한다. 뇌가 혼자서 모두 결정해야 한다. 손발이 있지만 결정에 가담하지 않는다. 선원들이 돕지만 결정은 선장이 하고 손발이 돕지만 결정은 뇌가 한다. 무엇이든 첫 시작은 연결이다. 첫 출생, 첫 소풍, 첫 등교, 첫 출근, 첫 키스, 첫 인사는 어떤 연결의 형태로 일어난다. 그럴 때 철학이 필요하다. 그것은 혼자 할 수 없고 외부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첫 등교는 손을 잡고 함께 가줄 엄마가 필요하다. 소개팅이라도 주선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단절은 철학이 필요 없다. 그냥 단절하면 된다. 사과를 따듯이 뚝 따면 된다. 반면 연결은 중매를 서듯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수술 부위를 봉합하듯이 조심해서 진행해야 한다. 첫 연결지점에서 한 번 잘못되면 결이 틀어져서 이후로도 계속 잘못되기 때문에 인간에게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어떤 일에 착수하여 맨 처음 해야 하는 것은 연결이다. 이사를 가더라도 이웃집에 떡을 돌리고, 인터넷과 가스와 전기와 수도를 연결한다. 인간이 자연과 처음 대면했을 때 할 일은 연결이다. 그러나 인간은 나무에서 과일을 따듯이 무언가를 단절하는 데만 주의가 쏠려 있다. 봄의 파종은 연결이고 가을의 수확은 단절이다. 인간은 수확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것이 철학의 실패다. 진정한 철학은 무언가를 새로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부단히 더 큰 세계와의 연결에 나서야 한다. 자연에는 연결과 단절이 있을 뿐이다. 연결에 필요한 자원은 단절로 조달된다. 하나를 새로 연결하려면 그 재료는 기존에 연결되어 있는 것을 부수는 방법으로 획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연결과 단절은 50 대 50의 균형을 따라간다. 그러나 사건의 닫힌계를 지정하면 49 대 51로 단절이 연결보다 크다는게 엔트로피의 법칙이다. 자연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는 항상 단절로 간다. 변화에는 비용손실이 일어나고 의사결정비용을 단절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탄생은, 생물의 진화는, 문명의 진보는 거대한 연결에 의해 작동한다. 빅뱅에 의한 우주의 탄생이 거대한 연결이기 때문이다. 뭐든 처음 시작되는 것은 모두 연결이다. 사건은 연결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탄생은 서로 다른 두 세계의 연결에 의해 성립된다. 단절이 연결보다 크다는게 모든 변화의 아킬레스건이 되지만 동시에 두 세계를 연결하는 플러스알파가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키는 혁명의 동력원이 된다. 엔트로피에 의해 사건은 보수 51 대 진보 49가 된다. 원래 모든 게임은 보수가 우세하다. 바둑을 두어도 세력바둑보다 실리바둑이 우세하다. 여기서 거대한 역설이 일어난다. 진보가 49로 막혀있을 때 부족한 2퍼센트를 가져온 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에게 절대권력이 주어진다. 그 연결의 한순간에 2퍼센트가 전체를 지배한다. 천칭저울이 수평을 이룰 때 내려앉은 작은 깃털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1) 모든 변화는 연결과 단절 사이에서 대칭을 따른다. 2) 의사결정비용의 제한 때문에 닫힌계 안에서 51 대 49로 단절이 우세하다. 3) 가만 놔두면 무조건 보수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는게 인류문명의 아킬레스건이다. 4) 두 세계가 연결될 때 부족한 2퍼센트를 채운 자가 권력을 쥐는 현상이 변혁의 전망이 된다. 5) 소수에 대한 권력의 집중은 사건의 초기단계에만 적용된다. 자연의 대칭원리는 진보를 가로막는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대한 반전을 일으키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작은 힘으로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면 멋진 것이다. 그 힘은 반드시 외부에서 와야 한다. 외부는 공간의 외부이기도 하고 시간의 미래이기도 하고 혁신에 따른 기존의 시스템에 없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등장이기도 하다. 지금 없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바꾼다. 기존에 있는 것을 쥐어짜는 방법은 변혁의 대안의 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부패니 착취니 하면서 기존에 있는 것에서 어떻게 수를 내보려고 한다. 현실 사회주의가 실패하는 이유다. 생산력에서 밀린 것이다. 기술의 부족 때문이다. 경쟁이 없으면 대칭이 없고 대칭이 없으면 상호작용이 없고 상호작용이 없으면 혁신은 없다. 혁신은 항상 외부에서 오기 때문이다. 상호작용은 현재 없는 것이다. 배구를 하든 테니스를 하든 탁구를 하든 랠리가 이어지는 것은 지금 판도에 없는 것이 새로 발생한 것이다. 부족한 2퍼센트를 채우는 플러스알파는 그런 식으로 무에서 탄생해야 한다. 그것은 자연에서 관성력, 가속도, 기세의 형태로 존재하며 인간 사회에서는 혁신, 발명, 발견, 이동, 권력의 형태로 존재한다. 만유는 연결이다. 그냥 연결이 아니라 팽팽한 균형상태에서 49를 51로 바꾸는 혁명적 연결이라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외부에서 주어진다. 첫 인사, 첫 만남, 첫 발견, 첫 키스의 순간에 인간이 전율하는 이유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연결할 때 강력한 에너지의 저항이 걸리며 그 저항을 뚫고 전진할 때 인간은 전율한다. 첫 시동이 걸리는 순간 엔진은 굉음을 토해낸다. 고통과 환희가 그 가운데 있다. 세상은 연결과 단절의 균형이며,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는 단절이 더 크고, 새로운 사건의 연결에서는 49를 51로 바꾸는 2퍼센트가 권력을 쥐고 강한 힘을 발휘하며 우리가 추구하는 의미는 바로 그곳에 있다. 무작정 용을 쓴다고 일이 진척되는게 아니고 일단은 균형을 추구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렸다가 단번에 49를 51로 바꾸어야 한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다. 이때 연결을 달성한 2퍼센트가 가지는 플러스알파의 힘이 중요하다. 그것은 기세다. 파죽지세로 밀어붙인다. 그것은 스포츠 경기에서 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관성력이다. 그것은 숨은 힘이다. 기업에서는 이윤이고 사회에서는 권력이다. 그것은 현재 없는 것이며 무에서 발생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러한 연결의 힘에 주목한 철학자는 일찍이 없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이든 사원소설이든 그것은 입자이며 입자는 쪼개지지 않는 것이고 쪼갠다는 개념이 이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원소설은 물이 말라서 공기가 되고, 공기가 말라서 에테르가 되고, 반대로 굳으면 진흙이 된다는 생각이다. 결국 물로 환원된다. 원자든 원소든 그것은 단절의 아이디어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전부 잘못된다. 인류의 철학사는 단절의 철학사다. 연결은? 상호작용이다. 구조론은 자연의 모든 변화가 짝수로 일어난다는 견해다. 어떤 하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성질을 가질 수 없다. 하나는 다른 것에 빌붙어 있을 뿐 독립적인 존재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의 연결이 사건을 일으킨다. 유황과 적린이 만나 성냥불을 켜듯이, 암수가 만나 생명을 잉태하듯이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둘의 연결로 일어난다. 일찍이 긍정의 철학, 승자의 철학, 강자의 철학, 연결의 철학, 의미의 철학, 상호작용의 철학, 플러스알파의 철학은 없었다. 자연의 기세에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기세는 시너지 효과다. 그것은 연결되어 있음의 힘이다. 같은 둘이라도 연결된 둘인가 단절된 둘이냐에 따라 다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부분의 합은 부품이 단절되어 있고 전체는 연결되어 있다. 피가 흐르고 있다. 맥이 뛰고 있다. 호흡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류의 모든 사상이 무엇을 하지마라는 금기다. 부족민의 터부와 같다. 노자의 무위사상은 원시인의 터부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생태주의니 유기농이니 신토불이니 하는 것도 맥락이 같다. 성찰이니 진정성이니 정치적 올바름이니 하면서 끝없이 새로운 터부를 만들어낸다. 자유를 제한하고 인간을 옭아맨다. 해야 한다. 무엇을 하자는 제안을 내놓아야 한다. 사슬을 끊고 해방을 노래해야 한다. 우리가 안 하면 윤석열이 하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전을 하지 않으니 러시아가 가스를 잠근다. 비극이다. 서구에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니 문화상대주의니 하는 것이나 미국식 신자유주의라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금기와 터부를 양산하고 있다. 사람이 광장에 모여 있으면 불안하다. 광장에 모이지 마라고 잔소리 하는게 탈근대 사상이다. 부족민은 건드리지 마라고 경고하는게 문화상대주의다. 규제하지 마라, 세금 올리지 마라 하는 신자유주의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게 이성의 분별이 아니라 동물의 본능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원래 터부를 만든다. 고양이는 박스를 좋아한다. 소는 커다란 벽을 좋아한다. 소떼 사이에 서 있으면 주변이 벽처럼 보여서 안심하는 것이다. 히키코모리는 방을 좋아한다. 자신을 좁은 공간에 가두면 예민해진다.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럴 때 자기 내부로부터 반응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좁은 곳에 가두는 방법으로 옥죄어서 자신을 자극하고 되돌아오는 반응을 기다린다. 심하면 자신을 공격하는 퇴행행동을 하게 된다. 자신을 쥐어짜는 행동이다. 외부를 연결하지 못하므로 내부를 쥐어짜서 외부를 연결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내려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여행을 하면 즐겁다.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것을 보고 들으면 흥분된다. 문제는 비용이 든다는 점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같은 효과를 얻는 방법은 자기 자신을 쥐어짜는 것이다. 가장 흔한게 결벽증에 걸리는 것이다. 부자가 결벽증에 걸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면 자기 내부에서 강한 반응이 오기 때문이다. 무당이 느낀다는 영적 체험과 비슷하다. 영빨이 돋는다. 연예인 40명이 공황장애에 걸려버린 이유다. 외부가 두려워 내부에 주목하면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이고 맛이 가기 시작한다. 중딩시절 필자는 시험문제를 풀지 않고 딴짓을 하다가 마지막 5분을 남겨놓고 문제를 마저 풀곤 했다. 그럴 때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저릿한 느낌을 얻는다. 그 느낌은 오르가즘과 유사하다. 심장이 쫄깃하게 된다. 자신을 쥐어짜면 쾌감을 느낀다. 많은 학생들이 벼락치기 공부에 중독되는 이유다. 많은 작가들이 원고의 마감에 쫓기는 이유다. 그만한 쾌감이 있다. 피가 바짝 마를 때의 느낌이 있다. 자기를 사정없이 몰아붙일 때 인간은 특별한 느낌을 얻는다. 개는 좁은 개굴에 대형견이 일곱 마리나 들어가 있다. 작은 구멍에서 덩치 큰 개들이 끝도 없이 기어나오는 동영상이 있다. 인간은 좁은 예배당에 빼곡히 들어앉아 동료의 방귀를 먹는다. 사실은 호르몬을 먹는 것이다. 인간은 동료의 땀냄새를 맡을 때 편안해진다. 축제든 클럽이든 스포츠 활동이든 마찬가지다. 좁은 공간에 모여서 스킨십을 하려는 본능적 행동이다. 무의식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게 동물의 본능이라는 거다. 그런 조이기 심리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마녀사냥을 하게 된다. 예배당은 작은 건물로 사람을 조이지만 마녀사냥은 심리의 억압으로 사람을 조인다. 본질은 같다. 동료를 빨갱이로 몰아 의심할 때 느끼는 특별한 쾌감이 있다. 선생님을 간첩으로 몰아 신고할 때 느끼는 오르가즘이 있다. 인간들의 각종 개소리는 동물의 본능이자 무의식의 명령이다. 비극은 철학자도 동물적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물리적으로 조이기 원하며 심리적으로도 조이기 원한다. 서로를 해치고 비난하고 헐뜯고 야유하고 조롱하고 차별하고 혐오할 때 특별한 느낌이 있다. 꼬맹이는 머리카락으로 이마를 가리고 가면을 쓰거나 복면을 쓰고 좁은 다락방에 들어가서 끼어 있으려고 한다. 청소년은 패딩점퍼나 후드티를 입는다. 바바리코트의 칼라를 세워 목을 감춘다. 고양이의 박스와 정확히 같다. 자신을 감추려는 동물적 행동이다. 물리적으로 간격을 좁히고 심리적으로 서로를 찌른다. 그러다가 망한다. 환경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하는 무의식의 명령을 잘못 해석하여 퇴행에 이르는 것이다. 동물의 본능을 극복하고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군자의 도리다. 공자의 극기복례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지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안 하면 윤석열이 한다. 민주당이 안 하면 국힘당이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외부를 연결해야 한다. 판도 안에 없는 플러스알파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자신을 좁은 구석에 몰아넣고 쥐어짜서 오르가즘을 느끼려는 닫힌 세계관을 버리고 동굴 밖으로 나와 널리 외부와 연결하는 열린 세계관으로 갈아타야 한다. 요즘 유행하는 생태주의는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아이디어다. 월든의 소로도 그런 부류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 사람 특유의 괴상한 생각에 인류가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그게 자신을 쥐어짜서 오르가즘을 느끼려는 퇴행행동이다. 유나바머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오두막이 3평 밖에 안 되는 이유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는 2등까지 갈 수 있을 뿐 우승은 할 수 없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답은 생산력의 혁신이다. 인류를 구하는 것은 수소경제와 핵융합이다. 요즘은 다들 인터넷 덕에 산다. 인터넷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다. 부단히 새로운 것이 등장해야 인류는 활력을 얻는다. 정체되면 죽는다. 인간은 전진하거나 후퇴하거나 뿐이며 제 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다. 어떤 이상사회에 도달한 다음 거기에 머무른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새로운 것이 없으면 인간은 지루함을 느낀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인간은 가다가 길이 막히면 그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동료를 죽인다. 두 명이 사는 무인도에서 소득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은 한 명을 죽이는 것이다. 동료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 외부로부터의 위험은 계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태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말이다. 환경보호 한다며 나무를 심는 것도 수종을 획일화 하여 좋지 않으니 산불이 나더라도 저절로 나무가 자라도록 놔두라는 거다. 때로는 그것도 방법이 되겠지만 근본적인 방향성이 중요하다. 지구에 처음 생명이 출현했을 때 저질러진 것이다. 엎어진 물이다. 커다란 기울기의 경사로가 만들어졌고 인류는 문명이라는 이름의 그 경사로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진화하는 방법으로만 생태는 유지될 수 있다. 그게 본래의 모습이다. 균형과 조화가 아니라 진화다. 완벽한 균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51 대 49의 기울기로 가속도를 연출해야 한다. 팽이는 돌아야 팽이가 되고 자전거는 밟아야 자전거가 되고 수영은 헤엄쳐야 수영이 된다. 호흡과 맥박을 멈출 수 없다. 균형은 균형이 아니다. 균형 위에 더 큰 단위의 균형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균형은 하나의 균형을 발판으로 삼아 더 높은 단위의 균형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를 모두 연결시키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숨어서 균형에 도달하기 쉽다. 그게 사실은 퇴행이다. 무언가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인류는 구원될 수 없고 무언가를 하는 방법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며 하는 과정에 시행착오는 어쩔 수 없다.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 말고 미래를 향해 전진해야 한다. 자연은 더 많은 연결로 랠리를 이어가며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일방향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구조론은 의미주의, 긍정주의, 연결주의, 행동주의, 낙관주의다. 허무주의, 부정주의, 고립주의, 무위주의, 비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있지만 하는게 먼저다. 엑셀레이터 페달을 먼저 밟고 브레이크는 나중 밟는다. 하다 보면 잘못되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더 큰 행위를 불러내는 점에서 도움이 된다. 옳은 행위는 당장 이득이 되고 잘못된 행위는 상부구조를 호출하므로 길게 보면 어느 쪽이든 이득이 된다. 생각과 언어는 변명에 쓰이는 것이며 답은 언제나 행동이 낸다.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따르고 자연의 숨은 균형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해답이다. 그 균형은 동적 균형이다. 호흡하는 균형, 맥박이 뛰는 균형, 회오리가 도는 균형이다. 소립자도 돌고,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돌고, 우주도 돌고 모든 것이 움직이다. 부단한 연결과 상호작용을 통해 랠리를 이어가며 자연의 숨은 균형을 끌어내는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회오리가 돌면서 상승하듯이 움직이는 균형을 찾아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