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1순위 이 친구도 한마디 하고 나설 때가 되었는데..』 |
전문가의 밥그릇은 데이터이다. 데이터를 신뢰할 수 있는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가는데 데이터가 무슨 소용이 있나? 어느 분야이든 처음 시작하는 일에서는 데이터를 버려야 한다. 편견을 버리고, 고정관념을 버리고, 머리를 비우고 가슴으로 봐야 보일락말락 한다. 무엇인가?
예컨대 이런 거다.
남자 100명과 여자 100명이 마라톤으로 성대결을 벌이면 단연코 남자가 우세하다. 그러나 남자 최고기록과 여자 최고기록은 의외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자마라톤 세계기록 2시간 15분 대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김완기선수가 세운 한국신기록이었다.
평균 대 평균으로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최고 대 최고로 비교하면 의외로 그 차이는 미미하다. 메이저리그 평균 대 한국 프로야구 평균으로 비교하면 명백히 수준차이가 나지만, 메이저리그 최고 대 한국프로야구 최고로 비교하면 의외로 그 차이는 적다. 왜?
또한 이유가 있다. 어느 분야이든 최고는 체력 만으로 안되고, 특별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예컨대 머리는 나쁜데 운동만 잘해서는 좋은 선수는 될 수 있어도 최고가 될 수는 없다. 농구만 해도 허재나 서장훈은 천재다. 선동렬은 머리도 좋고 박찬호는 영어도 잘한다.
사회의 어느 분야라도 그러하다. 그 분야의 최고가 되려면 남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운동만 잘해서는 고작 3등이나 4등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승엽의 남다른 뭔가는 무엇일까? 보도에 의하면 ‘눈’이다. 이승엽선수는 시력이 좋다. 그냥 시력이 아니고 운동시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움직이는 물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능력이 특 A급이라고 한다.
숨은 플러스 알파가 결정한다
전문가들은 데이터를 본다. 데이터로
보면 비관적이다. 2할 8푼에 20홈런 쯤 쳐서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도 이치로 만큼은 해야 성공이 된다. 과연 이승엽은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선동렬은 일본에서 성공했다. 이종범은 실패했다. 두 선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력은 아니다. 이종범이 실력이 뒤져서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플러스 알파이다. 이종범에게는 그 플러스 알파가 없었고 선동렬에게는 있었다. 무엇인가? ‘환경적응력’이다.
이승엽은 원래 투수였다. 타자로 전향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것은 놀라운 적응력이다. 그는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자신을 개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이승엽이 처음부터 홈런타자는 아니었다. 어느날 갑자기 무더기로 홈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슬럼프도 있었다. 그때마다 스스로 진단하고 스스로 처방하여 해결했다.
노모 히데오의 부침도 그런 면에서 주목해볼만 하다. 그는 여러번 좌절했지만 그때마다 재기하는데 성공했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뭔가가 있다. 박찬호는 그 반대이다. 그는 처음부터 실력으로 압도했다. 실력이 그가 가진 밑천의 전부이고 그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다.
정리하자. 어느 분야에나 최고는 있다. 그리고 그 최고에게는 실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데이터만으로는 입증이 되지 않는, 숨은 플러스 알파가 있다. 전문가들로 하여금 항상 오판하게 하는 뭔가가 있다. 그것이 곧 ‘환경적응력’이다.
왜 한국이 중국을 이기는가?
바둑은 두뇌 스포츠다. 걍~ 머리 좋은
사람이 이긴다. 단연코 대가리 숫자에서 압도하는 중국이 항상 승리해야 한다. 12억
인구에서 천재가 나올 확률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중국은 한국을 이기지
못하는 것일까?
다원주의 관점에서 보자. 중국을 한국처럼 인구 4000만 당 하나씩 30개 국가로 쪼갠다고 치자. 그 30개 국가가 국제바둑대회를 벌인다면 30개의 중국들 중의 하나가 항상 한국을 앞서게 되어 있다. 또한 구조를 봐야 한다. 시스템에서 ‘최적화’가 되어있는가이다.
다원주의와 획일주의가 싸우면 항상 다원주의가 이긴다. 중국에는 한국의 30배나 되는 많은 천재가 있지만 대신 경쟁률도 30배나 세어진다. 즉 중국의 어린 싹들은 더 일찍 꺾어진다. 더 많은 중국의 영재들이 기회를 박탈당하고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다.
왜 서울대가 고전하는가?
벤처기업 하면 학력을 따지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요즘은 벤처가 서울대를 더 선호한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사실이다. 왜?
실제로 일을 시켜보면 서울대가 더 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처의 창업자는 서울대가
아닌 경우가 많다. 무엇인가?
요즘 뜨는 분야 중 하나가 영화계다. 영화업계에서 성공한 서울대 출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왜 서울대 출신은 감독이고, 촬영이고, 시나리오고 간에 영화를 못하는가?
간단하다. 한 인간이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소에 투입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서울대출신은 그 자원을 한군데로 몰아서 사용한다. 그들은 승리하는 방법을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찍 두각을 나타내고 더 훌륭하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곤 한다.
이때 지방대 출신의 살아남기 전략은?
룰을 바꾸는 거 뿐이다. 정해진 룰 안에서 지방대가 서울대를 이길 방법은 없다. 특정한 게임의 룰을 고정시켜 놓고 목표달성을 요구하면 항상 서울대가 이긴다. 명백히 수준차이가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장르는 원래 정해진 규칙이 없다. 도리어 그 규칙을 파괴해야지만 답이 나오는 것이 영화다.
벤처도 마찬가지다. 규칙대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공한 창업자 그룹에는 서울대가 많지 않다. 그러나 창업에서 수성 단계로 넘어가면 확실히 서울대가 두각을 나타낸다.
무엇인가? 한 인간의 에너지 자원은 총량에서 한정되어 있다. 서울대 출신은 유능하므로 그 자원의 7할을 주어진 임무를 달성하는데 사용한다. 그것은 ‘경쟁’이다. 반면 비서울대는 서울대와 경쟁해서 이길 수 없으므로 그 에너지 자원의 7할을 기존의 루트가 아닌 새로운 루트를 뚫는데 사용한다.
요는 ‘집중력’이다. 재능이라는 자원을 한곳으로 몰아서 사용할 수 있는가이다. 또 재능을 몰아서 사용하기로 한다면 어디에다 몰아줄 것인가이다. 동료를 제치는 ‘경쟁’에 재능을 몰아쓰면 서울대이고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창의’에 재능을 몰아쓰면 비서울대이다.
중국은 터무니없이 경쟁률이 높다. 꿈많은 중국의 소년은 항상 12억과 경쟁해야 한다. 북경의 청화대에는 천재 중에서도 천재들만 모인다. 중국의 소년들은 그 인간이 가진 재능의 100을 애초부터 너무 일찍 경쟁에 소모해버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환경적응력’이 떨어진다.
어린이들을 조기에 경쟁에 노출시킨다는 것은 어린 싹을 길바닥에 팽개쳐서 짓밟아버리는 것과 같다. 즉 중국의 소년들은 너무 일찍 경쟁에 노출되어 짓밟히고 있다. 이것이 경쟁의 폐해이다.
한국도 경쟁이 지나치지만 중국보다는 덜하다. 모험을 해볼 여유가 있다. 더 싱싱한 싹이다. 그래서 한국의 바둑이 강하다. 또한 다원주의의 힘이다. 유럽이 아세아보다 더 빨리 근대화를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나의 유럽대륙에 나라가 여럿으로 쪼개져 있으니 인재들이 조로하지 않고 싱싱 자라날 확률이 높다.
전문가들은 데이터를 본다. 게임이 항상 정해진 규칙대로만 진행된다면 전문가의 데이터가 잘 들어맞겠지만 환경이 변하면 데이터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선동렬이나 이승엽 같은 최고의 경우, 환경적응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변신하는데 성공하곤 한다. 그들은 기존의 루트가 아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데 성공하곤 한다.
이승엽은 과연 성공할 것인가? 물론 가봐야 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환경의 변화에 잘 적응해 왔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그가 가진 재능의 전부를 목도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노무현에 주목해야 하는가?
백범이 감옥에 있을 때의 일이다. 김진사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활빈당 도둑떼의 두목과 사교한 일이 있다. 백범은 도둑에게서도
배운 것이다. 도둑놈 따위에 무슨 대단한 ‘도(道)’가
있다고 도둑의 두목에게 고개숙여 배우는가?
도둑의 평균과 양반의 평균을 비교하면 물론 현격한 차이가 있다. 양반이 도둑보다 낫다. 지방대 평균과 서울대 평균처럼 그 격차는 크다. 그러나 도둑의 두목은 의외로 양반의 우두머리와 차이가 없다. 장길산도, 홍길동도, 수호지의 흑송강도 천재라면 천재다.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말안듣기로 유명한 도둑놈들을 수족부리듯 할 수 없다. 말 안듣는 1천명의 도둑놈들을 지휘하기는 말 잘듣는 10만명의 병사를 지휘하기보다 어려울 수 있다.
백범이 삼남도둑의 괴수 김진사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일까? 밑바닥의 삶에서 환경은 끝없이 변한다. 도둑의 두목이 엘리트보다 나은 것은 딱 하나 뿐이다. 엘리트는 절대로 배울 수 없는 것, 그것은 ‘환경적응력’이다.
엘리트들의 리더와 서민의 리더는 근본적으로 접근법에서 차이가 있다. 나는 노무현이 서민을 다스리는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믿는다. 일방적으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니맘대로 가봐라’고 해놓고 잘못가면 그 시행착오의 교훈으로 깨우쳐주는 방식이다.
엘리트지도자는 옳은 길을 발견하면 일단 그 길을 간다. 왜? 그 길이 옳기 때문이다. 서민의 지도자는 일단 옳지 않은 길부터 일일이 타진해보고 간다. 그 길이 옳지 않음을 먼저 증명해 보이고 난 다음, 퇴로를 봉쇄하고 최후에 그 옳은 길을 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뒤통수가 가려워서 가다가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가 오다가 지나쳐온 그 길이 더 지름길이 아닐까?”
이런 삿된 생각을 완전히 머리에서 지워버리지 않으면, 가속도라는 ‘플러스 알파’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무현은 더디가도 돌아가는 것이다. 최근 파병문제에 관한 노무현의 접근법도 비슷하다. 파병 안하기로 내심 결정해놓고 파병할 경우의 득실부터 타진해보는 것이다.(물론 이는 필자의 추정에 불과하지만)
환경적응력이다. 특히 어떤 새로운 일을 처음 시작할 때는 반드시 그리해야만 한다. 가야할 길 보다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먼저 발을 들여놓아 보는 것이다. 가지말아야 할 길에 일일이 X표를 붙여놓고 최후에는 가야할 길 하나에 힘을 몰아서 쓰는 것이다.
승부는 ‘집중력’에서 난다. 하나의 정답에 올인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세개의 오답부터 먼저 검토하고 거기에다 확실한 X표를 해두어야 한다. 노무현의 신당추진과정도 이와 같다. 가야할 길 곧 한나라당을 치는 길을 곧장 달려가기 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길, 곧 지역주의와 손잡기, 구주류와 동업하기를 먼저 봉쇄하여 거기다 일일이 확실한 X표를 해두는 것이다.
왜?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가속도라는 플러스 알파를 획득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약해져서 ‘차라리 구주류와 동업할 걸 그랬나’, ‘JP라도 한번 만나볼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뒤통수가 가려워진다. 그래서는 막상 승부처가 왔을 때 ‘올인’할 수 없다.
이야기가 산만해졌으므로 정리하면
●
한 분야의 최고가 되려면 실력 말고도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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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알파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창의력, 혹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환경적응력이다.
● 정치에서
환경적응력은 밑바닥 삶의 체험에서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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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가지 말아야 할 길부터 일일이 검토하여 확실한 X표를 해두고 가야할 길 하나만
남긴 다음 '올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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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가속도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