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변화다. 내부에 감추어진 변화와 겉으로 드러난 변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변을 좋아한다. 불변은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원자론의 원자 개념은 존재가 궁극적으로 불변이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게 틀렸다는게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변화 그 자체를 정면으로 직시하자는 제안이다. 물이 흐른다면 물을 탓할게 아니라 그 흐름을 탓해야 한다. 물은 불변이고 흐름은 변화다. 사람들은 불변을 탓하기 좋아한다. 불변은 제자리에 있으므로 탓하기 좋다. 흐름은 저만치 흘러가 버려서 탓하기 힘들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병을 탓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 탓한다. 사람은 탓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다. 변화는 주체와 대상, 공간과 시간, 원인과 결과가 있으므로 다루기가 버겁다. 설명하기 힘들다. 변화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이 인류문명의 맹점이다. 이 시대에 인류문명이 한계에 봉착한 것은 변화를 판도라의 상자에 가둬놓고 모른 척하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자동차는 발달되었는데 운전 기술은 서투르다. 모든 위기의 뿌리가 그것이다. 여전히 종교를 믿고 괴력난신에 의지하는 봉건시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변화는 둘 사이에서 일어난다. 그사이를 포착하기 어렵다. 그것을 나타내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므로 생각할 수도 없다. 어떤 사이냐? 남자 사람 친구? 뭔 소리야? 오죽하면 이런 해괴한 말이 나왔겠냐고. 사이는 자동차의 기어와 같다. 엔진의 변화가 바퀴에 반영된다. 엔진과 바퀴 둘을 기어 하나가 감당한다. 변화는 거기서 일어난다. 모든 의미 있는 것은 어떤 둘의 사이에서 일어난다. 보통은 물질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둘러댄다.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짠 것은 속성이다. 혀와 설탕, 혀와 소금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니 성질이니 하며 얼버무리지 말고 그사이를 파헤쳐야 한다. 산과 강 사이에는 자연이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회가 있다. 인간의 신체 장기들은 모두 사이다. 코와 입과 장기와 항문은 긴 파이프다. 인체는 온갖 파이프들의 집합이다. 길은 집과 집 사이에 있다. 인터넷은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다. 길은 집과 집 사이다. 도시는 길에서 만들어진다. 여기에 우리가 찾아야 할 소실점이 있다. 소실점은 자기 눈이다. 내 눈이 한 점이기 때문에 이에 대칭되어 맞은 편에도 한 점이 있다. 모든 연결은 하나의 점에서 일어난다는 점이 각별하다. 하나가 있다면 그 뒤에 하나를 더 갖다 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맨 처음 하나를 어디에 둘 것이냐? 영화 ‘빅토리아 & 압둘’에서 영국 여왕이 맨 손으로 고기를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박근혜는 나이프 포크 없으면 햄버거를 못 먹는다. 전용변기 없으면 화장실도 못 간다. 사이의 문제다. 사이가 잘못 세팅되면 해결되지 않는다. 사이는 친구도 되고 원수도 된다. 상생도 되고 상극도 된다. 뭐든 소실점이 있다. 문명의 소실점은 생산력이다. 생산력의 변화가 문명이라는 자동차 속도를 결정하는 기어다. 좌파의 혁명도 우파의 애국도 부산물이다. 자동차는 기어로 조절하고 문명은 생산력으로 조절한다. 사이 개념이 없기 때문에 좌파니 우파니 하며 삽질하는 것이다. 좌파는 엔진만 돌리면 차가 간다고 우기고 우파는 바퀴만 구르면 차가 간다고 우기는데 사실은 기어가 없어서 얕은 오르막인데도 시동이 꺼지는 것이다. it와 at은 턱으로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It는 턱을 밀어 가리키고 at은 턱을 당겨 자신에게로 가져온다. This는 혀를 집어넣어 먼 것을 가리킨다. That과 what는 This+at, why+at이다. 우리말도 같다. 이것, 저것, 그것은 it의 거리를 나타낸다. 목구멍으로 갈수록 거리가 멀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인간과 대칭시킨다. 대상을 관측자의 맞은편에 두는 것이다. 관측자와 쪼개진다. 관측자가 움직이거나 대상이 움직이면 다르게 보인다. 변화가 없다면 문제가 없다. 변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관측자와의 관계다. 변화 자체가 불변이다.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의 조건이다. 세상은 변화이며 변화는 연결이며 연결은 한 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또다른 연결을 잉태한다. 공자는 세상으로 쳐들어가라고 했고, 노자는 비겁하게 도망치라고 했고, 예수는 약속을 내세워 멀리 미래를 가리켰다. 유대인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 했고, 석가는 더 높은 세계로 올라서라고 했다. 어디로 가든 차가 있어야 한다. 시동을 켰으면 기어를 넣어야 한다. 변화는 원래부터 있었다. 그것이 에너지다. 에너지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사건이고 안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물질이다. 감추어진 에너지가 밖으로 드러나는 조건은 정해져 있으므로 우리는 맞게 대응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