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분류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분류야말로 모든 사유의 어머니다. 구조론도 분류로 시작한 것이다. 린네가 생물을 분류한 것을 보고 나는 무생물을 분류하기로 했다. 보편적인 분류이론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분류의 기준은 무엇인가? 관찰하여 비슷한 것을 류와 종으로 나는게 보통이다. 종은 족보를 따르고 류는 서식지를 따른다. 같은 부모에게서 난 것은 종으로 묶고 같은 물에서 노는 것은 류로 묶는다. 물고기와 고래가 같은 부류로 되고 새와 나비가 같은 부류가 되는 실패를 저지르기 십상이다. 뭔가 아니잖아. 허탈하잖아. 허공에 떴잖아. 단단하게 바닥에 착지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잖아. 흐르는 물에 떠밀려 가잖아. 확실한 것을 찾아야 한다. 물질이 저절로 모이고 흩어지는 법칙이 있을 것이며 그 자연법칙에 따라 분류를 해야 한다. 반복되는 것을 배제해야 한다. 활과 화살의 관계다. 성경의 족보처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를 낳고 하는건 답이 아니다. 주워섬기기 힘들잖아. 활이 화살을 낳지만 화살은 자라서 다시 활로 되지 않는다. 비가역성이야말로 모든 분류의 궁극적인 근거이다. 존재가 무에서 처음 탄생하는 경로를 따라 분류한 것이 구조론이다. 분류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출발이다. 그런데 없다. 도서관학과에서 분류학을 하는데 대충 분류한다. 이론은 없다. 서점은 신간 위주로 그냥 책을 깔아놓는다. 분류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 시계가 멈추었다. 정면으로 학문은 분류다 하고 말해준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학문의 출발점을 찍은 것이다. 공자가 6예를 분류했지만 설명을 안 해놔서 의미가 퇴색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야말로 모든 학문의 코어다. 학문이 지식의 체계라면 체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체는 내부의 뼈고 계는 외부 연결이다. 체가 척추라면 계는 팔다리다. 비로소 가지를 쳐나갈 수 있다. 퍼즐의 첫 한 줄을 맞춘 것이다. 학문의 첫 단추가 꿰어졌다. 이후 철학은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플롯이나 카타르시스나 이런 용어설명만 하고 나자빠져 있을 뿐 그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본질에 대해서는 논하는 사람이 없다.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녕 무엇을 보았는가? 그 부분에 주목하는 사람도 없다. 플라톤은 이상을 봤다. 그 이상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이상이 땅에 있어야 한다. 공자가 중용을 말했고 석가는 중도를 말했지만 그 중이 뭔지 말하지 않았다. 주역이 변화를 말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 뜬금없다. 뭔가 중심을 잡고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구. 뭔 개소리야? 입이 있는데 왜 말을 똑바로 못하나? 중심은 천칭의 코어다. 변화는 연결이며 코어에서 대칭을 벌이는게 역이다. 생뚱맞기 없기다. 뜬금없기 없기다.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대칭이 변화이고 역이며 대칭의 코어가 중이다. 그 코어가 뭐냐고? 3일치 나와주신다. 3일치는 시간과 장소와 행동의 일치다. 그걸 왜 일치하는데? 걍 해본 소리야. 일치 안 해도 돼. 셰익스피어 형님 나와주시고. 일치가 중요한게 아니고 이야기의 시작점을 어디에 찍을 것이냐다. 음악은 풍미가 있어야 하고 노래는 흥이 나야 하고 문학은 플롯이 있어야 한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것이며 임팩트가 인상이고 같은 것이다. 그것은 연결이다. 문학은 카타르시스로 연결되고 인상주의는 임팩트로 도장을 찍어준다. 내가 왜 그것을 보는가? 왜 그것을 듣는가? 왜 그것을 읽는가? 하나의 사건이 한 점에 모여야 한다. 산만해지면 안 된다, 확산되면 안되고 발산되면 안되고 수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을 본 것이다. 잘 설명을 못했지만 그의 시학은 설명하려는 시도다. 모든 변화하는 것은 반드시 모여야 한다. 양떼가 들판에 흩어져 있다가도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는 목자의 인솔 아래 모여야 한다. 주역이 변화를 말하고 공자가 중용을 말하고 석가도 중도를 말했지만 그게 변화에 앞서 대칭을 세우고 코어를 정해야 한다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라는 것은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의 모든 존재는 거기서 가지를 쳐나가는 것이다. 세상은 변해야 하고 변하려면 모여야 한다. 좌파와 우파는 흩어지려고 하므로 변화에 실패한다. 왜 소실점이 필요한가? 왜 이집트 벽화는 몸을 뒤틀고 있는가? 왜 고전회화는 죄다 몸을 뒤트는 병에 결려서 환자가 되었는가? 왜 김홍도는 오른손이 왼손이고 신윤복은 발각도가 180도인가? 왜 일본 그림은 괴상한가? 왜 중국 인물화는 등을 보이는가? 청명상하도는 걸작이지만 옴니버스다. 일종의 그림버전 천일야화다. 삼국지든 수호지든 손오공이든 여러 에피소드들의 무한 나열이다. 선 위에 열거할 뿐 입체로 도약하지 못한다. 캐릭터가 있어야 그것은 가능하다. 대칭구조가 있어야 한다. 춘향전이라도 암행어사 출두의 한 점으로 모인다. 반전영화는 극적인 반전의 한 점에 모인다. 고전회화의 인물들이 모두 몸을 뒤틀고 있는 이유는 공간을 그리되 시간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상주의는 시간을 그린다. 대칭을 시키면 이미 시간은 그려져 있다. 왜 뽕짝은 음악이 아니고, 김봉남은 패션이 아니고, 이발소그림은 그림이 아니고, 지하철 시는 시가 아니고, 윤석열은 인간이 아닌가? 퇴행이기 때문이다. 코어가 없으면 외부와 연결할 수 없다. 연결이 안되면 쪼그라든다. 문어 제 살 깎아 먹기 게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진보 아니면 퇴행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지 않았지만 말하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왜 중국의 경극은 노래와 춤으로 때우는가? 중심에 코어가 없으므로 깨진다. 억지로 붙이려고 하니 그나마 구멍을 메워주는 노래와 춤이 길어지는 것이다. 인도영화는 아직도 노래와 춤으로 때우고 있다. 각본이 부실해? 군무를 하면 돼. 밀당을 묘사하기 피곤하다구? 노래를 불러버려. 이미 주인공 남녀는 밀착해 있다. 춘향과 몽룡은 어떻게 사귀었지? 노래와 춤으로 때워. 이런 식이다. 편법과 꼼수를 받아들이면 발전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