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나 짐승이나 차이가 없다. 다만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점이 각별하다. 언어는 동물과 차별화하는 강력한 도구다. 동물도 부리와 발톱을 도구로 쓰지만 인간은 도구를 발전시켜 가는게 다르다. 동물은 진화하지만 인간은 진보한다. 도구의 발전을 통한 문명의 진보가 인간에게 주어진 미션이자 내가 사는 이유다. 도구는 어떤 둘을 연결한다. 도구가 없는 것이 1차원적인 존재라면, 도구를 획득하여 2차원적 존재가 되고, 도구를 발전시켜 가는 사람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 3차원적 존재로 올라서는 것이다. 차원이 상승하면 주변과 더 많이 맞물려서 사회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주변의 자원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주변 환경을 동원하는 정도가 사회적 신분이다. 인간과 짐승은 신분이 다르다. 신분이 높을수록 주변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행동할 때도 그러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을 상대할 때도 그러하다. 인간의 행동이 대개 심리적 신분을 높이려는 기동이다. 영향력을 가지려고 한다. 기병이 되려면 자기가 탈 말을 가져와야 한다. 칼을 챙겨야 요리사가 되고 차를 구해야 운전수가 된다. 요즘은 학벌과 직업과 자격증이 필요하다. 결혼도 신분을 높이는 도구다. 같은 도구를 쓰는 자와 대화하는 것이 신분이다. 외계인이라도 언어를 사용하면 신분이 같고 지구에 살아도 말 못 하는 짐승은 신분이 다르다. 인류에게 가장 멋진 도구는 생각이다. 나는 놀랍게도 인간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신 자극하고 반응하는 기술을 쓰는 것이었다. 자기 머리를 놀리면서 대신 다른 사람이 머리를 사용하도록 자극하여 돕는 것이었다. 서로 상부상조하고 있었다. 집적거리고 괴롭히며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걸리버여행기의 라퓨타 사람처럼 서로 머리를 때려주고 있으니 황당하다. 자발적 사유는 못 하고 투쟁 과정에 떠밀려서 억지 사유에는 간혹 성공한다. 다른 사람에게 추궁당하여 방어하느라 결과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수는 있어도 그냥 순수하게 머리를 쓰는 생각은 못하더라. 인간사회에 싸움이 그치지 않는 이유다. 능동적으로 자기 안에서 사유를 조직하지 못한다. 소실점이 안 맞아서 그림이 어색한 것을 눈으로 뻔히 보고도 소실점을 추적해 봤다는 사람이 동양사 5천 년에 한 명도 없었다. 어색함을 피하려고 여러 가지 물타기 기술을 구사하면서도 정작 뭐가 문제인지는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 부분을 추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추궁하려고 해도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줘야 겨우 받아들이는 식이다. 이현세 그림은 사람을 그려도 소실점이 엉망인데 본인은 데생을 꽤 잘한다고 믿는다. 일만 번을 연습하라고 후배들을 다그친다. 아무도 이현세의 엉터리 데생을 지적하지 않은 거다. 그게 그림이냐? 어휴. 지구가 둥근 것은 그냥 봐도 보이는데 말로 설명하라고 한다. 환장할 일이다. 하긴 필자처럼 음치에 박치라서 화음을 본능적으로 습득하지 못하고 남들에게 설명해 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색각인 사람에게 빨간색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구조론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말로 설명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도구에 따라 신분이 정해진다. 글자를 아는 지식인은 문맹인과 다른 존재다. 지식인이 문맹인을 도울 수는 있어도 문맹인이 지식인을 도울 수는 없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일 안에서는 평등하지 않다. 언어를 배우면 협력할 수 있다. 글자를 배우면 지식을 공유할 수 있다. 협력하고 공유하는 사람의 집단에 소속되는 거다. 명백히 신분상승이 일어난다. 생각을 할 줄 알면 한 단계 더 도약한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지와 무지를 가른 사람은 소크라테스다. 나는 생각하는 자와 반응하는 자로 가르고자 한다. 반응하는 자에서 생각하는 자로 거듭나야 한다. 수동적 사유에서 능동적 사유로 갈아타야 한다. 지식인은 도구를 쓴다. 도구가 먹히는 분야에 한해서 그들은 유능하다.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면 갑자기 바보가 된다. 명문대 나온 사람들의 수준 이하 행태가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예술가의 번뜩이는 직감은 생각의 산물이 아니다. 불쑥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환경의 자극에 따른 기계적 반응이다. 대중음악의 작곡가는 대마초를 피우고 좋은 곡을 쓰기도 한다. 조리 있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신경이 곤두선 결과 감각이 예민해져서 생각이 잘 떠오르는 것이다. 능동적인 사유와 수동적인 반응은 다르다. 수학자는 법칙을 쓰고, 과학자는 현미경을 쓴다. 역시 자극과 반응의 범주에 속한다. 더 예리한 도구로 자극하여 더 정확한 반응을 끌어낸다. 생각이 어려울까? 그렇지 않다. 바퀴벌레도 생각할 줄 안다. 이 길이 막히면 저 길로 갈아타는게 생각이다. 그런데 인간은 못 한다.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이라는 덫에 잡혀 있기 때문에 사유의 층위를 갈아타지 못한다. 이 버스에서 내리지 못하므로 다른 버스를 타지 못한다. 에너지는 확산 아니면 수렴이다. 사건은 일방작용 아니면 상호작용이다. 게임은 부분이 아니면 전체다.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면 전면전이다. 확산을 수렴으로, 일방작용을 상호작용으로, 부분을 전체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수평적 사고에서 막히면 수직적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사고의 단조로움에서 막히면 보다 입체적인 사유의 풍성함으로 갈아타야 한다.
-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사유의 단조로움 대 입체적인 사유의 풍성함 그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런 낌새조차 없다. 1차원 선 위에서 마주친 두 마리 개미처럼 끙끙대며 힘을 소진하고 있는게 인간이다. 서로의 변발을 움켜잡고 샅바씨름 하는 아Q와 소D처럼 교착되어 있다. 교착을 타개하지 못한다. 더 높은 세계로 도약하지 못한다. 방향전환을 못한다. 방향의 존재조차 모른다. 소실점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 차원을 깨닫지 못하고 낮은 세계에 머물러 있다. 방향전환을 하려면 축을 장악해야 한다. 방향이 그냥 바뀌는게 아니라 반드시 대칭의 축을 거쳐서 바뀌는 것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갈아타려면 핸들을 거쳐야 한다. 씨름선수라도 축을 장약하고 기술을 걸어야 한다. 그런데 못한다. 기술을 걸기 위해서 샅바를 놓는 순간 상대의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한 사람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미리 무게중심을 옮겨놓고 기술을 걸어야 한다. 사전에 예비대를 받쳐놓은 군대만 전투 중에 작전변경이 가능하다. 이괄의 난과 같다. 무악재에서 관군과 붙었는데 이괄의 반란군이 고지를 차지하고 있어서 일단 유리했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모래먼지에 조총수가 눈을 뜰 수 없었다. 100미터만 후퇴하자고 대장의 수자기帥字旗를 뒤로 물렸는데 관군이 고함을 질렀다. '반란군이 후퇴한다. 돌격하라.' 사기가 오른 관군이 고갯마루로 밀고 올라왔다. 백 미터를 물리려다가 영원히 물러가게 되었다. 이런 식이다. 뒤에 예비대를 받쳐놓지 않으면 이런 꼴이 나는 것이다. 축을 장악한 사람만 기술을 걸 수 있다. 1차원에서 2차원으로 도약하지 못한다.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없는 차원을 만들어낼 수 없다. 2차원을 확보해 놓고 1차원으로 내려와서 싸우다가 불리하면 2차원으로 올라가는 식이어야 한다. 입체적인 캐릭터로 받쳐놔야 주인공에게 프리롤을 줄 수 있다. 부분에서 전체로 방향전환을 할 때는 미리 전체와 연결되는 핵심을 장악해놓고 부분으로 내려와서 싸움을 걸어야 한다. 교통로를 확보해놓고 진지로 들어와야 한다. 대칭되는 양쪽을 동시에 꿰는 균형점을 장악해야 한다. 균형감각이 있어야 방향전환이 가능하다. 자유로운 조절이 가능하다. 밀당이 가능하다. 갑자기 밀당을 시도하므로 커플이 깨지는 거다. 지식인이 아버지를 찌르고 극좌에서 극우로 변절하여 인생을 갈아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방향타가 없기 때문에 배를 버리고 도망친다. 비겁하게도 말이다. 배는 이물과 고물이 대칭을 이루지만 동시에 둘을 통일하는 키에 의해서 파도와 대칭된다. 대칭 위에 또다른 대칭이 있다. 더 높은 게임으로 올라서지 못하는게 문제다. 보통은 대칭에 잡혀 있다. 사람들은 선과 악의 대칭, 진보와 보수의 대칭, 정의와 불의의 대칭에 잡혀 있다. 하나의 선로에 마주 오는 두 기차가 피하지 못한다. 좌파는 왼쪽만 보고 우파는 오른쪽만 본다. 핸들이 없다. 지렛대가 없다. 도구가 없다. 인간이 더러 생각하기도 하지만 도구를 쥐었을 때에 한해서다. 무의식중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사유가 아니다. 시인은 시상을 떠올리고 악사는 악상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뇌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복제된다. 철학자가 산책을 하거나, 시인이 연애를 해보거나, 영화감독이 술집에서 소동을 부리면 혹시 자극을 받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고 기행을 부리다가 광화사 되고 광염소나타 된다. 반응을 끌어내려고 타인을 자극하는 사람이 되면 그게 진중권 실패다. 관종이 되는 것이다. 나는 진리를 말하고자 한다. 진작에 간파했다. 사람들이 입만 열면 개소리를 한다는 사실을. 개소리를 가려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방작용에 갇혀 있으면 가짜다. 좌든 우든 한쪽 끝단에 서서 자극의 강도를 계속 올려가면 가짜다. 더 많은 기도를 해. 더 많은 후원금을 바쳐. 더 많은 훈련을 소화하라구. 더 열심히 공부해. 더 많은 성찰이 요구된다네. 더 진정성을 보여봐. 우유 한 방울 먹지 않는 진정한 비건이 되어야 해. 이런 식으로 갈 데까지 간다. 죽는다. 근래에 유행하는 김성근식 노력지상주의, 조갑제식 신자유주의, 각종 차별주의, 성찰타령, 진정성 타령, 유기농 타령, 생태주의 소동이 죄다 한 방향으로 일제히 몰려가면서 자극의 강도를 높이는 삽질이다. 균형이 없고, 핸들이 없고, 조절장치가 없다. 한쪽으로 편벽되는게 자랑이 아니다. 궁지로 몰려가서 죽는다. 글자 배운 사람이라면 삼가야 할 소인배 행동이다. 그게 괜히 사람을 쥐어짜는 짓이다. 시스템은 건드리지 않고 사람을 잡는다. 악으로 깡으로 전쟁을 못 이긴다. 일본군의 반자이 어택과 같다. 카미카제 수법으로 이길 수 없다. 진짜는 과학과 합리로 이기는 것이며 그것은 축의 장악을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씨름은 수평으로 버티다가 수직으로 들어올려서 이긴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기어를 바꾸는 순간 자신이 밀려서 넘어질까봐 못한다. 미리 기어를 바꿔놓고 들어와야 한다. 참과 거짓은 간단히 구분할 수 있다. 시스템 내부에 핸들이 없으면 가짜다. 한 점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가짜다. 수평을 수직으로, 평면을 입체로, 1차원을 2차원으로 바꾸는 조절장치가 내장되어 있어야 한다. 소실점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대칭의 코어가 있어야 한다. 말은 고삐가 있어야 하고, 배는 타가 있어야 하고, 차는 핸들이 있어야 한다. 사회에도 시장에도 그런 구조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간단하다. 만남 아니면 이별, 균형 아니면 불균형, 연결 아니면 단절, 부분 아니면 전체다. 세상은 왼쪽이 아니면 오른쪽이다. 가다가 막히면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 인간 중에 99.999퍼센트는 그게 안 된다. 가다가 막히면 더 열심히, 더 악으로, 더 깡으로, 더 많이, 더 진정성 있게, 더 성찰해서, 더 반성하고, 더 사죄하고, 더 고개 숙이고. 이러다가 죽는다.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높은 단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맞물리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콜더의 모빌과 같다. 부분의 대칭 위에 전체의 대칭이 받치고 있다. 부분의 변화가 전체에 전달되기도 하고 그러지 않기도 한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자체해결을 유도하고 그 선을 넘으면 중앙이 개입한다. 언제 중앙이 개입하는가를 정하는 핸들이 있다. 천칭 위에 천칭이 겹쳐져 있다. 보통은 부분에서 방향을 틀어봤자 원위치 된다. 핸들을 꺾어도 차는 제자리를 맴돈다. 부분에서 전체로 방향을 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부분 안에서의 방향전환은 의미 없다. 그것은 방향전환이 아니다. 차원을 바꾸고 층위를 갈아타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이 부분이면 인류의 문명권 대립이 전체다. 한국이 잘 나가다가 자빠지는 이유다.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충돌에서 결론이 나온다. 지구촌 인류호 안에서 한국의 미션이 있다. 대한민국 국내로 닫힌계를 정하고 고립되면 무슨 짓을 해도 제자리를 맴도는 거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부분에 고립되어 인류문명과 동조화가 안 되고 있다. 싱크로가 안 되고 있다. 외부에서 역할을 조달하지 못한다. 원래 혼자 못 간다. 받쳐주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일본이 잘해야 한국이 잘한다. 북한도 못하고, 중국도 못하고, 일본도 못하니까 한국도 삽질을 한다. 지팡이가 없어 일어서지 못하고, 지렛대가 없어 힘을 쓰지 못한다. 북한이 잘되게 만들어야 한국도 잘 된다. 혼자만 사는 수는 없다. 인간이 빌빌대는게 정의, 자유, 평등, 평화와 같은 관념의 문제는 아니다. 성찰, 진정성, 생태주의 같은 개소리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원시인의 부족본능 때문이다. 사회학이 막히면 심리학으로 풀고, 심리학이 막히면 생물학으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방향전환이 안 된다. 이 길이 막히면 저 길로 가야 하는데 못 간다. 왼쪽이 아니면 오른쪽이다. 생물학에서 막히면 화학, 화학으로 막히면 물리학, 물리학으로 막히면 수학, 수학으로 막히면 구조론으로 풀어야 한다. 인간은 원래 100명 이상 모여서 살 수 없는 동물이다. 유전자의 명령은 소집단을 가리킨다. 우리 가족만 잘 살자. 우리끼리만 잘하자는 식이다. 그래서 뭐가 안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게 낯가림이다. 온갖 도덕과 윤리에, 자유와 평등에, 진정성과 성찰에 입으로만 떠드는 관념적 구호를 조달해봤자 한낱 구호 따위가 인간을 살리지는 못한다. 유행어가 세상을 구하랴? 인간의 원초적인 부분은 말하기 어려워서 말하지 않는게 문제다. 인간들은 그저 말하기 좋은 대로 지껄인다. 막연히 어감이 좋은 단어를 뱉는다. 배웠다는 사람이 인지부조화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불안하므로 차별한다. 인간은 100명 이상 대집단을 감당할 수 없다. 자극하고 반응을 기다리는 고약한 게임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이념이고 관념이고 간에 쓸모없다. 유전자에 새겨진 차별본능을 극복해야 한다. 비린내를 싫어하면 고기를 못 먹는다. 젓갈은 더 못 먹는다. 된장도 못 먹는다. 아니 거의 다 못 먹는다. 먹을 수 있는게 없다. 그러다가 굶어 죽는다. 용기 있게 첫 숟가락을 떼야 한다. 아기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첫걸음마를 뗀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쓴맛이 달게 느껴지는 어른의 입맛으로 갈아타야 한다. 단것만 찾는 어린이의 입맛을 졸업해야 한다. 자기 입맛을 고수하는 소아병을 버리고 70억 명을 감당하는 군자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가다가 막히면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 리스크를 감수하며 붙잡은 샅바를 놓고 축을 옮겨서 기술을 걸어야 한다. 무게중심을 옮겨놓은 사람만 기술을 걸 수 있다. 1층에서 막히면 2층으로 올라가야 한다. 량에서 막히면 운동으로, 운동에서 막히면 힘으로, 힘에서 막히면 입자로, 입자에서 막히면 질로 갈아타는게 구조론의 정답이다. 그런데 그거 원래 안 된다. 미리 2층에 조치해 놓고 1층으로 내려온 사람만 급할 때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뒤에 예비대를 받쳐놓고 적을 유인할 교통로를 확보해놓고 싸움을 걸어야 한다. 소실점이 맞는지는 1초 만에 판단할 수 있다. 입체적인 차원의 방향전환이 감각적으로 되어야 한다. 안 되면 공식을 암기하고 훈련할밖에. 그것이 깨달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