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로 위주로 수련하는 중국 고무술이 실전에서 형편없이 깨지는 이유는 간합 때문이다. 간합은 거리다. 간합은 실전을 통해서만 익힐 수 있다.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하다. 타이슨은 빠른 스텝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홀리필드는 바짝 붙어서 거리를 주지 않는다. 파퀴아오든 메이웨더든 거리싸움으로 승부를 낸다. 거리를 잘 아는 초고수들끼리 붙으면 키가 큰 선수가 유리하다. 조 프레이저가 조지 포먼을 이길 수 없는 이치다. 키가 큰 포먼이 더 많은 거리를 가진다. 이건 간단한 산수다. 격투기는 체급이 깡패다. 거리를 읽는 것은 눈과 호흡이다. 박자를 타는 것이다. 상대의 펀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밸런스를 보고 다음 동작을 읽어낸다. 야구선수가 투수의 투구폼을 보고 공의 궤적을 읽어내는 것과 같다. 투로를 아무리 연습해도 실전이 없으면 간합을 익힐 수 없다. 타석에 한 번도 서보지 않은 타자가 투구폼을 보고 구종을 알아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한가? 구조론은 기능 중심의 사유다. 기능이 간합이다. 기능은 어떤 둘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성립한다. 자동차로 말하면 기어와 같다. 엔진과 바퀴가 아무리 좋아도 기어가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인간의 사유가 우상화 되고 관념화 되는 것은 기어가 없기 때문이다. 실전이 없고 간합이 없으면 우상화 된다. 흑백논리에 프레임이 들어가는 것이다. 상호작용이라야 한다. 상호작용하려면 톱니가 맞물려야 한다. 실전이 없으면 기어가 맞물리지 않는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 도발을 해도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가 반응할 때까지 자극의 강도를 높인다. 극단주의로 가는 것이다. 미국 히피든, 일본 적군이든, 한국 페미든 갈 데까지 가본다. 그러다가 외통수로 몰린다. 기어는 거리를 조절하는데 극단주의는 거리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실전이 없는 중국 고무술, 실전을 안 하는 일본 카라테, 실전을 안 하는 해동검도, 실전을 안 하는 태껸은 의미가 없다. 과거의 명성은 무술을 전혀 모르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얻은 것이다. 태권도가 더 발전하려면 호구를 벗어야 한다. 무술가끼리 붙으면 무조건 실전을 많이 뛰어본 사람이 이긴다. 무술은 궁극적으로 눈으로 하는 것이고 눈은 공평하게 하나씩 달고 있기 때문이다. 호흡과 리듬감, 밸런스 감각은 무술의 종류와 상관없다. 어떤 무술을 하든 젊은 사람이 이긴다. 각종 괴력난신, 허무맹랑, 견강부회, 음모론, 초능력, 사차원, 유기농, 신토불이, 생태주의, 관념, 이념, 흑백논리, 이즘, 이데올로기, 사이비들의 공통점은 간합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이 옳으냐는 둘의 거리가 결정하는데 그 거리가 없다. 거리가 없는데 옳고 그름을 따지는건 의미가 없다. 그들은 절대 대결하지 않으며 입으로만 내가 옳다, 우리 무술이 더 강하다, 영춘권 쵝오, 팔괘장을 모르는군, 태극권을 들으나 봤나? 결국 홍가권이 평정했지. 최종보스는 형의권이라네. 팔극권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라니까. 어허 소림사 앞에서 감히 방귀를 트려고 하다니. 이러고 논다. 투로를 수련하여 익히는 동작이 백 가지라면 간합은 경우의 수가 곱하기 100이다. 그런데 말이다. 고수는 그것을 환원시켜서 하나로 만든다. 어떤 자세, 어떤 동작이든 고수의 눈으로 보면 거리가 닿거나 닿지 않거나다. 고수는 상대의 다음 동작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