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상호작용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게 어려운 거다. 인간 뇌구조 용량의 한계를 넘은 거다. 개는 목줄을 잡아야 안심되고 말은 재갈을 물려야 안심된다. 일방작용으로 가는 거다. 견주가 몇 마디 말로 개를 통제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다. 말은 조절해야 한다. 와라. 싫어. 오라니깐. 싫다니깐. 죽을래? 갈게. 개가 흥정을 시도하면 피곤하다. 상호작용 대신에 자극과 반응의 일방작용을 쓴다. 이분법에 흑백논리에 프레임 걸기에 우상화 놀음이다. 괴력난신 허무맹랑 견강부회다. 흥정하기 싫다. 뇌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이런 식이면 축구경기를 해도 작전을 쓸 수 없다. 빌드업을 하든 압박축구를 하든 협력을 해야 한다. 왼쪽을 노리는 척하며 오른쪽을 공략하려면 왼쪽으로 한 명이 뛰어들어 수비수를 분산시켜야 한다. 문제는 인간의 지능이다. 훈련을 해서 되지 명령만으로는 안 된다. 인공지능만 해도 일방작용이다. 내가 ‘커피를 싫어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마실만 한 거 뭐가 좋냐?’ 하고 물으면 ‘모닝커피 한 잔 어때요?’하고 제안한다. 내게 전혀 관심이 없다.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동시접속된 수천 명을 접대하느라 바쁘다. 그건 지능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학습을 한다는데 학습은 지능이 아니다. 지능은 상호작용이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내는게 지능이다. 지구인 중에는 지능이 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지능을 모르니까 인공지능을 못 만든다. 소금을 달라고 하면 그 소금을 어디에 쓸 거냐고 반문해야 지능이다. 이용자는 질문만 하고 구글 어시스턴트는 대답만 하는건 지능이 아니다. 인간의 지능이 이렇게 낮은 데도 문명이 이만큼 발전한 것은 상호작용 덕분이다. 혼자서는 못하는데 경쟁하면 뭐가 된다. 공산주의가 망한 것도 일방작용 때문이다. 여기에 중대한 힌트가 있는 거다. 인간의 뇌는 일방작용만 소화하게 되어 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일방작용을 하면 결과적으로 상호작용이 된다. 여당과 야당이 경쟁하면 상호작용이 된다. 스스로 묻고 답하면 상호작용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혼자 자문자답을 하는 것인데 인간들이 그렇게 못하는 듯하다. 인간은 남을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고 할 뿐 스스로 묻고 답하지 않는다. 즉 인간은 서로 마찰하고 갈등하고 다투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동물인 것이다. 커플은 사랑싸움을 피할 수 없고 국가는 전쟁을 피할 수 없고 기업은 경쟁을 피할 수 없고 정당은 정쟁을 피할 수 없다. 왜 다투지? 평화가 좋잖아. 평화는 일방작용이라서 망한다. 평화가 계속되면 기득권은 요지부동이다. 인간은 갈등과 불화를 통해서만 전진할 수 있는 동물이다. 어떻게든 상대를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야 하는 운명이다. 페미든 안티페미든 그렇다. 그게 통과의례인 것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문제가 아니라 상대를 자극하고 반응을 끌어내려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상대를 통제하는 지렛대를 꽂으려는 것이며, 소인배의 권력행동인 것이며, 상대가 비명을 지를 때까지 자극의 강도를 끌어올리게 되어 있다. 인간은 시행착오를 피할 수 없는 동물이다. 이성적으로 조절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대개 갈 데까지 일단 가본다. 망한다. 일본 적군이든 미국 히피든 한국 페미든 쥴리 점쟁이든 조계종 땡중이든 다들 그렇게 한다. 인간의 비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