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아둔 글을 유튜브 동영상 강의용으로 올렸는데 분량이 넘치면 안 합니다.
존재론 인식론 인식은 자연의 모습이 인간의 뇌 안에 펼쳐진 스크린에 비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거울의 상이 앞뒤가 바뀌어 보이듯이 왜곡된다. 이를 바로잡아서 보는 것이 존재론이다. 바로잡지 않고 일단 보는 것이 인식론이다. 자연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관측법이 존재론이다. 그냥 보이는대로 보는 것이 인식론이다. 존재론이 자연의 실상이고 인식론은 왜곡된 허상이다. 그런데 존재론에 도달하려면 일단 인식론이라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인식론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존재론이라는 정상을 밟은 다음에는 그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무지개를 봤다면 등 뒤에 태양이 있다. 인간은 곧바로 태양을 볼 수 없고 무지개를 본 다음 추론하여 태양을 찾아야 한다. 태양을 찾은 다음에는 무지개를 잊어버려야 한다. 태양에는 무엇이 있지만 무지개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림자와 같다. 범인의 그림자를 보고 범인을 추적하게 되지만 범인을 잡은 다음에는 그림자를 버려야 한다. 그림자에 수갑을 채워 경찰서로 끌고가려고 하는게 인식론의 실패다. 자연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인간은 부분에서 전체로 간다. 자연은 원인에서 결과로 가고 인간은 결과에서 원인으로 간다. 자연은 연결에서 단절로 가고 인간은 단절에서 연결로 간다. 자연은 연역하고 인간은 귀납한다. 화살은 활에서 과녁으로 간다. 인간은 과녁에 꽂힌 화살을 보고 추론하여 활을 찾아낸다. 이 방법으로는 올바른 인식이 불가능하다. 부분에서 전체를 찾을 수 없다. 결과에서 원인을 되짚을 수 없다. 단절에서 연결로 복구할 수 없다.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기는 단어를 먼저 배우고 문장을 나중 배운다. 문장을 먼저 배우고 빈 칸에 단어를 채워넣는게 존재론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식론으로 시작하지만 적절한 시점에 존재론으로 갈아타야 한다. 갈아탄 다음에는 인식론을 버려야 한다. 존재론은 무한복제가 가능하므로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 그러므로 인식론의 부스러기 지식을 버려도 상관없다.
존재론의 연역은 복제한다. - 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 존재론은 확실한 지식이지만 복제의 원형이 필요하고, 인식론은 엉터리지만 선택지가 많지 않을 때 넘겨짚기로 빠르게 판단할 수 있다. 존재론은 올바른 지식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인식론은 사소한 일에 써먹을 수 있으나 과학으로 깊이 들어가면 거의 가짜다. 각종 음모론에 괴력난신, 초능력, 텔레파시, UFO, 천국, 귀신 따위는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자유, 평등, 정의, 평화, 행복, 사랑과 같은 관념어도 마찬가지다. 심리적 동기, 욕망, 의지, 의도, 목적, 탐욕, 야망 따위는 모두 인식론의 귀납에 따른 오류다. 택도 없는 헛소리다. 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인간의 지적 활동은 뇌의 스크린에 자연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서 촉발된다. 그림자를 곧 지식으로 간주하면 인식론의 오류다. 그림자를 단서로 삼아 자연의 진상이 인간의 뇌에 비치는 과정을 재현해야 한다. 모든 지식은 인식론의 추측과 넘겨짚기로 출발하되 그것은 잠정적인 지식으로 간주하고 존재론의 실험과 재현으로 검증해야 한다. 원인 경과 결과 사건은 기승전결로 흘러가는데 우리는 원인과 결과 두 단어로 설명하려고 한다. 사건의 중심은 의사결정이다. 사건은 원인에서 의사결정을 거쳐 결과로 간다. 원인>경과>결과다. 문제는 대칭의 상대성이다. 우리는 상하, 좌우, 강약, 경중, 전후와 같은 대칭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그런데 사물은 대칭이지만 사건은 비대칭이다. 우리가 그 대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순간 대칭성은 사라지고 비대칭성이 드러난다. 자동차는 앞뒤가 대칭이지만 시동을 걸면 앞으로 간다. 빛은 입자가 있어도 어둠은 입자가 없다. 사물로 보면 빛과 어둠이 대칭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언제나 빛이 어둠을 조절할 뿐 어둠은 빛을 조절할 수 없다. 악의를 가지고 뭐든 대칭의 상대성으로 몰아서 물타기 하려는 사람이 있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거나, 강자나 약자나 둘 다 잘못했다거나. 재벌이나 노동자나 똑같다거나 이런 식의 결론이 없는 허무주의로 유도하는 속임수 말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경과를 집어넣으면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 드러나므로 속일 수 없다. 사건은 언제나 위치에너지에서 운동에너지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갈 뿐 그 역은 없다. 사건은 항상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연결에서 단절로 간다. 화살처럼 똑바로 날아간다. 사건의 결과측을 보는게 인식론이요 원인측을 보는게 존재론이다. 우리가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이미 화살에 맞은 다음이다. 자연히 결과측을 보게 된다. 원인은 추론해야 한다. 단서는 결과에 있으므로 결과측을 주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베테랑 형사는 이런 사건을 많이 겪어 봤으므로 원인은 보나마나 치정이다. 돈문제다. 원한관계다 하고 패턴분석을 통해 알아낸다. 용의자의 범죄동기를 먼저 알아내고 용의자의 시점에서 범죄과정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이 존재론이다. 연역 귀납 존재론은 연역추론이고 인식론은 귀납추론이다. 연역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가고 원인에서 결과로 간다. 귀납은 부분에서 전체로 가고 결과에서 원인으로 간다. 연역이 올바른 추론이지만 많은 경우 연역은 불가능하다. 단서가 없기 때문에 추론을 시작할 수도 없다. 인간이 사건을 목격했을 때는 범인이 현장을 이탈하고 난 다음이기 때문이다. 귀납할 수 밖에 없으므로 귀납의 오류를 인정하고 범인을 특정한 다음 연역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밟아야 한다. 연역은 수학이다. 하나의 지식을 알아낸 다음 이를 대량으로 복제한다. 인간의 귀납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역의 집합이다. 뇌 안에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게 연역이다. 인간의 뇌구조가 패턴을 복제하는 연역구조이기 때문이다. 패턴을 복제하도록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귀납이다. 귀납은 학습에 쓰인다.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거나 핸들 한 번 잡아보지 않고 운전할줄 안다고 믿는게 귀납의 오류다. 자전거를 배우되 먼저 균형을 잡고 페달을 밟아 전진한다거나, 수영을 배우되 먼저 물에 뜨고 헤엄친다거나, 비행기를 날리되 먼저 공중에 뜨고 그 다음에 비행한다는게 귀납의 오류다. 실제로는 항상 전체가 먼저다. 헤엄을 쳐야 물에 뜨고, 페달을 밟아서 전진해야 균형이 잡히고, 비행기가 날아야 공중에 뜬다. 인간은 언제나 귀납의 덫에 걸리므로 시행착오와 오류시정을 절차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역설 이중의역설 사물은 인간이 다루는 대로 움직이지만 사건은 계에 에너지가 걸려 있으므로 대칭의 축에 걸려서 의도와 반대로 된다. 살려고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이기려고 하면 지고 지려고 하면 이긴다. 두 사람이 한 배를 타고 있다. 이물에 앉아서 고물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려면 반대로 움직여야 한다. 상대를 밀어서 넘어뜨리려다가 반대로 내가 넘어지는게 역설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을 장악하려면 외부에서 들어와야 하며 닫힌계 안에서는 엔트로피 문제로 불가능하다. 이중의 역설은 축을 장악하면 다시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 축을 장악하지 못하면 량은 운동에 걸려, 운동은 힘에 걸려, 힘은 입자에 걸려, 입자는 질에 걸려 의도와 반대로 된다. 숨은 플러스 알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세와 이윤과 권력과 관성과 효율이 방해한다. 그러므로 반대쪽에 먼저 조치해야 한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줘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반대로 조치해도 역시 실패한다. 오히려 정면승부로 밀어붙여야 한다. 단 이번에는 축을 선점하고 세게 해야 한다. 질 입자 힘의 상부구조와 힘 운동량의 하부구조가 있다. 하부구조를 잘해봤자 상부구조에서 틀어버리는게 이중의 역설이다. 하부구조는 역설이 작용하므로 항상 반대쪽에 먼저 조치하고 기동해야 한다. 적의 배후에 일대를 보내서 퇴로를 끊어놓고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상부구조는 그런거 없고 그냥 불도저로 밀어붙여야 한다. 축을 장악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전략은 반대가 된다. 정치인이 내가 잘하기보다 항상 상대편의 실수를 추궁하여 이득을 보는게 역설이다. 박근혜의 삽질에 문재인이 이득을 봤다. 반면 안철수처럼 상대편의 실수만 기다리다가 주도권을 잃어버리는게 이중의 역설이다. 힘이 없으면 상대의 실수를 기다려야 하고 내가 힘을 가졌다면 화끈하게 밀어야 한다. 세상은 상호작용이고 상호작용은 항상 상대편이 있다. 이창호가 상대의 실수를 추궁하여 이기는게 역설이라면 이세돌이 거침없는 공격으로 이기는 것은 이중의 역설이다. 작은 게임은 역설이 작용하고 큰 게임은 이중의 역설이 작용한다. 역설은 상대당의 실수를 응징해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그 과정에 국민이 똑똑해져서 이긴다. 역설은 꼼수로 이기고 이중의 역설은 주최측이 룰을 개정하여 꼼수를 쓰는 팀을 엿먹이는 방법으로 이긴다. 사건에는 방향성이 있다. 배는 키가 있다. 키를 장악하면 정공법으로 이기고 키를 장악하지 못하면 속임수로 이긴다. 노는 반대쪽으로 움직인다. 앞으로 가려면 뒤로 밀어야 한다. 역설이다. 키는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든 무조건 배를 앞으로 가게 한다. 이중의 역설이다. 키가 주도권이다. 기세요 이윤이요 권력이요 관성력이요 효율성이다. 키를 잡지 못했으면 의도와 반대쪽으로 움직이고 키를 장악했으면 정공법으로 돌아와야 한다. 모순 사건은 균일한 계에서 일어난다. 계는 외력의 작용에 맞서 1로 대응하여 반작용으로 되돌린다. 외력이 작용하면 계 내부에 불균일이 발생하므로 모순이다. 불균일로 인해 계가 1이 아니게 되면 깨진다. 에너지가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불균일한 지점에 수렴되며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가 된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외력은 계 내부에서 균일하게 분산되거나, 반작용의 형태로 돌려보내거나, 열의 형태로 다시 외부로 빠져나가야 한다. 그 모순의 해소과정이 사건이다. 우주의 많은 물질과 존재가 자전과 공전의 형태로 회전하는 이유는 회전이 계를 균일하게 만드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별이나 과일이 둥근 공의 형태를 가지는 것도 같다. 불균일한 계는 소행성의 파편처럼 깨진다. 투수의 공과 타자의 배트가 부딪혔는데 타자의 배트가 부러졌다면 배트 내부가 균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계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유체의 몰아주는 성질에 의하여 불균일한 한 지점에 수렴되므로 그 지점에서 깨진다. 그 지점이 조직의 약한 고리가 된다. 조직은 약한 고리를 보완하는 과정에 진보한다. 그런 점에서 모순이야 말로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계 내부를 효율적으로 재배치하여 모순을 제거하고 합리화 하는 방향으로 사회의 진보는 일어난다. 집단이 발전하려면 내부가 균일해야 하지만 동시에 일부 모순이 있어서 에너지 낙차를 일으켜야 한다. 글자가 어려워야 엘리트와 비엘리트가 나눠지고 비엘리트가 엘리트에 복종한다. 이 방법은 일시적 성과를 내지만 곧 한계에 봉착한다. 엘리트와 비엘리트 간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병이 간부를 주적으로 삼는 것이 그러하다. 더 진보하려면 쉬운 문자가 보급되고 미디어가 발달해서 엘리트와 비엘리트의 간극을 없애야 한다. 그 과정에서 모순이 진보의 속도를 조절한다. 완전히 균일하면 변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진화가 너무 빨리 일어나고 너무 빨리 멈춘다. 사회가 진보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모순을 찾아내야 한다. 근래의 탈근대나, 똘레랑스나,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올바름은 그렇게 찾아진 모순이다. 다문화니 성소수자니 하며 의도적으로 들쑤셔서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사회는 전진한다. 검찰개혁 언론개혁 관료개혁도 마찬가지다. 갈등을 드러내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문제해결능력의 발달 형태로 사회는 진보한다. 모순이 없으면 사회는 정지하고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면 사회는 파괴된다. 모순이 구조 내부에 에너지를 수렴하는 코어를 이루고 약점인 코어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진보한다. 코어가 너무 강해도 또다른 불균일의 원인이 되므로 민주주의는 지속적으로 코어를 교체한다. 상호작용 일방작용, 게임 의사결정은 축 1과 대칭된 2가 맞물려 구조를 이룬 상태에서 일어난다. 이때 대칭을 이루고 맞물려 돌아가는 2를 나누어 별도로 관측하면 일방작용이고 둘을 합쳐서 하나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물레방아는 물레부와 방아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별도의 두 존재로 보면 일방작용이고 하나의 물레방아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선수의 시선과 주최측의 시선이 있다. 선수가 보는 일방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두 팀의 대결이다. 주최측이 보는 상호작용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의 시합이다. 이어지는 랠리로 보면 하나의 축이 대칭 2를 끌고 간다. N극과 S극으로 두 개의 극이 있는게 아니라 하나의 자기력선이 있다. N에서 S로 갈 뿐 그 반대는 없다. 빛이 어둠을 통제할 뿐 그 반대는 없다. A가 움직이면 B가 움직이고 B가 움직이면 A가 움직인다. 상대성이 작용한다. 움직이는 둘이 연결되어 메커니즘을 이루고 에너지를 공급하는 하나의 토대에 꿰어지면 시스템이다. 메커니즘을 구성하는 바퀴는 둘이지만 에너지는 하나다. 바퀴를 관찰하면 일방작용이고 에너지로 보면 상호작용이다. 이를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 게임은 주최측이 있다. 주최측은 공정하지 않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모아 게임을 흥행시키는 한 방향으로 룰을 적용한다. 기계적인 공정이 아니라 흥행이 되는 공정을 추구한다. 심판은 랠리가 이어지게 하는 쪽에 승리를 선언한다. 랠리가 권력을 가진다. 진화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인류문명 역시 상호작용의 총량증대라는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관측 해석, 주체 객체 관측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의 대칭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판단기준이 되는 가늠자가 있다. 관측자 자신이 판단기준이 되는게 관측의 오류다. 관측자가 움직이므로 노이즈가 일어난다. 관측대상이 움직여도 노이즈가 일어난다. 보통은 관측자와 관측대상이 둘 다 정지해 있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그런데 관측자인 주체도 움직이고 관측대상인 객체도 움직여서 노이즈를 일으키므로 해석이 필요하다. 관측의 노이즈를 제거하는 해석도구가 구조론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일상적인 관측은 정지해 있는 객체의 외부를 조사할 때만 유효하다.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만 관측할 수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죽은 것을 관측하되 산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사물을 관측하되 사건을 관측하지 못하고, 정지한 것을 관측하되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지 못하고, 표면을 관측하되 내부를 관측하지 못하고, 결과를 관측하되 원인을 관측하지 못한다. 사건을 관측하고, 움직이는 것을 관측하고, 산 것을 관측하고, 내부를 관측하고, 원인을 관측하고 노이즈를 제거하려면 특별한 해석 도구를 써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수학을 쓴다. 수학은 둘 이상이 집합을 이루고 서로 연동된다. 구조론은 복수의 사물을 서로 연동시켜서 사건화 하는 방법을 쓴다. 이때 객체 내부의 A와 B는 대칭을 이루고 나란하므로 A가 변해도 B가 따라붙는다. 상대성을 절대성으로 바꾸고, 일방작용을 상호작용으로 바꾸면, 관측의 노이즈가 재거되므로 객관적인 관측이 가능하다. 구조론은 관측자의 개입을 배제하고 객체 내부에서 자체의 대칭을 추적한다. 사물은 사건으로, 강체는 유체로, 실체는 관계로 바꾸어 관측한다. 주체인 관측자를 배제하고 객체인 관측대상 안에서 대칭된 A가 움직였을 때 B가 어떻게 맞서는지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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