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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는 뭐고 우파는 또 뭐냐?’.. 어느 독자님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씁니다. 물론 백사람에게 물으면 100가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저의 견해는 그 100가지 중의 하나로서 저의 개인적인 견해에 불과합니다.

이 사이트의 성격에 맞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 이런 이야기도 하나 쯤 꼽싸리 끼어서 나쁠 건 없다고 보고..

좌파와 우파를 구분하는 기준이 또.. 좌파와 우파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용어들은 문맥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합니다. 노무현대통령의 경우 좌파가 보면 우파로 보이고, 우파가 보면 좌파인 셈이지요.

그런데 나랏일이라는 것이 대통령이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국민의 총의를 따라야 하므로, 단기적인 사안은 우파의 관점에서 보수적으로 처리하고,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인 사안은 좌파의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좌파와 우파.. 이걸 어원부터 논하려면 프랑스혁명 때 자코뱅당과 지롱드당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런건 피곤한 거고.. ‘역사의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통상적인 의미로 보면 우파는 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에 해당하고 좌파는 마르크스주의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공동체'인데, 정치적 편가르기 개념에서 ‘우리편’이라고 할 때의 우리편이 뭐냐 이겁니다.

좌파는 계급을 기준으로 피아구분을 하고, 우파는 민족이나 국가를 기준으로 피아구분을 합니다. 계급이 같으면 우리편이다 혹은 민족이 같으면 우리편이다 이거죠.

둘 중 ‘어느 쪽이 맞느냐’를 논하자면 계급적 문제는 계급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맞고, 민족적 문제는 민족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 또 맞습니다.    

고로 좌파도 유효하고, 우파도 부분적으로는 유효합니다. 좌파들은 마르크스의 낡은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있다는 점이 문제이고, 우파들은 본질에서 이념적 토대가 빈곤하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절대 50 대 50으로 동등하지는 않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좌파입니다.

말하자면 우파는 좌파에 의해 상대적으로 규정될 뿐, 본질에서 이데올로기가 없다 이거에요. 우파는 자체 엔진이 없는 트레일러와 같아서 누군가 끌어조야만 움직입니다. 좌파 일각의 오류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좌파에 기생하고 있는 거죠. 특히 꼴좌파 일부의 시행착오가 우파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왜인가? 이 논의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우파들이 내세우는 국가나 민족은 해체나 개조의 대상이지 발전의 대상이 아닙니다.

예컨대 우리나라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가 수십만이나 몰려와서 민족의 순수성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발전해서 더욱 순혈민족이 된다는 따위의 사고방식은 근거가 없는 셈입니다.

반대로 외국인이 더욱 몰려와서 우리 겨레가 단일민족이라 주장되는 순수성이 엷어지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공동체의 발전이 되는 거지요.

왜냐 하면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본질에서 ‘인간의 문제해결능력의 진보’인데, 인간이 국가니 민족이니 하면서 편을 가르고 사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지, 결코 그것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 문제에 맞닥드려 이를 좋게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안되겠다 싶으니, 민족이니 국가니 하고 금을 긋고 장벽을 세운 다음, 휴전을 선언하고 돌아앉은 거지, 결코 그게 좋아서 ‘그래 니는 일본하고 나는 한국하자’ 하고 편을 가른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보는 ‘문제해결능력의 향상’을 의미하고 ‘문제해결능력의 향상’은 공동체의 발전으로 귀결되며, 공동체의 발전은 계급과, 국가와, 민족의 장벽을 극복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좌파들은 계급이라는 이름의 장벽을 높이고 있고, 우파들은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장벽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총체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라는 존재의 무력함, 인류의 총체적 역량의 한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진보는 계급도 넘어서고, 국가도, 민족도, 성별도, 종교도, 언어도, 문화도 다 넘어서는 거에요. 궁극적으로는 지구촌 인류 모두가 손에 손잡고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현실적으로 인간들에게 과연 그만한 문제해결능력이 있는가입니다. 당장 우리가 국경을 트면 인민군이 쳐내려오고, 불법입국자에, 외제품 홍수에, 마약에, 불법무기에 .. 이거 감당이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상과는 어긋나지만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국가도, 민족도, 수입규제도, 스크린쿼터도 유지해서.. 다단계의 장벽을 만들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는 부단히 그러한 장벽들을 허물어내는데 있습니다. 예컨대 문학과, 방송과, 영화와, 음악과, 종교와, 인터넷과 과학기술의 진보가 부단히 그러한 장벽들을 허물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진보의 편에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러한 역사의 진보를 거부한다면 당장 할 일이 없어집니다.

우파들은 보통 ‘후세인이 테러를 사주한다’, ‘김정일이 남침을 꾀한다’는 등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날조하여 역사의 진보를 거부해 보려 하지만 그런 따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판명되곤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마르크스의 이념적 오류를 극복한다는 전제 하에, 원론적으로는 좌파의 관점이 옳지만, 문제해결능력의 기준으로 볼때 현실적인 한계가 있는 이상 우파의 말도 부분적으로는 경청해줄 필요가 있다는 거지요.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들은 가만 두면 저절로 우파가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돈을 벌고 성공을 하게 됩니다. 곧 기득권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 기득권을 지키려 하면 장벽을 쌓고, 담장을 높이고, 도둑을 막아야 하는데 그게 다 수구의 논리거든요.

그러므로 우리는 정기적으로 뇌세척(?)을 받아가면서 의식적으로 좌파의 시각에서 사물을 보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특히 정치라는 게임의 본질은 '명분과 실리의 교환'입니다. 명분은 좌에서 얻고 실리는 우에서 취하는게 보통입니다. 장기적인 일은 좌의 관점에서 추진하는 것이 맞고, 단기적인 승부는 우의 솜씨로 해결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지혜있는 사람이라면 왼쪽에서 보고, 오른쪽에서 사고하고, 다시 왼쪽으로 포지션을 가져가서 오른쪽을 접수하는 형태로 행동합니다.

대략 정리하면..

수구.. 조선시대에 서얼차대를 해서 양반의 숫자를 줄이려고 노력하듯이 각종 사회적인 진입장벽을 만들고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행태를 말함. 우리나라에서는 서울대수구와 강남수구, 조중동수구가 특히 유명함.

보수.. 기득권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수구와 큰 차이는 없으나 나름대로 합리적인 근거가 제시되는 경우를 의미함. 자본주의라는 게임의 룰은 기득권 존중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므로, 합리적인 경우 기득권은 존중되어야 함.

우파.. 수구와 보수를 아울러 이르되, 거기에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 따위 이념적 측면을 양념으로 쳐서 우파라고 함.

진보.. 인류 전체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보고 ‘역사와 문명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우를 말함.

좌파.. 진보주의에다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양념을 친 경우를 일컬음.

극좌.. 좌파 중 일부가 진보를 종교 비슷하게 왜곡해서 교조주의적인 행태를 취하는 경우를 의미함. 검증되지 않은, 혹은 세련되지 않은, 현실성이 결여된 좌파 일부의 태도를 의미함.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보수와 진보는 자동차의 운전에 해당하겠고, 좌파 혹은 우파의 이념적 태도는 일종의 교통법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운전자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은 개인의 주관적 태도를 의미하고, 교통법규의 차원에서 본다는 것은 객관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자기편끼리 코드를 맞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본의 아니게 과속을 하게도 되는데, 이 경우 안걸리면 그만이지만 걸리면 딱지를 떼야 합니다. 딱지를 떼게 되면 운전자는 교통에게 ‘근거’를 요구하게 되는데, 이때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붙이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좌파나 우파로 규정이 됩니다.

이를 ‘딱지붙이기’라고 하는데 박정희독재가 써먹은 ‘빨갱이 딱지’가 유명합니다.

여기서의 문제는 ‘이념적 동질성’의 획득입니다. 좌파든 우파든 자기편끼리 전략적으로 행동통일을 위한 기준을 정해놓고 코드를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주의’라고 합니다.

세상은 매우 복잡합니다. 사안별로 일일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더욱 사태가 꼬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여러 문제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일괄타결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기편끼리 행동통일이 필요합니다. 그 행동통일을 위한 규칙이 곧 ‘주의’가 되는 거지요.

민족주의니, 국가주의니, 사회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며 온갖 주의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이 주의라는 것이 그래도 제법 쓸모가 있는 것이 뭐가 잘못되면 ‘무슨주의’ 때문이다 하고 떠넘기는 방법으로 책임추궁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주의’라는 것이 없다면 피아간에 행동통일이 되지 않아, 얽히고 설켜서 도무지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일이 잘못되어도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거죠.

우리는 흔히 여당과 야당이 맨날 싸운다고 혀를 끌끌 차지만 실은 정치가 제대로 되려면 싸워야 합니다. 이는 기업이 품질로 경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이 담합을 하면 소비자가 죽어나듯이 여야가 ‘형님 좋고 매부 좋고’ 이렇게 되면 유권자만 죽어납니다.  

시행착오에 따른 오류시정을 하기 위해서는 책임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도록 피아간에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고, 자기편끼리는 행동통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이념타령이 알고보면 상당히 쓸모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의놀음’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그 ‘주의’가 공동체에 요구된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점차 진리에서 멀어진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경제 목적으로 채택된 게임의 룰’을 의미하고, 사회주의는 ‘공동체적 목적에 따라 채택된 게임의 룰’을 의미하는데 이념적 동질성을 획득하기 위해, 곧 자기편끼리 정치적 코드를 맞추기 위해 편한대로 왜곡하다 보니 자본주의고 사회주의고 간에 점차 종교를 닮아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세상은 매우 복잡합니다.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물어야 하는데, 무식하게 이걸 뭉뚱그려 한꺼번에 일괄타결로 해결하려다 보니 이념이 만병통치약이 된거지요.

좌파든 우파든 이름에 ‘파’자가 붙었다는 것은 행동통일과 공동보조를 의미합니다. 즉 자기편들끼리 짜고치기 위하여 일정부분 왜곡이 들어간 가짜라는 거지요.

예컨대 군대에서 병사들이 제식훈련을 하는데.. “양팔간격으로 벌려”를 실시하기 위해 기준을 세울 때, 보통 한쪽 귀퉁이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세웁니다. 가장자리에 있어야 병사들의 눈에 잘 띄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이념적 동질성을 획득하기 위해 행동통일을 요구하면, 좌든 우든 극단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좌에서는 항상 극좌가 득세하고 우에서는 항상 극우가 득세하는 거죠.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반드시 나쁜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만약 중간에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세운다면 우왕좌왕 해서 죽도 밥도 안됩니다. 어떤 변화의 시점에는 좀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강하게 밀어붙여줄 필요가 있는 거에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념적 왜곡이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신당세력을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좀 더 강경하게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양보나 타협 이런거 안좋습니다.

작년에 노무현도 그랬지만 1퍼센트의 타협가능성도 없다고 말해야 진짜로 타협이 됩니다. 정치는 타협의 예술입니다. 그러나 타협하려면 양보할 카드를 미리 축적해놔야 합니다. 그러니 곧 죽어도 강경하게 가야 나중 양보할 건수가 얻어지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정치적인 포지셔닝의 이유로 이념적 태도는 항상 진리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재빨리 원위치 하는 포지션 변경을 망설여서 안됩니다.

하여간 히딩크라면 16강이 목표라도 “문제없다. 4강 가자” 하고 선수들을 다그치듯이 전략적인 오버가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노무현대통령이 ‘내년 총선 져도 괜찮다’고 호언하고 있는데 새가슴 강준만이 들으면 재앙이라고 푸념하겠지만 정치는 원래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정리하면..

- 선악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이해관계의 조정’으로 보라.
- 문제의 해결 혹은 문제해결능력의 향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라.
- 역사와 문명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보라.
- 자본주의를 논할 때는 최적화의 관점에서 보고 사회주의를 논할 때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라.
- 이념적 동질성의 획득을 위한 전술적 오버를 마다하지 말라.

이 모든 논의의 본질은 ‘인류의 문제해결능력의 향상’에 있습니다. 인류는 전체적으로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게임이 한 스테이지를 돌파할 때 마다 난이도를 높여가듯이, 우리는 좀 더 세련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려 하는 것입니다.

요즘 ‘기업하기 어렵다’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재벌들은 기업하기 어렵게 만들어놔야 전문경영인 체제로 갑니다.(중소기업은 좀 봐줘야 합니다.) 원화를 절상해서 수출이 잘 안되게 해놔야 재벌들이 기술개발을 합니다.

재벌들 기업하기 편하게 해주면 기술개발 안하고 부동산투기나 합니다. 좋은게 결코 좋은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청업체 쥐어짜서 편하게 돈버는 길이 있는데 미쳤다고 전문경영인체제 하고 기술개발 합니까?

진보주의자들이 날뛰어서 세상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듭니다. 가면 갈수록 점점 적응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됩니다. 기업해먹기 어렵게 만들고, 사기쳐먹기 어렵게 만들고, 투기해먹기 어렵게 만들고, 뇌물 받아먹기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불평불만인 사람도 많겠지만 한편으로 더욱 세련된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적응 못하면 뒷줄로 밀려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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