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출발점과 진행과정과 도착점이 있다. 과녁은 화살의 도착점이다. 사물은 사건의 도착점이다. 명사는 동사의 도착점이다. 사건은 머리와 꼬리가 있다. 머리가 꼬리에 앞선다. 이것이 인과율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과율을 시간의 문제로 좁게 해석하는 오류를 저질러 왔다. 공간으로 보면 전체가 부분에 앞선다.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담을 수 없다. 대부분의 오류는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으려고 억지를 쓰고 용을 쓰고 떼를 쓰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릇 깨진다. 사건은 방향성이 있다. 우리는 큰 틀에서의 방향만 판단하면 된다. 어떻게든 첫 단추는 바르게 꿰어야 한다. 그다음은 믿음을 가지고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판을 키워야 한다. 더 많은 세력을 가담시켜야 한다. 장기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끝까지 가면 이길 사람이 이긴다. 쫄지 말자. 걱정할 이유는 없다. 곰이 쫓아가면 곰보다 한 걸음 앞서면 된다. 많은 경우 동료보다 한 걸음만 앞서면 된다. 바둑은 반집만 앞서도 된다. 앞선 상태를 유지하면서 변수를 줄이면 된다. 판을 단순화 시키면 된다. 처음에는 잔머리를 굴려 변수를 추가하는 쪽이 이긴다. 요령과 꼼수가 먹힌다. 사건은 기승전결로 흘러간다. 유체가 강체로 바뀐다. 내부에 축과 대칭이 만들어진다. 축구장이 견고해진다. 꼼수를 부려봤자 축구장이 반대쪽으로 기울어서 원위치 된다. 전투가 무르익으면 각자 아껴놓은 예비대를 투입한다. 판이 커져서 나도 상대도 더 이상 추가로 투입할 자원이 바닥나면 반집이라도 앞서 있는 쪽이 이긴다. 어떻게든 반집의 우세를 반들어라. 변수를 줄이고 버텨라. 그러면 이긴다. 사건은 사물에 앞선다. 사건이라는 활이 사물이라는 화살을 쏘는 것이다. 혹은 움직이는 사건의 화살이 고정된 사물의 과녁에 꽂히는 것이다. 사건은 동이고 사물은 정이다. 동이 정에 앞선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정에다 조치하려고 한다. 동이 움직여서 조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만만한 정을 잡아먹으려 하다가 동의 되치기에 당하는 것이다. 동에는 동으로 맞서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 돌 하나 잡아먹지 말고 행마로 행마를 막아야 한다. 고수는 손빼기를 잘한다. 상대의 도발을 무시하고 다른 곳에 새로운 국면을 여는 자가 승리한다. 후수를 두지 말고 선수로 쳐들어가야 한다. 원인은 결과에 앞선다. 원인은 시간을 보는 것이다. 공간을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전체는 부분에 앞선다. 전체는 공간이다. 고립된 곳을 피하고 연결된 곳을 노려야 한다. 전체는 연결이고 고립은 단절이다. 막다른 곳을 피하고 네거리에 가게를 열어야 한다. 대칭된 둘의 랠리는 반드시 축을 거쳐서 진행한다. 항상 축을 거쳐가므로 축이 이득을 보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두 사람의 가운데 끼어 있으면 덜 춥다. 최소 체온을 절약하는 이득이 있다. 전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축을 장악해야 한다. 축은 대칭에 앞선다. 대칭은 천칭저울의 두 접시다. 축은 밸런스의 축이다. 대칭은 갖추어야 할 요건에 불과하고 본질은 축을 움직이는 것이다. 축을 만드는데 대칭이 필요하다. 대칭은 답이 아니라 절차에 불과하다. 상대의 공격에 방어로 대칭시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시간을 벌고 축을 장악할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상대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는 단세포적인 대칭행동은 하수의 것이다. 뭐든 안티를 걸고 일단 반대하고 보는 것은 상대의 카드를 알아내기 위한 응수타진은 될지언정 그걸로 싸움을 이길 수 없다. 세 사람이 사과를 하나씩 나눌 때 방향전환을 잘못하면 가운데 사람이 하나를 더 가진다. 방향전환은 중앙을 통과하기 대문이다. 많은 정치게임이 지렛대를 장악하고 축을 차지하려는 포지셔닝 게임이다. 진보는 보수에 앞선다. 진보는 동이고 보수는 정이다. 진보는 이게 아니다 싶으면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아이디어를 폐기하면 된다. 보수는 뭔가 주장하는게 없기 때문에 그것을 폐기하기도 불가능하다. 오늘날 진보가 헤매는 이유는 진보진영 안에 형성된 기득권 엘리트가 시행착오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보수화 되었기 때문이다.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민중의 개혁시도에 번번이 발목을 잡아왔다. 선은 악에 앞선다. 선은 사람을 연결하고 악은 그 연결을 끊는다. 공자는 노자에 앞선다. 공자는 의리로 사람을 연결하고 노자는 허무로 그 연결을 끊는다. 전략은 전술에 앞선다. 전략은 최후의 대회전을 벌일 전장을 결정하는 것이고 전술은 주어진 전장 안에서 답을 찾는 것이다. 명장은 전술적인 패배를 이용하여 반드시 아군이 이기는 구조의 전장으로 적을 달고와서 이길 수밖에 없는 승부를 벌여서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킨다. 전술에서는 이겨봤자 상대가 승복하지 않으므로 의미가 없다. 전술은 상대가 역이용할 수 있으며 적에게 패배하면서 배운 전술을 아군이 역으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 마이너스는 플러스에 앞선다. 이쪽의 마이너스가 저쪽으로 흘러가서 플러스가 된다. 마이너스는 내가 결정할 수 있고 플러스는 상대와 사전에 합의해야 한다. 거지가 동전을 플러스 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는게 아니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여서 깡통에 동전과 지폐가 쌓이는 것이다. 반대로 적선하는 사람이 지갑에서 마이너스 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한다. 누군가의 마이너스가 먼저 작동해야 다른 사람의 플러스가 된다. 아버지의 지갑이 먼저 열려야 아들의 돼지저금통이 무거워진다. 포석이 행마에 앞선다. 행마가 끝내기에 앞선다. 앞서는 쪽이 더 많은 주변과의 연결라인을 가진다. 바둑판이 메워지면 어디에 두든 주변과의 연결이 없다. 좋은 목은 이미 다 차지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인식에 앞선다. 인간의 행위는 자연의 존재를 복제하는 것이다. 자연의 존재가 화살이라면 인간의 뇌는 과녁이다.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복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모방할 뿐이다. 자연에는 순리가 있고 그 순리를 따라야 한다. 인간의 삶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환경이라는 바둑판 안에서 나의 둘 곳이 정해지는 것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실존은 환경과의 얽힌 존재이며 본질은 인간이 의미부여한 것이다. 인간은 본질을 찾으려고 양파껍질을 까지만 버려진 양파껍질의 방향과 순서가 찾아야 할 본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실존을 취하면 본질은 따라온다. 본질을 취하면 실존은 사라진다. 실존에는 액션이 걸려 있으며 인간은 거기서 액션을 빼고 남는 것을 본질이라고 착각한다. 뭔가 건더기를 찾아봤자 에너지가 없으므로 쓸모가 없다. 닭은 달걀에 앞선다. 닭은 전체고 달걀은 부분이다. 닭은 달걀을 낳지만 달걀은 놔두면 썩는다. 달걀이 자라서 닭이 되는게 아니고 달걀 + 에너지가 닭이 되는 것이다. 시간적 선후만 보지말고 공간의 방향을 살펴야 한다. 창은 방패에 앞선다. 창은 투창수의 에너지가 더해져 있지만 방패는 그냥 방패다. 투창수는 방패가 뚫릴 때까지 반복하여 창을 던지므로 결국 창이 이긴다. 창이 이겨야 끝나는 게임이다.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리가 자유에 앞선다. 인간은 자유와, 평등과, 정의와, 행복을 주장하지만 자유가 없으면 게임에 참여할 수 없고,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출발선에 평등하게 설 수 없으며, 선수로 뛰지도 않았는데 심판이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지도 않는다. 행복은 게임이 끝나야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상호작용의 게임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나간 사람의 몫은 있어도 자는 사람의 몫은 없다. 의리가 사람을 연결시켜 게임에 참여하게 한다. 의리가 모든 것의 어머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