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입니다. 공격수는 일원론을 좋아하고 수비수는 다원론을 좋아한다. 공격하는 쪽은 지형이 단순한 평원을 좋아하고 방어하는 쪽은 지형이 복잡한 산악을 좋아한다. 강자는 일원론을 좋아하고 약자는 다원론을 좋아한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큰길을 좋아하고 작은 일을 하는 사람은 뒷길을 좋아한다. 자기소개가 되면 좋지 않다. 나는 다원론이 좋다는 말은 내가 작은 일을 하며 뒷길로 다니는 약자이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우승을 하려고 일원론을 좋아하고 모르는 사람은 참가상이라도 받으려고 다원론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원론을 좋아한다. 다수는 약자이고 아는게 없는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교주는 이원론을 좋아하고 무속인과 주술사는 다원론을 좋아한다. 사이비 교주는 사람을 제압할 의도로 흑백논리 이원론을 구사하고, 점쟁이는 아무 말이나 마구 투척해서 그중에 아무거나 하나만 맞아라 하고 다원론을 좋아한다. 구조론에 흥미를 느끼고 찾아왔다가도 '뭐야 일원론이잖아.' 하고 뜨악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진리를 피해 잽싸게 도망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약자에 대한 위로다. '네 잘못이 아냐.' 이런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이다. 구조론이 제공하는 것은 승자에게 필요한 기술이다. UFO도 있고, 초능력도 있고, 초고대문명도 있고, 외계인도 있고, 귀신도 있고, 악마도 있고, 요정도 있고, 사탄도 있고, 영혼도 있고, 유령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없다. 하나의 정답은 존재가 있고 만 가지 오답은 존재가 없다. 사람들이 괴력난신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더한 바보를 찾으면 괴력난신으로 제압하여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 그들은 구석에 숨어서 작은 권세를 부리려고 귀신을 섬기며 그것을 다원론으로 포장한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는 없다. 있다 해도 독립해 있지 않고 딸려 있다. 다른 것에 빌붙어 있다. 그것은 없는 것이다. 빛은 광자가 자연에 있고 그림자는 인간의 관념 속에 있다. 빛의 부재를 그림자로 표현할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빛이다. 빛은 밝기를 조절할 수 있고 그림자는 조절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다루어야 한다. 나무에 숨으려는 새들은 다원론을 좋아한다. 다양한 가지에 숨을 수 있다. 나무를 베려는 나뭇군은 일원론을 좋아한다. 한 방에 나무를 쓰러뜨려야 한다. 정답은 일원론이다. 통제가능성이 판단기준이다. 일원은 통제할 수 있고 다원은 통제할 수 없다. 지식은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지 하지 않고 도망치려는게 아니다. 지식은 원래 일원론이다.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있으니 이원론이다. 그런데 OS 안에 프로그램이 있고, 그 안에 파일이 있고, 그 안에 정보가 있다. 정보도 1바이트 단위로 잘게 쪼개진다. 이러한 연결의 일방향성을 보면 일원론이다. 이걸 일일이 열거하면 다원론이다. 존재란 무엇인가? 사건의 연결 그 자체다. 일원론이 존재다. 이원론은 인간과 존재의 대결이다. 다원론은 그 결과다. 인간은 처음 다원에 서서 구경하다가, 이원으로 게임에 참여하며, 일원의 전술로 승리한다. 야구를 모르면 프로팀이 열 개가 있고, 야구장에 가면 응원할 팀은 두 개로 좁혀지고, 선수로 뛰면 내가 참여할 팀은 하나다. 그대를 초대한 문명의 게임에 선수로 뛰지 않겠다면 이 글을 읽을 이유가 없다. 방향성에 목숨을 걸어라 세상에 개소리가 너무 많다. 일일이 반박해 주려니 그것도 품이 든다. 몰아서 한 방에 해결하자. 사건은 방향성이 있다. 방향이 맞으면 맞는 것이고 방향이 틀리면 틀린 것이다. 시시콜콜 따져봤자 입만 아프고 큰 틀에서의 원칙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방향이 안 맞으면 좌고우면 하지 말고 과감하게 기각시켜야 한다. 이론적 확신을 가지고 담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방향성은 복잡을 단순화 시킨다. 심리학을 물리학으로 바꾸고 물리학을 수학으로 바꾼다. 수학은 절대로 맞다. 방향성은 사건이 진행될수록 외부 변수가 밸런스에 반영되어 내부상수로 바뀌는 것이다. 방향이 안 맞는데도 현장에서 먹히고 있다면 외부 영향에 의한 교란인데 그래봤자 오래 가지 못한다. 그 경우는 판을 키우면 된다. 총력전, 전면전, 장기전으로 가면 방향이 옳은 쪽이 이긴다. 천하 단위, 문명 단위, 역사 단위의 큰 싸움으로 가면 진보가 이기고, 정의가 이기고, 선이 이긴다. 방향은 둘이다. 자체 엔진으로 가느냐 외력에 의존하느냐다. 자기 실력으로 가느냐 컨닝으로 가느냐다. 문제는 사건이 점점 커진다는 거다. 처음에는 운이 좋은 놈이 이기지만 나중에는 실력이 뛰어난 넘이 이긴다. 서구가 동양을 이긴 것은 애초에 문명이 그쪽에서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서구가 운이 좋았다. 중세에 동양이 잠시 추월한 것은 중국이 홀로 독주하여 주변과의 에너지 낙차가 컸기 때문이다. 변방에서 인물이 나는 격이다. 다시 서구가 추월한 것은 북유럽 문명, 인도 문명, 아프리카 문명, 아랍 문명, 지중해 문명이 하나의 서구 문명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동양은 주변 문명이 없이 고립되었기 때문에 2단로켓에 점화할 수 없었다. 결국 문명의 실력대결로 흘러가면 다시 동양이 이길 수 있는 요인이 많다. 동양은 서구 문명을 흡수하여 낙차를 만들어내지만 서구는 동양 문명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가 동양의 의리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존재는 사건이고 사건은 동적 환경이다. 판이 움직이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은 판이 움직이므로 차차 밸런스에 반영되어 어느새 내부가 되어버린다. 처음에는 정치인이 외부에서 판을 흔들지만 나중에는 국민이 변해서 그 힘을 흡수해 버린다. 태극기가 처음에는 외부의 변수였는데 지금은 촛불의 맞대응에 의해 내부의 상수가 되었다. 외부변수는 지렛대의 원리가 작용하므로 힘이 있는데 내부상수는 힘이 없다. 지렛대의 손잡이는 길수록 힘이 있다. 외부변수는 거리가 멀 수록 힘이 있다. 윤석열도, 안철수도 처음에는 외부의 변수라서 힘이 있었는데 지금은 내부상수가 되어 힘을 잃었다. 원래 그렇게 된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된다. 저쪽에서 형을 데리고 오면 이쪽도 형을 데리고 온다. 저쪽에서 삼촌을 데려오면 이쪽도 삼촌을 데려온다. 외부의 영향이 일시적으로 먹히지만 곧 대칭원리에 의해 교착된다. 더 이상 외부에서 데려올 자원이 없으면 실력대로 간다. 이차대전은 추축국과 연합국이 각자 외부에서 자기 편을 데려온 것이다. 결국 이길 나라가 이겼다. 한국이 뜨는 이유는 한국의 문화가 멀리서 작용하는 지렛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일본이 뜬 이유는 지금 한국이 뜨는 이유와 같다. 그런데 반영되었다. 서구는 일본문화에서 빼먹을 것을 빼먹었다. 한국은 아직 사골을 끓이면 나오는게 있다. 새로운 것이 일시적으로 붐을 이루지만 차차로 밸런스에 반영되어 행운대결 끝나고 결국은 실력대결로 간다. 어리석은 자는 막연히 외부의 도움이 기적을 연출해주기 바라고, 천군만마가 되어주기 바라며, 센세이션을 일으키길 바라고, 주술을 걸고, 도박을 하고, 요행수를 바라고, 꼼수를 쓰고, 감성팔이에 이미지 쇼로 분주하지만 의미 없다. 그런 관종짓은 잠시 먹히다가 밸런스에 반영되어 사라진다. 결국 정공법으로 이기고 실력으로 이겨야 한다. 전쟁이 장기화 되면 속임수를 쓰는 손자병법이 지고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이기는 오자병법이 먹힌다. 확률과 같다. 주사위를 계속 던지면 큰 수의 법칙이 적용된다. 소인배의 각종 음모론에, 괴력난신에, 유에프오에, 초능력에, 텔레파시에, 귀신에, 도깨비, 허깨비가 다 센세이션을 노리는 것이다. 그게 오래 못 간다. 경마장에 처음 간 사람이 초심자의 행운에 기대는 것과 같다. 그런데 큰 수의 법칙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 과학을 믿고 수학을 믿고 진리를 믿고 방향성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사건이 커지면 엔트로피가 작동한다. 엔트로피는 자원을 한 곳에 몰아주는 유체의 성질이다. 중간 칸막이는 갑자기 사라지고 양의 피드백이냐, 음의 피드백이냐에서 전체의 향방이 결정된다. 코로나19 감염재생산지수가 1보다 크냐 작으냐가 집단면역을 결정한다. 본질이 되는 밑바닥의 하나가 전부 결정한다. 다른 잡다한 변수는 쳐다볼 필요도 없다. 기레기가 국민의 눈을 가리려고 중간에 온갖 칸막이를 설치하여 철통같이 막아놨는데 한꺼번에 확 뚫려버리는게 엔트로피의 유체성질이다. 수압이 걸리듯이 닫힌계 내부에 압이 걸리기 때문에 바늘구멍만 한 틈이 있어도 미친 듯이 빠져나간다. 방향은 하나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여러 갈래가 큰 줄기로 통합된다. 군대가 좌군과 중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출발하지만 적국의 수도에서 모두 모인다. 결국은 일원화 된다. 고수는 변수를 줄이는 마이너스법을 쓰고, 하수는 변수를 늘리는 플러스법을 쓴다. 정답은 마이너스다. 변수를 줄여야 중앙에서 모두 모인다. 하수가 꼼수를 플러스 할수록 이미 반영된 부분과 충돌하므로 더 나빠진다. 안철수가 지지자 한 명을 영입하면 기존 지지자 한 명이 빠져나간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 밑바닥의 본질 하나만 붙잡고 방해자를 제거하는 뺄셈정치가 정답이다. 국민 하나만 붙잡고 정치꾼은 뺄수록 좋다. 대군에는 병법이 필요 없다고 했다. 나폴레옹의 말이다. 한신의 다다익선과 같다. 롬멜도 한니발도 항우도 초반에 먹히는데 갈수록 먹히지 않는다. 전쟁의 규모가 백만 단위로 커지면 기습이나 매복을 피하고 정규전을 잘해야 한다. 하수는 외부 변수를 늘려서 지는 싸움을 도박으로 이기려 하고, 고수는 외부변수를 줄여서 어차피 이기는 싸움을 반집 차이로 이긴다. 그런데 그 반집이 철옹성이다. 한국인 한 명과 중국인 한 명이 있다면 누가 한국인이고 중국인인지 알 수 없다. 한국인 백 명과 중국인 백 명은 확실히 구분된다. 세상은 사건이고 사건은 기승전결로 전개하면서 점점 커진다. 변수는 상호작용 과정에 용해된다. 폭로전이 먹히지 않는다. 꼬투리 하나 잡았다고 길길이 날뛰는 사람 많지만 그게 초반에 반짝할 뿐 뜻대로 안 된다. 음모론도 그렇다. 초반에는 작은 의혹의 제기가 큰 반향을 일으키지만 갈수록 시들해진다. 우리가 초반에 잠시 먹히는 꼼수, 폭로전, 감성팔이, 이미지 쇼, 돌출행동, 기상천외한 아이디어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한다. 설사 그런 것으로 떴다고 해도 뜬 다음에는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한다. 변수를 투입할수록 백신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발악을 할수록 수렁에 빠진다. 내부에서 자력으로 이겨야 진짜다. 극한의 법칙을 적용하자. 11명이 뛰는 축구시합에서 골이 더 많이 터지게 하려면 선수의 숫자를 늘려야 할까, 줄여야 할까? 헷갈린다. 1명이 뛰는 시합과 백 명이 뛰는 시합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양팀 각 한 명이 뛰면 승부차기다. 백 명이 뛰면 골이 안 터진다. 프로야구 승률이 헷갈릴 때다. 승수가 같을 때 5할 이상은 시합을 많이 한 팀이 지고 있고, 5할 이하는 반대다. 2승 1패와 99승 98패를 비교하면 된다. 이것은 수학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 혹시 모르잖아 하고 막연한 기대를 하는 사람이 많지만 모르긴 뭘 몰라. 아닌건 아닌 거다. 수학은 속일 수 없다. 그런데 뭐든 수학으로 바꿀 수 있다는게 방향성이다. 방향성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중간에 잠시 흔들리게 되지만 고비를 넘어야 한다. 구조론적 사유 생물의 변화가 다양하지만 진화라는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인간의 행동이 다양하지만 진보라는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우주 안에 변화가 다양하지만 밸런스라는 한 방향으로 수렴된다. 모든 은하는 한 방향으로 회전한다. 가끔 역주행 하는 것들이 있지만 시스템과 충돌하므로 오래가지 못하고 큰 흐름에 흡수된다. 자연은 톱니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이다. 세력과 동떨어져 혼자 노는 것은 없다. 있어도 일시적이다. 밸런스는 균형이지만 균형에 멈추지 않고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외력의 작용 때문이다. 그냥 균형에 만족한다면 폭풍에 쓰러진다. 팽이가 밸런스를 유지하려면 돌아야 한다. 그 반대는 없다. 역사가 진보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은 없다. 생명이 호흡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은 없다. 죽거나 아니면 전진하여 균형을 유지하거나다. 전진을 멈추면 균형력도 멈춘다. 구조론적 사유는 대칭의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추가되는 기세의 힘을 보는 것이다. 다음 단계를 미리보기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보다 아름다우며, 생명은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번식하며, 문명은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진보하며, 인간은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매력을 보인다. 우리는 균형에서 멈추지 않고 의리를 추가해야 한다. 그것이 외력을 극복하며 치고 나가는 자체 엔진이 된다. 다음 게임에 대비하는 지렛대가 된다. 준 만큼 받겠다는 소인배의 태도를 버리고 의리를 저축해야 한다. 구조론적 사고는 세상이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자연은 균형에서 끝나지 않고 매력을 발산하여 그대를 끌어당긴다. 자연은 인간을 유혹하고 초대한다. 그렇게 톱니를 맞물리게 한다. 세상은 상하, 좌우, 전후, 고저, 장단과 같은 대칭을 이루고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자연은 전방위로 대칭되어 있다. 문제는 플러스알파다. 큰 것이 있으면 작은 것도 있다는 균형에서 끝내지 말고 큰 것과 작은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매력이라는 가속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외부로 여분의 촉수를 내밀고 있다. 계속 게임에 가담해 오는 것이 있다. 사건의 기세, 자연의 효율, 시장의 이윤, 사회의 권력, 인간의 의리다. 인간은 대칭을 통해 사유한다. 문제는 뇌가 한꺼번에 두 가지 생각을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대칭을 찾으면 거기에 붙잡혀서 다른 대칭을 보지 못한다. 관측자의 개입이 문제다.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인 자신을 개입시키는 순간 사유는 망한다. 물에 빠진 사람은 구조하려는 사람의 목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관측자는 무의식적으로 관측대상을 붙잡는다. 곰이 연어를 잡아서 옆구리에 낀다. 한 마리를 옆구리에 낄 때마다 먼저 잡힌 연어 한 마리가 빠져나간다. 하나의 관점에 붙잡혀 다른 관점을 보지 못한다. 관점의 이동을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칭의 균형 상태에서 또 다른 대칭을 찾아야 한다. 수평대칭에 층위를 높이는 수직대칭이 있다. 항상 배후에 하나가 더 있다. 메커니즘은 두 변화가 하나의 축에 꿰어 나란한 것이다. 나란한 두 변화가 상쇄되어 안정된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변한다. 공방을 벌이는 두 팀은 변하지만 주최측은 변하지 않는다. 주최측은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주최측이 룰을 바꾼다. 시합 중에는 바꾸지 않지만 시합이 끝나면 바꾼다. 주최측이 기계적인 공정만 외치면 룰의 약점을 파고들어 반칙하는 팀이 계속 이겨서 흥행이 망한다. 새로운 반칙이 등장할 때마다 주최측이 룰을 개정하여 흥행을 끌어내야 한다. 그것이 진보다. 포병이 대포를 쏜다면 장약의 증가와 사거리의 증가는 비례한다. 둘이 나란히 간다. 둘 사이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대포의 고각이다. 바로 그것이 변한다. 나란히 가는 장약의 변화와 사거리의 변화에서 변하지 않는 고각을 변화시켜 포병은 명중탄을 쏜다. 두 개의 바퀴가 하나의 축에 잡혀 있다. 바퀴는 돌아도 축은 돌지 않는다. 그런데 차동기어는 축을 돌린다. 디퍼렌셜 기어를 이용하여 자동차가 커브를 도는 것이다. 바퀴도 변하고 바퀴축도 변하지만 도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도로가 경사져 있는 경우도 있다. 고속도로의 커브 구간이다. 모든 구조에 조절장치라는 플러스알파가 숨어 있어서 맞물리는 톱니의 간격을 조절한다. 구조로 엮여서 나란히 가는 두 변화 중에서 불변의 하나를 찾고 다시 그것을 변화시킬 때 우리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우리는 여야의 공방에만 주목하고 축구장을 기울이는 생산력의 변화에 대해서는 모르쇠다. 그것이 변한다. 인구변화가 축구장을 기울이기도 한다. 원래 50대는 보수였다. 50대가 진보로 돌아선 이유는 이전 세대와의 학력 격차 때문이다. 50대 대졸파가 60대 중졸파에게 고개 숙이기 싫다. 이런 부분은 언론의 레이다에 잘 포착되지 않으므로 숨은 플러스알파가 된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와 기세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사건의 머리와 꼬리 사이에 우리가 찾아야 할 방향성이 있다. 거기에 포착해야 할 숨은 플러스알파가 있다. 밸런스를 이루고도 남는 것이 있다. 사건이라면 기세가 있고, 자본이라면 이윤이 있고, 사회라면 권력이 있다. 동료에게는 의리가 있고 개인에게는 매력이 있다. 톱니들의 맞물림이다. 수학이라면 순간변화율이고, 물리학이라면 관성력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제라도 머리에 자리잡고 꼬리를 바라봐야 한다. 원인을 장악하고 결과를 바라봐야 한다. 전체에 자리잡고 부분을 바라봐야 한다. 공자에 자리잡고 노자를 바라봐야 한다. 전략에 자리잡고 전술을 바라봐야 한다. 합리에 자리잡고 실용을 바라봐야 한다. 마이너스에 자리잡고 플러스를 바라봐야 한다. 정상에 자리잡고 기슭을 바라볼 때 비탈의 경사를 따라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플러스 알파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 조절해야 할 에너지 낙차는 그곳에 있다. 대개 중도니 중용이니 하며 중간에 어중간하게 자리잡고 대칭된 양쪽의 눈치를 보니 안 되는 것이다. 축에 자리잡고 대칭된 양쪽을 동시에 통제해야 한다. 적절히 축구장을 기울여서 대결하는 두 팀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 시장을 장악하고 수요와 공급을 동시에 조절해야 한다. 중간에 끼지 말고 2층으로 층위를 올려야 한다. 중매쟁이가 되지 말고 주례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좌우의 수평적 균형은 생각하면서 경중의 수직적 통제는 생각하지 못한다. 저울은 콤파스와 달리 수평의 대칭을 수직으로 통제한다는 점이 다르다. 배의 바닥짐과 같다. 밸러스트는 좌현과 우현의 수평적 대칭을 수직으로 통제한다. 층위가 다르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다. 그 차이가 숨은 플러스알파다. 부분의 합은 죽어 있고 전체는 살아있다. 산 것은 죽은 것보다 크다. 거기에 생명성이라는 플러스알파가 있다. 부분의 합은 떨어져 있고 전체는 연결되어 있다. 사건의 톱니들이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기세가 있고 흐름이 있다. 사건은 결대로 간다. 우리는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선제대응할 수 있으니 그것이 지식의 쓸모가 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면 코어는 회음부다. 상체와 하체의 중간지점이 코어다. 투수는 왼발을 내딛어서 회음부를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공을 던진다. 다시 축을 어깨와 팔꿈치를 거쳐 손목으로 이동시킨다. 그때마다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영역이 좁아진다. 그게 방향성이다. 좁혀질수록 낙차가 크다. 충분한 낙차를 얻으려면 인류 단위, 역사 단위, 천하 단위, 문명 단위로 크게 시작해야 한다. 투구동작에 들어가면 한 번 정해진 방향은 바꿀 수 없다. 사건이 기승전결로 진행하며 대칭을 갈아탈 때마다 축을 옮겨가는데 드는 비용 때문에 구조손실이 엔트로피 증가로 나타난다. 의사결정에 참여하지 않고 노는 자원의 증가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치면 누가 비켜줄 것인가? 누가 변해야 하는가? 머리는 변하지 않고 꼬리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머리에 의지하여 꼬리를 변화시킨다. 변하지 않는 것에 의지하여 변화를 일으킨다. 게임과 같다. 이기는 자와 지는 자가 있다. 이기는 것의 불변에 의지하여 지는 것이 변한다. 이기는 것이 원인이면 지는 것은 결과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방향성이 있다. 보통은 방향을 헤아리지 못한다.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왼발은 오른발을 탓하고 오른발은 왼발을 탓한다. 진보는 보수를 탓하고 보수는 진보를 탓한다. 진보와 보수를 동시에 아우리는 국민의 눈높이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다. 정치판이 이렇게 된 것은 국민이 변덕을 부렸기 때문인데 말이다. 국민이 변덕스러운게 아니고 사실은 상호작용의 증대라는 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 일관된 방향성을 읽어내야 한다. 국민은 자신에게 더 많은 역할을 주는 정당에 투표한다. 여당이나 야당이 변한게 아니고 생산력이 변한 것이다. 산업 생산력이 변하면 보수가 득세하고 문화 생산력이 변하면 진보가 득세한다. IT는 문화이면서 산업이다. 한류는 확실히 문화다. 간발의 차로 진보가 유리한 지형임을 알 수 있다. 게임과 지렛대 모든 사유의 최종보스가 되는 궁극의 논리는 게임의 논리다. 게임은 시스템의 상호작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한 말이다. 게임에는 주최측이 있다. 상호작용에는 랠리가 있다. 랠리는 공격과 수비 양쪽을 동시에 틀어쥐고 오래 살려고 한다. 랠리를 죽이는 팀은 패배한다. 주최측을 죽이는 팀은 패배한다. 주최측은 흥행을 원한다. 프로야구를 망하게 하려는 팀이 있다면 KBO는 룰을 바꿔서라도 그 팀을 제거한다. 게임에는 전략이 있다. 전략은 상대의 반응 여하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게임은 귀납이 아닌 연역이라는 점이 각별하다. 낚시를 해도 내가 먼저 밑밥을 던진다. 게임의 의미는 선제대응이다. 내가 먼저 기술을 건다. 귀납도 있는데 그것은 전략이 아니라 전술이다. 전술은 상대의 패를 보고 움직이므로 후수가 된다. 전략은 선수를 쳐서 애초에 내가 유리한 지점에서 싸우도록 판을 설계한다. 적을 유인하여 내가 반드시 이기는 지점까지 달고 온다. 전략은 선제대응이다. 인공지능이 기대에 못 미치는 이유는 인간이 질문하고 인공지능이 답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깔고 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먼저 인간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 전략이고 게임이고 연역이다. 미리 판을 짜놓고 상대를 끌어들이기다. 내쉬균형은 상대방의 패를 보고 움직이는 점에서 전술이다. 내가 판을 설계하고 내가 패를 나눠주는게 전략이다. 상대방에게는 칠땡이나 팔땡을 주고 나는 장땡을 잡는다. 우리는 판단에 따라 행위한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지렛대가 있어야 행위할 수 있다. 지렛대는 대칭의 축을 장악하는 것이다. 축을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의사결정할 수 있다.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는 나중에 정하고 일단 지렛대를 획득하는게 먼저다. 문제는 지렛대를 상대방에게서 조달하려 하는 점이다. 위험하다. 지렛대를 상대방에서 조달한다면 말려들 수 있다. 길들여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도대로 된다. 자체 엔진을 가져야 한다. 대칭의 좌우 날개에 위치하면 엔진이 없다. 축을 장악해야 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행위를 동기로 설명한다. 강아지는 보상을 주면 말을 듣는다. 착각이다. 강아지는 보상이라는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통해 의미를 알아채고 의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인간은 동기나 의도나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 아니고 지렛대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다. 지렛대를 손에 쥐면 전율한다. 뇌가 다음 단계를 예측하고 미리 에너지를 쥐어짜서 판돈을 올리기 때문이다. 물을 마시면 10분 후에 흡수되지만 뇌는 지금부터 시원하다. 뇌가 미래를 예상한 것이다. 뇌는 지렛대를 쥐면 미래를 예측하고 전율한다. 후끈 달아오른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흥분한다. 지렛대가 게임의 주도권이다. 인간은 욕망과 보상과 동기와 의도의 동물이 아니라 주도권과 지렛대와 의미와 기세와 의리와 전율의 동물이다. 전략의 동물이다. 욕망은 가짜고 의미가 진짜다. 지렛대는 변화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은 이기는 쪽이 지렛대를 쥔다. 그것이 법칙이다. 우리는 열역학 1법칙과 2법칙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지렛대를 확보한 셈이다. 변화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1법칙의 닫힌계와 2법칙의 방향성이다. 원하는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 욕망은 없다 심리학자들은 욕망이니 동기니 목적이니 보상이니 하는 단어들로 인간의 행위를 설명하지만 거짓말이다. 답변이 궁해서 그냥 지어낸 말이다. 남들이 물어보니까 뭐라도 대답을 해야겠는데 떠오르는 단어가 그것 뿐이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사랑, 정의, 윤리, 도덕 따위도 거짓이다. 그것은 행위의 결과에 따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해석이 들어간 것은 전부 가짜다. 어색하지 않게 말을 맞춘 것이다. 초등학교 운동회와 같다. 등수 안에 들면 상을 받지만 상을 받으려고 달리는 것은 아니다. 우등상 받으려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의미를 따르는 동물이다. 의미는 사건의 지렛대를 쥐는 것이다. 다음 게임을 내가 설계하는 것이다. 그걸 용이하게 설명하지 못하므로 그냥 우등상 받으려고 공부했다는 식으로 둘러댄다. 애초에 인간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동물이 아니다. 플러스는 가짜다. 마이너스가 진짜다. 인간은 환경과의 긴밀한 연결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의미다. 왜 인간은 그것을 하는가? 거기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의미를 잃으면 허무다. 허무가 스트레스를 주므로 환경과의 부단한 랠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편안하다. 썰매개는 달리는 동안 편안하다. 노름꾼은 패를 돌리는 동안 편안하다. 그런데 금 밖으로 밀어낸다. 무대에서 쫓겨난다. 오링되기 직전이다. 인간은 그저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유지하려고 할 뿐이며 이를 위해서는 의미와 기세와 권력이라는 지렛대가 필요하다. 임박한 게임의 종료를 앞두고 허무와 소외를 피해 의미와 기세로 다음 게임에 당당하게 초대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렛대는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한다. 이성을 만나면 가슴이 뛰는 것은 다음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호르몬이 나오고 열정이 끓어오르고 흥분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한다. 인간의 삶에는 기세가 걸려 있고 기세를 유지하려면 사건을 다음 단계로 연결시켜야 한다. 무의식은 알고 있다. 뇌는 알고 있다. 무의식은 당신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미리 판돈을 준비한다. 존재는 정靜이 아닌 동動이다. 동적환경의 불씨를 꺼트리면 안 된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서 뛰어내릴 수 없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것을 하는가? 대개는 다른 쪽이 막혔기 때문이다. 저쪽이 막혀서 이쪽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적인 동기가 아니고 물리적 이유다. 동기나 목적이나 욕망이나 보상이 아니다. 안철수는 왜 그러는가? 진중권은 또 왜 그러는가? 그들에게 무슨 욕망이 있는게 아니다. 반대쪽이 막혔기 때문이다. 몰리고 낚이고 치이고 휩쓸리고 빠지는 것이다. 할배들은 왜 계급배반 투표를 할까? 그들은 가부장이라는 말을 타고 있다. 알량한 동네권력이라는 말을 타고 있다. 달리는 말에서 내리지 못한다. 인지부조화다. 태도에 행동을 맞추다가는 죽는다. 여우는 신포도를 포기하는게 맞다. 낮은 곳의 포도는 남들이 다 훑어가고 벼랑 끝의 포도만 남아있다. 무리하면 절벽에서 떨어진다. 행동에 태도를 일치시켜야 목숨을 부지한다. 인간은 환경이라는 말을 타고 있다. 환경에 태도를 맞추는 것이 맞다. 말은 그냥 적당히 둘러대는 것 뿐이다. 운칠기삼이라 했다. 환경이 칠할이고 인간이 삼할이다. 답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다. 심리학자가 말하는 동기, 보상, 목적, 의도, 야망, 욕망은 인간 중심의 일방작용이다. 그게 있다 해도 3할의 비중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장악하고 판단하는 전략의 동물이다. 어떤 목표나 보상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그냥 자기 영역과 세력과 포지션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이 게임을 설계하는 지렛대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사결정의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때로는 핸들을 놓아야 하는데 놓지 못하므로 망한다. 지식인은 현명하게 핸들을 놓지만 무식인은 차라리 핸들을 쥐고 있다가 죽는게 낫다는게 사피엔스가 30만 년 진화과정에서 얻은 경험칙이다. 스님들이 노상 내려놓아라고 말하지만 제 손으로 핸들에서 손을 뗄 수 있는 노무현급은 거의 없다. 인간은 어디로든 가는 동물이다. 가려면 타고 갈 배가 있어야 하고 저어갈 노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영역과 세력과 포지션과 권력과 기세를 원한다. 플러스알파가 되는 매력이 필요하다. 환경이 타고 갈 배가 되고 권력의 지렛대는 노가 된다. 인간은 환경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상태에 머무르려고 한다. 도박판에 앉아 선을 쥐고 패를 돌리려고 한다. 상호작용의 분주함 속에 머무르려고 한다. 달리는 배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용을 쓴다. 운명의 파도가 덮치면 아는 사람은 매력을 이용하여 적절히 배를 갈아탄다. 모르는 사람은 마지막까지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 배와 함께 침몰한다. 형편없는 사람은 배 밖으로 튕겨나간다. 기세는 단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동기나 보상은 인간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내부의 기세는 인간을 움직인다. 관념은 인간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호르몬은 인간을 움직인다. 기세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이다. 호랑이가 인간을 움직인다. 차를 타고 있다면 차가 인간을 움직인다. 사건에 타고 있다면 사건이 인간을 움직인다. 환경을 타고 있으므로 환경과 맞물리는 정도에 따라 인간이 움직인다. 기세는 하나의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갈아탈 때 극대화 된다. 정권교체든 정권재창출이든 지도자를 갈아타는 것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기세가 올라 있다. 기세는 단에 있다. 단은 어떤 둘의 첫 만남이다. 견우와 직녀처럼 만나고 몽룡과 춘향처럼 만나야 한다. 거기서 방아쇠가 격발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단은 사건의 첫 단추가 되는 하나의 단서다. 사건의 연결이다. 기관차와 객차를 연결하듯이 덜커덩하고 연결될 때 인간은 전율한다. 그 순간 뇌는 에너지를 풀가동한다. 대중을 혐오하는 엘리트 좌파는 만나지 못한다. 엘리트가 연주자라면 대중은 악기다. 악기를 탓하는 연주자는 청중을 만나지 못한다. 단이 없으므로 기세를 얻지 못한다. 방아쇠가 격발되지 않는다. 사람을 차별하는 우월주의 우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만남을 거부하고 과거의 만남에 집착하므로 기세를 얻지 못한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처음 연결될 때 큰 울음을 토하며 단이 일어난다. 신대륙이 펼쳐지고 신천지가 열린다. 진정한 만남은 그곳에 있다. 찾아야 할 정상은 그곳에 있다. 정상에서 비탈을 따라 에너지 낙차가 결정된다. 하나의 만남이 또다른 만남을 복제하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기세가 일어난다. 비슷한 것이 모여서는 단이 되지 않는다. 포지션이 겹치기 때문이다. 결함있는 천재들이 서로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단은 이루어진다. 도원결의 하는 유비, 관우, 장비처럼 만나야 한다. 20대 시절의 잡스와 워즈니악처럼 만나야 한다. 부둥켜안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서퍼는 파도와 만나고, 기수는 말과 만나고, 노무현은 민중과 만나고, 연주자는 악기와 만나고, 배우는 관객과 만난다. 만나서 단을 이룬다. 하나가 만나면서 또 다른 만남을 잉태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는 왔던 길을 되돌아갈 때다. 했던 일을 다시 할 때다. 지름길 놔두고 둘러 갈 때다. 기세가 죽어서 힘들다. 풀이 죽어서 힘들다. 다음 단계가 연결되지 않아서 힘들다. 뇌가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으므로 힘들다. 의미가 아니고 허무라서 힘들다. 사건의 다음 단계를 만날 때 인간은 전율한다. 에너지가 업되는 것이다. 그다음 단계는 가본 적이 없는 신천지라야 한다. 가슴이 뛰고 호르몬이 쏟아진다. 그대는 첫 소풍, 첫 수학여행, 첫 데이트처럼 긴장하고 설레일 것이다. 단 지렛대를 가져야 한다. 지렛대는 권력이다. 길을 찾을 때는 나침반이, 소풍을 갈 때는 배낭이, 여행을 갈 때는 자동차가, 데이트를 할 때는 입고갈 옷이 필요하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의미다. 행복도 쾌락도 성공도 중요하지 않다. 고통도 좌절도 가난도 극복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오락가락 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기세다. 제자리에서 맴돌지 않고 다음 단계로 진도를 뽑는 의미다. 사건을 연결하여 다음 게임에 초대받을 때 인간은 전율한다. 그것이 의미다. 그 연결의 키를 내가 쥐고 있을 때 기쁨이 있다. 행복도 쾌락도 성공도 가짜고 전율함이 진짜다. 기쁨이 진짜다. 호르몬이 진짜다. 무의식이 진짜다. 에너지가 진짜다.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는, 마윈은, 손정의는, 저커버그는, 제프 베조스는 노력이나 운이 아니라 기세로 떴다. 그들의 공통점은 사건의 다음 단계로 가는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성공을 이루어 목표를 달성한게 아니고 하우스를 열어 게임의 주최측이 된 것이다. 노무현이 종로를 버리고 부산으로 내려간 것은 기세를 얻으려는 모험이다. 징기스칸은, 카이사르는, 알렉산더는, 나폴레옹은 노력이 아니라 기세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게임을 갈아탔다. 동료에게 역할을 나눠주고 자신을 복제했다. 단을 얻으려면 외부의 간섭이 없는 닫힌계를 만들어야 한다. 자궁을 만들어야 한다. 의리가 그것이다. 유비, 관우, 장비의 의리는 누가 파괴할 수 없다. 잡스와 워즈니악도 잘 나갈 때는 그랬다. 케미가 맞고 스쿼드와 포메이션이 갖추어졌다. 출루만 하면 번트를 대고 희생타를 쳐주었다. 처음 한 번 이기기가 어려울 뿐 상승부대가 만들어지면 기세의 힘으로 쉽게 승리한다. 노력은 내가 어쩔 수 없는 방해자가 있고, 운은 알 수 없는 확률에 의지하는데, 기세는 경쟁자보다 간발의 차로 앞서면 된다. 단을 이루기만 하면 된다. 단은 첨단이나 극단이나 말단이다. 단서를 쥐고 단초를 잡는 것이다. 선두에 서 있으면 뒤에서 밀어준다. 선두에서 표준을 만들면 궁물의 이익을 누리려고 다들 뒤에 달라붙어서 선두를 밀어 올린다. 빌 게이츠가 쉽게 흐름에 올라탔으니 파도를 타는 서퍼처럼 편하게 간다. 조문도 석사가의라 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아침에 동료를 만나면 의리는 저녁이 되기 전에 이루어진다. 만나는 순간에 포메이션은 완성되어 있다. 스쿼드는 만들어졌다. 단서를 쥐고 단초를 잡은 셈이다. 시스템이 작동을 개시하면 복제가 무수하다. 그 이후는 내 알바가 아니다. 진리는 자체 엔진의 힘으로 굴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