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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264 vote 0 2021.06.21 (20:55:06)

    결정론이 옳으냐, 자유의지가 옳으냐? 소크라테스 시절부터 시작된 논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한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논란이다. 인류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이큐가 떨어지는게 분명하다. 주체와 타자의 문제다. 주체가 이기느냐, 환경이 이기느냐? 인간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존재인가, 환경에 지배되는 수동적인 존재인가? 적극적인 공자의 길을 갈 것인가, 소극적인 노자의 길을 갈 것인가? 긍정하고 낙관할 것인가, 부정하고 회의할 것인가?


    문제는 이 물음이 결정론적 질문이라는 점이다. 질문에 함정이 있다. 자유의지가 결정되어 있다고? 결정론이구만. 자유의지가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그대는 완벽한 결정론자. 둘을 대칭시켜놓고 하나를 선택하도록 압박하는게 그 자체로 결정론적 사고방식이다. 결정론의 손을 들게 하는 유도심문이다.


    질문의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일단 그 자유의지의 주인이 되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인간은 존재할까? 이 부분에 그렇다 하고 못을 박으면 그게 결정론이다. 당연시 되는 전제를 깨야 한다. 그게 철학이다. 그런데 인간이 뭐지? 당신은 동물이잖아?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도 알고보면 동물이다. 동물 중에 일부가 인간다움을 획득하여 인간으로 점프하는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고 동물에게는 그것이 없으며 80억 목숨 중에 몇이나 인간인지는 애매하다.


    주체와 객체의 관계다. 누가 갑인가? 주체는 나고 객체는 환경이다. 누가 이기는가? 환경이 갑이면 결정론의 승리, 내가 갑이면 자유의지다. 그런데 인간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없으므로 자유의지도 결정될 수 없다. 결정론은 외부 환경이 결정되어 있고 나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견해다. 결정은 타자, 자유의지는 주체다. 답은 게임이다. 상호작용이다. 게임의 본질은 전략이다.


    인생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게임의 주최측은 나다. 그런데 내가 누구지? 결정되어 있지 않다. 아기는 나가 작다. 동물도 나가 작다. 인간은 나를 키워간다. 무엇이 나인가? 권력이 나다. 동물은 권력이 없고 권력을 얻어서 인간이 된다. 나의 의사결정영역이 나의 주체다. 인간의 성장과 함께 나는 커진다. 나는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처음 나의 존재는 희미하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훅 불면 꺼진다. 나의 몸도 어쩌면 내가 아니다. 환자는 몸을 가눌 수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나다. 암세포도 나에 속하는가? 암이 환자를 이긴다. 암세포는 타자다. 이기느냐 지느냐가 나를 결정한다. 나의 권력, 나의 재산, 나의 옷, 나의 힘, 나의 매력, 나의 친구, 나의 동료, 나의 직업, 나의 역할로 나는 점차 확장된다.


    딜레마가 있다. 자유의지는 나를 희미하게 만든다. 내 존재가 희미하므로 내 운명도 애매하다. 인간은 능동적으로 환경을 바꾼다. 동물은 환경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은 신분을 바꾸고 때로는 성별도 바꾼다.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동료를 얻고, 친구를 사귀고, 함께 살아갈 파트너를 정하여 환경을 바꾸고,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의지는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내가 희미할수록 자유의지가 명백하고 내가 명확할수록 자유의지가 작아진다. 나의 크기는 권력에 비례한다. 권력자는 할 수 있는게 많지만 뜻대로 할 수 없고, 자연인은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막상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다. 그렇다면 답은? 나를 키워가는 과정에 있다. 내가 상승하는 동안 자유의지가 있다. 마침내 뾰족한 정상에 서면 선택권은 0이 된다. 기슭에서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힘이 없고 정상에 오르면 힘이 있지만 선택권이 없다.


    박근혜의 운명과 같다. 일반인 신분일 때는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지만 본인의 능력이 없어서 최순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고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최순실을 버리고 독립할 수 있었지만 우물쭈물 하다가 감옥에 갔다. 박근혜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었다. 조금 있었지만 있으나마나였다. 사주팔자를 이기지 못했다.


    인생은 환경과의 게임이며 내가 이겨서 환경을 바꾸면 자유의지, 환경이 이겨서 나를 바꾸면 결정론이다. 자유의지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내가 변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게임이다. 동물은 자유의지가 없다. 바보들은 자유의지가 희미하다. 게임에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냐 결정론이냐 하는 해묵은 논쟁은 환경과의 게임을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난 해프닝이다. 우주의 절대원리는 게임의 원리, 상호작용의 원리다. 주체와 타자를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다. 그걸 분리하여 대칭시키려는게 결정론적 사고다. 게임에 이기려면 맞대응을 해야 하며 이에 필요한 것은 전략이다.


    자유의지는 가능성이며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순간 가능성은 사라진다. 돈과 같다. 돈으로 음식을 살 수 있지만 돈을 음식으로 바꾸면 돈은 사라진다. 음식은 먹어야 하며 못 먹으면 버려진다.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순간 자유의지가 사라진다. 게임을 하든 말든 자유의지에 달려 있으나 게임을 하면 운명적으로 오링되어 있다. 카지노에 입장하는 것은 자유이나 퇴장하는 것은 운명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전략이다. 어차피 오링될 운명이라면 카지노의 기술을 배워서 나도 카지노를 하나 차리면 된다. 내가 게임의 주최측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의지이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적다.


    존재는 사건이다. 사건은 주체와 타자의 대결이다. 주체는 희미하다. 내가 누구인지 사전에 확정할 수 없다. 내가 벌이는 일이 나다. 인간은 다양한 박테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다. 몸에는 1.5킬로 정도의 인간이 아닌 세포들이 포함된다. 내 안에 내 아닌 것이 상당하다. 세포 숫자로 보면 인간은 인간 안에서 소수파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존재를 지목하지만 실제로는 환경과 뗄 수 없다. 나무는 흙과 뗄 수 없다. 바위는 중력을 제공하는 지구와 뗄 수 없다. 기생충의 영역과 숙주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행위의 주체인 영혼만 나에 속하고 내 몸도 상당히 환경이다. 나도 상당히 내가 아니다. 내가 통제하는 사건이 나다. 우리는 개체가 개별적으로 존재하여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전제가 부실하다. 존재가 희미하다. 게임은 대칭을 만들고 의사결정은 대칭을 통과한다. 모든 의사결정은 어떻게든 50 대 50의 대칭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 확산을 수렴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 그런데 져주고 이겨야 한다. 인간의 자유란 지는 자유다. 엄마가 아기에게 져주는 자유다. 나중에 자식의 효도로 보상받는다. 이기는 자유는 없다. 이기려면 법칙에 복종해야 한다. 전략이란 1차전을 이기고 2차전과 3차전을 잡는 것이다. 전략이 있으므로 자유의지가 있다. 어차피 한 번을 져야 한다면 어디서 져줄지는 내가 결정한다.


    효율적이어야 이기지만 효율적이면 진다. 역사의 승자들은 실력있는 강자가 아니라 주변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자였다. 져주는 방법으로 주변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강한 항우가 아니라 부드러운 유방이 이겼다. 여포의 힘보다 유비의 인내가 필요했다. 아기들은 울어버리는 방법을 쓴다. 울면 맹수가 찾아온다. 원시인의 동굴에서 그것은 무모한 도박이다. 내가 울면 누가 먼저 달려올 것인가? 엄마가 먼저 달려올까, 호랑이가 먼저 덥쳐올까? 그것이 인생의 부단한 도박이다. 게임의 전략은 적을 이기는게 아니라 자기편을 늘리는 것이다. 엄마를 내 편으로 만들고 환경을 내 편으로 만들면 이긴다. 그것이 자아의 확대다. 그런데 그것은 도리어 비효율의 추구다. 사실이지 동물 중에 인간이 가장 비효율적인 동물이다. 내 실력을 키우지 않고 쓸데없이 주변에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전략이다. 전략은 져주는 것이다. 이기면 진다. 작은 게임을 져주고 큰 게임을 잡아야 한다. 밸런스가 움직여서 저절로 50 대 50이 되므로 초장 끗발에 져주고 그 투쟁과정에 환경을 우호적으로 만들어 최후의 일전에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 전략은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것이다.


    우주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결정되면 지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이다.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면 부분의 실패가 전체의 붕괴로 이어져서 전멸한다. 부분의 고장은 피해가 부분에 한정되어야 한다. 조직이 합리적이면 리스크가 크다. 효율적인 조직은 하나가 죽으면 다 죽는다. 포드시스템은 한 명이 잘못해도 라인스톱이다. 뭉쳐 있으면 몰살되고 흩어져 있으면 각개격파 된다. 효율은 비효율이다. 게임은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전략은 상대를 속이고 자기편도 속이므로 미리 결정하면 안 된다. D-DAY는 누구도 모른다. 적이 알아채면 날짜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면 안 된다. 불확실성이 이긴다. 전략의 큰 방향은 정해져 있으나 전술의 세부는 확정되지 않는다. 세부가 정해지면 게임에 지므로 일부러 희미하게 한다.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한다. 자유의지는 그 희미함에 의지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때그때 다르다. 내 몸, 내 가족, 내 나라, 내 우주 중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는 상대의 행동을 보고 대응한다. 내가 누구인지 미리 정하지 않으므로 우주는 결정될 수 없다.


    정리하자. 주체와 타자의 문제다. 주체를 크게 보면 자유의지, 타자를 크게 보면 결정론이다. 정답은 상호작용이다. 자유의지는 내가 벌이는 일의 크기다. 이기면 자유의지, 지면 결정론이다. 자유의지로 보면 인생은 권력적, 긍정적, 낙관적, 능동적이고 결정론으로 보면 인생은 운명적, 부정적, 회의적, 수동적이다. 공자는 자유의지, 노자는 결정론이다. 강자는 자유의지, 약자는 결정론이다. 주인은 애완견을 선택할 수 있고 애완견은 주인을 선택할 수 없다. 상사는 부하를 고를 수 있고 부하는 상사를 고를 수 없다. 인간은 음식을 고를 수 있고 음식은 인간을 고를 수 없다.


    답은 상호작용이다. 이기면 결정하고 지면 결정 당한다. 이기고 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전략이다. 게임은 전략을 구사할 수 있도록 항상 50 대 50으로 팽팽하게 흘러간다. 이기는 방법은 효율적인 구조로 디자인하는 것이다. 정상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일전에 이 방법을 쓰는 것이 전략이다. 미리 기술을 쓰면 적에게 되치기 당하여 죽는다. 자유의지? 당신에게는 최후의 승리를 앞두고 져주는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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