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의 길 일반인들은 뭐 아침에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고 저녁에 무당을 찾아가서 부적을 받아오고 흔히 그렇게들 한다.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손 없는 날을 따져서 이사를 간다는 둥 삼재가 들었다는 둥 한다. 하여간 별 넘이 다 있지만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남이야 교회를 가든, 사찰을 찾든, 아프리카 주술사를 찾아가든 상관이 없다. 그런데 천동설을 믿으면서 지동설을 주장한다면 넌센스다. 신도가 교회에 헌금하고 사찰에 시주하며 양쪽에 보험 드는건 괜찮지만, 목사가 새벽에 몰래 절에 가서 목탁 두드리고 온다면? 아침에는 목사, 저녁에는 스님? 이건 아니다. 주종관계다. 종은 이종저종 상관없으나 주는 이주저주 상관이 있다. 이율배반이다. 딸린 식구가 있는 사람은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구조론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면 종이 아니라 주다. 사이트 운영을 그렇게 하고 있다. 지나가는 눈팅 1은 아무러나 상관없으나 회원이 댓글을 달려면 자신의 포지션을 점검해야 한다. 정품을 얻으려면 유사품을 버려야 한다. 이 작자는 또 뭐라고 썰을 푸는지 들어나 보자는 행인 1은 여기서 발언권이 없다. 신도는 자유가 있고, 승려는 책임이 있다. 예외적인 일부를 제외하고 일반인의 회원가입을 막은지 오래되었다. 원래 그렇지 않았는데 일부 애먹이는 사람들 때문에 사이트의 정책을 바꾼 것이다. 이곳은 사람을 끌어모아 돈을 벌거나 이름을 팔아 명성을 얻으려는 곳이 아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진리의 불씨가 살아있으면 그뿐이며 환경이 나쁘면 큰바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일부만 이곳에서 발췌해서 가져가겠다는 사람은 발언권이 없다. 그런 사람은 먼 길을 함께 가는 동료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공짜로 나눠주지 않는다. 구조론은 좋은 것이다. 얻어가려면 기여 해야 한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진리에 관심이 없는 행인 1, 행인 2에게는 정품보다 유사품이 더 인기가 있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어렵고 구조론과 일부 비슷한 노자가 더 쉽잖아.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키려면 말이다. 칸트나 구조론이나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칸트를 공부하는게 더 폼나잖아. 불교의 연기사상과 구조론이 통한다는데 그렇다면 구조론은 필요가 없고 반야심경을 배워보는게 낫겠어. 그대는 어려운 구조론을 왜 공부하는가? 인생에 뭐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구조론보다 유사품이 더 도움이 되는데?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무언가를 원한다면 유사품을 배우는게 개이득. 그걸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 본인이 원한다면 어쩔 수 없다. 다만 그런 나이롱들은 이곳에서 발언권이 없다. 진리를 추구해야지 실용을 추구하면 안 된다.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있는가?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인간에게 문제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게 하는 언어다. 진리는 죄가 없다. 진리는 137억 년 전부터 그 자리에 계속 있었는데 뭔 말이 많아.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자세가 비뚤어져 있는게 문제다. 인간과 진리를 연결하는 도구인 언어가 비틀어져 있다. 인간이 이득을 추구하는게 진리와 멀어진 진짜 이유다. 그래서 구조론과 별로 일치하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공자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바라보는 자세가 바르면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자세가 틀어진 자는 진리에 문턱까지 왔다가도 비뚤어져서 옆길로 새고 마는 것이다. 바른 자세와 바른 언어를 갖추면 이미 진리는 그 안에 있다. 구조론이 별게 아니다. 모든 용어를 연역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포개는 것이 구조론이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은 작은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아니다. 우주라는 큰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 깨닫지 못할 뿐이다. 내 안의 큰 그릇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큰 그릇을 찾은 자는 자연히 공자의 길을 가게 된다. 그 길로 미끄러진다. 호흡이 맞고 리듬이 맞고 파장이 맞기 때문이다. 빠져나가지 못한다. 작은 그릇을 가진 자는 무의식적으로 인간의 사회적 본능에 따라 타자를 향해 찔러보기를 구사하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약은 기술을 쓴다.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공자의 극기복례로 그러한 동물적 본능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크고 작은 순서만 지키면 진리는 스스로 명백해진다. 찔러보기 본능, 떠넘기기 본능, 반응을 끌어내기 본능만 극복하면 그대는 이미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있다. 진리의 장이 만드는 인력에 끌려버린다. 노자든 석가든 예수든 소크라테스든 플라톤이든 데모크리토스든 헤겔이든 칸트든 비트겐슈타인이든 니체든 부분적으로는 구조론과 통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의미가 없다. 그딴 것은 중국의 시골농부 아저씨가 뒷마당에서 발명한 이족보행 로봇과 같다.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빅독보다 재미가 있지만 단지 재미가 있을 뿐이다. 왜? 언어가 다르니깐. 구조어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수학자는 숫자를 쓰고, 구조론은 큰 그릇에 작은 그릇을 담는 연역어를 쓰고, 일반인은 핑퐁식으로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대칭어를 쓴다. 그것은 언어가 다른 것이며 언어가 다르면 소통은 불가능이다. 관점이 비뚤어져 있으면 서로 간에 대화는 불성립이다. 일단 테이블에 마주 앉지 못한다. 내가 잘해서 좋은 결과를 낼 수도 있지만 상대방이 못해도 내가 승리할 수 있다. 공자의 길과 노자의 길이 있다. 공자의 길은 내가 잘하는 떳떳한 길이요, 노자의 길은 상대방이 못하게 방해하는 얍삽한 길이다. 둘 다 승리로 가는 방법인 것은 맞지만 전자는 함께 하는 길이고 후자는 혼자 뒷구멍으로 배신하는 길이다. 노자의 삿된 길로 가면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누가 꾸짖지 않으면 백 퍼센트 삿된 길로 가게 된다. 진리의 길은 어차피 혼자는 못 가는 길이다. 혼자 가다 보면 이미 삿된 길에 들어와 있다. 이득이야말로 인간을 움직이는 엔진이다. 이득이 없으면 가지 못하고 이득을 따라가다 보면 이미 비뚤어져 있다. 심리적 이득이든 물질적 이득이든 마찬가지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백 퍼센트 배신하고, 변절하고, 우경화하고, 진중권서민한다.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방법은 원리적으로 없다. 우주 안에 없다. 다만 삿된 길로 빠지는 것을 규탄하고 방해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내가 민중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겠어.' 하고 설레발이 친다면 그 자가 공산당이다. 인간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의 주도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 인간을 주도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인간을 주도하면 이미 잘못되어 있다. 인간이 스스로 답을 내면 그 답은 오답이다. 인간은 겸허하게 환경변화에 적응해나갈 뿐이다. 환경이 인간보다 큰 그릇이기 때문이다. 환경은 변하고 인간은 적응하고 환경은 또 변하고 인간은 또 적응한다. 바른길을 가는 인간은 환경변화에 적응하도록 자신의 자세를 개방할 뿐이다. 물이 들어오면 노를 젓고 물이 빠지면 체력을 기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