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인과율은 아는데 공간의 인과율은 모른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돌할매 현상이다. 돌할매 현상은 구조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데 필요한 논리적 장치가 될 수 있다.
20여년 전 처음 영천에서 돌할매가 등장한 이후 전국 곳곳에 우후죽순으로 돌할배와 돌할매들이 나타났다. 어지간한 점쟁이 도사들은 방구석 한 켠에 돌할매 하나 정도는 키우는 시대가 된 것이다. 뭐 이건 간단히 집에서 5키로 정도 나가는 아령이나 1.5리터 정도 들어있는 생수병으로 실험해도 된다. 전국적으로 무한히 많은 돌할매 돌할배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실험해 보시라. 돌을 들어올릴 때 우리는 팔힘으로 든다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돌을 잡고 팔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상체를 펴는 방법으로 들어올린다. 등으로 돌을 드는 것이다. 팔은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고 굽힌 등을 편다. 그런데 굽힌 등을 펴서 상체를 들어올리려 하면 하체에 먼저 힘이 들어가야 한다. 하체로 힘을 보내 발로 땅을 밀어야 돌이 들어올려진다. 즉 돌을 들 때 맨 처음 동작은 발로 땅을 살짝 구르는 것인다.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보통 두 번 정도 돌할매를 들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들어올린다. 번쩍 들린다. 두 번째는 기도를 하고 소원일 빈 다음에 돌을 드는데, 이때 요령은 돌을 잡은 손의 힘을 서서히 증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석에 붙은 듯이 딱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집에 있는 아령이나 콜라병으로 실험해도 된다. 손끝에 서서히 힘을 보태는 방식으로 들어올리려 하면 바닥에서 잡아당기는듯한 느낌이 든다. 왜 돌할매가 붙어버렸을까? 처음 손과 손목과 팔꿈치와 어깨와 허리와 관절은 이완되어 있다. 돌을 들어올리려면 근육을 경직시켜 이들을 결합시켜야 한다. 즉 질은 결합한다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다. 이 경우 무의식적으로 발에 힘을 주게 되는데 이는 매우 불손한 행동이며, 기도를 한 다음에는 무의식적으로 근육의 힘을 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발로 땅을 굴러서 드는 것이 아니라 손힘으로 든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손힘만으로 돌을 들어올릴 수 없다는 사실를 깨닫고 힘을 추가하려 하는데 이때 힘을 추가하기는 물리적으로 불능이다. 왜냐하면 발로 땅을 굴러야 힘이 추가되는데 발로 땅을 구르려 하는 순간 손에서 힘이 빠질 것 같기 때문이다. 즉 손으로 잡은 돌에서 힘을 빼고 다시 발로 땅을 박차고 일어나며 역기들듯 들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돌을 놓아야 하므로 결국 들 수 없다.
돌을 들어올리는 절차는 1) 질은 결합한다. - 발로 땅을 찬다. 2) 입자는 독립한다. - 발로 땅을 차는 반동으로 상체를 편다. 3) 힘은 교섭한다. - 상체를 펴는 반동으로 어깨를 든다. 라는 상부구조 다음에 팔과 손의 하부구조 동작이 따라오게 되는데 보통 상부구조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냥 들지 무의식적으로 발로 땅을 찬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그러므로 기도를 한 후 손의 힘만으로는 들지 못하며 뒤늦게 발로 땅을 차려 해봤자 그러기 위해서 손의 힘을 빼야하므로 들지 못한다.
4) 운동은 변화한다.- 팔을 움직인다. 5) 양은 침투한다.- 손목을 움직인다. 는 하부구조는 발로 땅을 구르고 등을 펴고 어깨에 힘을 준 후 뒤에 따라붙는데 기도를 하고 서서히 힘을 증가시킬 경우, 운동신경의 작용이 아닌 뇌의 생각으로 의식적으로 돌을 들게 되며 그 경우 ‘양은 침투한다’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돌이 들리지 않는 것이다. 왜? 손목힘만으로 돌을 들려고 하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제로 드는 동작은 발뒷꿈치부터 시작되는데 사람들이 이를 망각한다는 것이다. 다들 손가락부터 시작된다고 착각한다.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으로 들어올리려 하는 것이다. 하체 -질 상체 -입자 어깨 - 힘 팔 - 운동 손목 - 량의 순서로 힘이 작동하는게 존재론의 순서인데 기도를 한 다음에는 인식론을 적용하여 거꾸로 손목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하체를 사용해서, 발로 땅을 구르고 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물건을 드는 동작은 굉장히 쉬운 일이지만 갓난 아기는 못한다. 갓난 아기는 하체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뇌에 입력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물건을 들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연습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체 힘으로 들어올리면서도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발가락이 잘리고 없는 사람이 물건을 잘 들지 못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발가락을 다쳐보면 안다. 힘의 전달은 하체≫상체≫어깨≫팔≫손목 순서이며 이 과정은 저울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는 외견상 그러하고 실제로 질은 하체 뿐 아니라 인체 전체의 관절을 단단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자 단계에서 하체는 빠지고 관여하지 않는다. 힘 단계에서는 상체도 빠진다. 운동 단계에서는 어깨도 빠진다. 이렇게 하나씩 이탈하여 가므로 저울구조가 되는 것이다. 질은 발로 땅을 굴러 대지와 인간과 할매돌을 순간적으로 결합하고(질은 결합한다.) 입자는 여기서 대지를 제외시키고 인간을 독립시키며(입자는 독립한다), 힘은 사람과 돌할매 사이에서 교섭하고(힘은 교섭한다), 운동은 돌을 움직이며(운동은 변화한다.) 량은 돌을 놓는다.(양은 침투한다). 양이 돌을 놓을 때 위치에너지가 이동하여 돌로 옮겨갔기 때문에 양은 침투하는 것이다. 즉 돌을 드는 힘은 사람의 근육 속에 있는 당을 태워서 얻은 것이며 그 에너지가 돌의 들림에 의해 돌의 위치에너지로 이동하여 돌 속으로 침투하여 들어갔기 때문에 양은 침투하는 것이다. 돌은 들어올려진 30센티만큼 위치에너지를 얻은 것이다. 양이 침투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공간의 인과율이다. 우리가 공간의 인과율을 모르는 이유는 돌할매가 들리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것과 같다. 물건을 들 때 발로 땅을 찬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동작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지만 아기시절에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매우 연습한 것이다. 정신차려야 한다. 정신은 무의식을 의식하는 것이다. 발로 땅을 굴러서 돌을 들어올린다는 메커니즘을 아는 것이다. 할매돌이 달라붙는다는 사실은 그만큼 대부분의 인간이 무의식에 빠져 있다는 증거다. 보통 60프로는 완전히 속고, 나머지 40프로도 과학을 배웠기 때문에 의심할 뿐 실제로 그 순간에는 속는다. 즉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백프로 속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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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니까 직접 들 수 있는 것이 상당히 줄었소. 기도하고 1.5리터가 안들리는 현상이 일어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