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왜 구조론인가?
자동차가 쌩쌩 막힘없이 잘 달리고 있을 땐 아무도 자동차의 내부 구조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심지어 계기판도 잘 보지 않고 옆에 앉은 사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고 차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드라이브를 즐긴다. 그러나 무언가 자동차 내부에 이상이 생겨 달리다 멈추거나 다른 차와 사고를 내는 일이 생겨 더 이상 마음 편히 드라이브를 즐길 수 없을 때, 우리는 모든 주의력과 집중력을 모아 자동차에 무슨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를 탐구하게 된다. 처음엔 계기판을 들여다보면서 자동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점검하다가 마침내 보닛을 열어 차량 내부의 ‘구조’를 살피게 된다. 평소엔 내부 구조를 몰라도, 차량 내부에서 작용하는 정밀한 메커니즘을 몰라도 잘만 운전하고 잘만 달리다가도, 한 번 고장이 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더 이상 내부 구조와 메커니즘을 모르곤 고장에 대처할 수 없다. 고장이 나면 운전자는 차량의 내부 구조와 메커니즘을 이해한 정비사의 역할을 해야 하며 본인이 할 수 없다면 그것이 가능한 전문가에게라도 맡겨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일이 잘 풀릴 때, 관계가 원활히 진행될 땐 마음의 구조를 몰라도, 메커니즘을 몰라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문제가 생기면 달라진다. 감정이라는 마음의 계기판에 우울, 화, 두려움이라는 경고등이 켜졌을 때, 생각이 막혀 마음이라는 자동차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할 때, 두 가지 이상의 의도가 내면에서 서로 충돌해 마음이 나아갈 방향을 선택하지 못할 때, 의식이라는 운전자가 술에 취해 마음을 제대로 운전하지 못할 때, 마지막으로 정신이라는 도로가 막혀 마음이 옴짝달싹 못할 때,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구조와 메커니즘에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심리치료 이론은 마음의 정비학이다. 심리치료 이론은 마음이라는 정묘한 메커니즘이 고장 난 이유를 진단하고 처방까지 한다. 마음의 고장을 고치려면 원인을 알아야 하고 원인을 알려면 마음의 구조와 메커니즘을 알아야하기 때문에 심리치료는 마음에 대한 이론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이론의 차이가 곧 다양한 심리치료 전통을 낳았다. 마음에 대해 어떠한 이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심리치료는 정신분석적 접근, 인지 행동적 접근, 게슈탈트 치료, 인본주의적 접근, 실존주의적 접근, 교류분석, 분석심리학 등으로 각개 약진하였으며 각자 마음의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과 처방을 가지고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하게 각개 약진한 심리치료 접근들은 불행히도 학문적으로는 21세기인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각기 나름대로 마음에 대한 체계적이고도 합리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긴 하지만 학문적 체계가 없이 각 전통별로 창안자가 설정한 이론적 바운더리를 넘어 소통하고 있지 못하다. 마음과 마음의 문제에 대한 각기 다른 설명을 들을 수 있을 뿐 정작 마음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이 어떻게 서로 호환되고 소통되고, 한 눈에 조망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선 들을 수가 없다. 온갖 치료 접근들이 어수선하게 난립한 가운데 이러한 난맥상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입체적인 접근은 찾기가 어렵다. 심리치료 접근들이 난립하면서 각개 약진하는 이유는 마음을 설명할 하나의 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 접근은 나름대로 마음을 설명할 원리를 찾은 데서 출발하였으며 그러한 원리로부터 가지를 뻗어가며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심리치료 전통들은 마음의 고장의 원인을 찾는 데서부터 출발해, 마음의 고장을 고치는 지점에서 탐구를 중단하였으며, 정비에만 치중한 나머지 운행(마음의 프로세스), 그리고 설계도(마음의 원리)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무지한 채 남아 있다.
심리치료 이론이라는 마음에 대한 담론은 마음탐구의 최전선에서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마음의 구조와 과정, 그리고 성장과 병리에 대한 이론적이고도 실천적인 탐색에 몰두하였지만, 각자 전선에서 고립되어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소대처럼 본부, 즉 철학과 연결되지 못한 채 각자의 이론을 가지고 오늘도 현장에서 내담자/환자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마음에 대한 제대로 된 철학이 필요하다. 현재 심리치료 이론들이 난립하는 이유는 심리학이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며, 심리학이 제 역할을 못하는 이유는 심리학이 실증주의라는 반쪽 눈만을 뜬 채 마음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실증주의라는 철학적 기반의 한계가 곧 심리학의 한계이고, 심리학의 한계가 곧 심리치료의 한계이다. 이러한 난맥상을 타개하기 위해선 뿌리부터 손을 보아야 한다. 즉 각개 약진 중인 심리치료 이론들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선 철학이라는 뿌리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대한 철학이어야 한다. ‘마음’에 대한 철학이어야 마음에 대한 학문의 체계를 세울 수 있고, 그 메커니즘과 프로세스를 논할 수 있다. 마음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 철학에서 불교, 유학, 힌두철학 등에 까지 이르겠지만 본 논문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에 등장한 심리치료 이론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과거의 철학들은 이론적 영감을 줄지는 몰라도 이론적인 통합 모델을 제시할 수 없기에 심리치료 접근들 간의 소통과 통합을 논할 수 있는 후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 논의 대상에서 배제하였다. 무엇보다도 마음 자체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 진화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과거의 철학으로 현재의 마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현대 철학에서 마음에 대한 탐구, 특히 다양한 심리치료 전통들을 아우르면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을 만큼 그 깊이와 폭이 넓은 새로운 철학적 접근은 무엇이 있을까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현재로선 두 가지 접근이 있으며 그 중 하나는 바로 켄 윌버의 통합심리학이고, 나머지 하나는 김동렬의 구조론이다. 이 중 켄 윌버의 통합심리학은 마음을 수준, 발달라인, 사상한, 상태, 유형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를 통해 수직(수준, 발달라인)+수평(상태, 유형)의 입체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진화론과 발달심리학의 핵심 요소들을 수준과 발달라인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서 상태, 유형, 사상한 같은 마음의 ‘공간성’ 뿐 아니라 시간에 따라 체계적으로 성장하고 진화하는 마음의 ‘시간성’도 해명하여 마음에 대한 입체적인 관점의 획득을 가능케 한 것이다(Wilber, 2008). 하지만 켄 윌버의 통합심리학은 마음을 진행 중인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동영상적’ 관점을 획득하진 못했다. 마음의 시간성과 공간성을 해명하면서도 마음의 ‘현장성’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다. 의식의 상태를 깊이 잠든 상태-꿈꾸는 상태-깨어있는 상태 등으로 범주화한 수준에 그쳐있다. 구조론은 바로 이 부분까지 설명해 마음에 대한 입체적 관점을 넘어 마치 동영상처럼 하나의 사건의 시작과 끝을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동영상적 모델’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마음의 일처리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데 성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