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구조론과 정신분석
마음의 제 1원인은 리비도가 아니다.
구조론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리비도설을 주장하면서 마음의 제 1원인을 탐구한 것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지만 그 제 1원인을 리비도, 즉 성충동으로 본 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사유를 전개함에 있어 제 1원인을 가정했기 때문에 연역적인 이론을 구축할 순 있었지만, 마음의 원인이 아니라 일처리 결과인 욕망을 다시 원인의 자리에 돌려놓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조론 마음이론에서 가장 하위 수준에 위치한 욕망은 어디까지나 마음의 일싸이클인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에서 감정에 해당하는 하부구조이지 정신-의식-의도 같은 상부구조가 아니다. 구조론에서 인간 행동의 원인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바깥, 외부환경에 있다(김동렬, 2010a).
구조론에 따르면 신체 내부의 자극인 배고픔이나 가려움, 오줌 마려움 등 역시 외부환경이며, 이를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을 거쳐 처리해 행동으로 해결하는 것이 마음이 하는 일이다. 성욕은 외부환경의 성적 자극(발기, 야동, 이성의 누드 등)을 마음이 반복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신-의식-의도-생각에 의해 해석되어 출력된 감정이며 반복되는 과정에서 마음이 의사결정의 편리함을 위해 정신-의식-의도를 생략한 결과 욕망이 되어 성적 행동의 무의미한 반복을 유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처음으로 야동을 보게 된 청소년은 처음에는 이러한 외부환경의 자극의 존재를 알아차리면서(정신)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응인 발기 현상을 포착하고(의식), 이를 해소하겠다는 의도를 세우면서 자위행위에 대한 생각을 통해 흥분이라는 감정을 낳아 자위행위라는 행동을 촉발한다. 일단 한 번 이렇게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 성공하여 쾌감이라는 보상을 얻으면, 더 이상 정신-의식-의도라는 마음의 상부구조를 사용하지 않고 같은 일처리 방식, 즉 자위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결국엔 자신이 애초에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일싸이클을 밟으면서 야동이라는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했음을 까맣게 잊고 그냥 성욕이 올라오기 때문에 자위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원래 감정의 역할이 감정과 연관된 호르몬을 신체에 분비하여 신체를 일종의 흥분 상태에 놓아 행동을 통해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행동을 촉발시키긴 하지만, 이 감정이 정신-의식-의도-생각의 산물이라는 점은 간과되기가 쉬운 것이다. 구조론의 욕망에 대한 견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김동렬, 2010a).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전개에서 정신은 자신의 내부와 외부를 포함한 일체의 환경 앞에서 그 충돌지점과 모순을 발견하고 그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는 것이며 욕망은 그러한 상황이 반복되어 훈련된 것이다. 성욕이란 결국 성적인 환경 안에서 집중력을 잃고 불편해진 모순 상태에서 그 모순과 충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의도이며, 여기에는 분명히 정신과 의식과 의도로 마음이 전개된 것이다. 남성은 수면 중에 발기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신체현상일 뿐 욕망이 아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그 발기된 상태를 어딘가에 써먹으려고 의도하면 비로소 욕망이 되는 것이며 이는 마음이 전개된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사건의 출발점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부여하고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한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당연시되어 욕망으로 세워서 사건의 동기로 삼으려고 한다면 좋지 않은 거다. 욕망은 사건의 제 1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필요한 만큼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거다.“(김동렬, 2010a).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구조론에선 욕망을 사건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결점으로 보기 때문에 이를 정신-의식-의도라는 마음의 상부구조에서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프로이드가 강조한 리비도 역시 구조론에선 충분히 마음에 의해 제어가 가능하며, 마음의 제 1원인이 아니라 성적 자극의 반복적인 처리 과정에서 발생된 부산물로 간주된다. 구조론에 따르면 마음의 제 1원인은 외부환경과의 관계 맺기이며, 이는 환경과의 대칭구조에서 자아와 환경의 우열을 파악하는 것이 마음의 첫 번째 일처리 과정인 정신 차리기를 뜻한다. 호랑이를 만나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은 호랑이라는 외부환경의 위험성을 정신을 동원해 재빨리 포착하면 의식을 동원해 신체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의도를 동원해 달아날 것인가 대치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달아난다면 어떻게 달아날 것인지 생각으로 전개하고, 호랑이에 대한 대응책이 세워지면 두려움에서 벗어나 편안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확률을 높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김동렬, 2010a).
비록 정신분석에서 제 1원인을 리비도로 잘못 설정하긴 했지만, 정신분석에서 치료자에게 강조하는 “고르게 떠 있는 주의evenly hovering suspended attention'는 구조론에서 강조하는 정신 차리기와 거의 흡사하다. 둘 다 외부환경과의 정직한 대면, 알아차림을 강조하고 있으며 평소엔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등에 의해 대상에 대한 감정반응으로 곧바로 나타나던 것을 멈추고 대상에 대한 의식과 의도와 생각과 감정을 의식적으로 점검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신분석에서 치료의 핵심인 전이의 파악과 해소에 있어 만약 치료자가 고르게 떠있는 주의를 유지하지 못한 채, 즉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내담자와 관계를 맺을 경우, 치료는 불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치료자에게 아버지상을 전이시킨 내담자의 무의식적인 반응에 치료자 역시 치료자에게 익숙한 아버지상으로 대응하면서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는 식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 이는 내담자에게도 치료자에게도 이미 익숙해진 마음의 일처리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며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에서 마음의 하부구조인 생각-감정만 알아차리게 된다. 내담자의 생각-감정 수준만 읽고 대응해선 애초에 내담자의 생각과 감정을 낳는 정신-의식-의도라는 상부구조를 읽고 대응할 수 없으며 증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에만 개입하게 되어 치료의 효율을 극도로 떨어뜨린다. 구조적으로 문제는 상부구조에 개입할수록 개입횟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치료자에게 고르게 떠 있는 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치료자가 내담자라는 외부환경을 전적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며 치료자가 평소엔 편견, 고정관념 등으로 무의식화된 마음의 상부구조인 정신-의식-의도를 의식화하면 이에 따라 내담자에 대한 생각-감정이라는 마음의 하부구조를 기존의 패턴과 다르게 작동시켜 편견과 선입견 없이 치료 행위에 돌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따라서 치료자의 고르게 떠 있는 주의가 치료에 있어 핵심이라는 정신분석의 주장은 구조론에서 마음의 첫 번째 일처리 과정인 정신 차리기와 거의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은 없다.
구조론에서 말하는 무의식은 마음의 상부구조이다. 여기에서 상부구조는 보통 정신-의식-의도를 이야기하나 이는 상대적인 것으로 정신의 의식의 상부구조이고 의식은 의도의 상부구조이며 의도는 생각의 상부구조, 생각은 감정의 상부구조이다. 감정 수준만 자각하면 그보다 상부구조들이 무의식화되고, 생각 수준만 자각하면 그보다 상부구조인 정신-의식-의도가 무의식화되는 것이다. 구조론에선 보통 사람들의 경우 거의 반복되는 일상을 처리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정신-의식-의도라는 상부구조에 대해 이미 과거에 세팅해 놓은 것을 반복적으로 활용하면서 생각-감정 수준만을 자각하고 살며, 심리학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의도의 자각이 가능하고, 깨닫게 되면 정신 수준까지 자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김동렬, 2010a).
프로이드가 말하는 무의식 역시 구조론의 무의식과 사실상 다를 바 없다. 농담이나 말실수를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 꿈을 통해 드러나는 무의식은 마음의 반복적인 일처리 과정에서 생략된 정신-의식-의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며 프로이드가 치료를 통해 이를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처럼 이에 대한 자각이 훈련에 따라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의식은 원래 의식이다. 다만 마음이 반복적인 일처리를 하는 와중에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위해 상부구조를 미리 세팅해 놓고 비슷한 외부상황이 발생 시 계속 써먹기 때문에 자동화된 것이다. 이는 무의식이란 표현보단 자동의식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할 수 있겠다.
프로이드의 경우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이드를 성격구조의 한 축으로 놓고 절반은 의식의 영역, 또 다른 절반은 무의식의 영역에 위치한 초자아를 다른 한 축, 그리고 나머지 한 축인 자아를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서 현실 원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무의식적/의식적인 축으로 보면서 마음의 축을 무려 세 가지로 설정했다(이창재, 2003). 하지만 이는 구조론적으로 보면 마음을 사건으로 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중복과 혼잡의 오류이다. 마음의 축은 오직 하나이며, 이는 마치 외부의 충격이 있을 때 무게 중심이 세 개가 아니라 하나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하는 축은 세 개가 아니라 한 개이며, 이 하나의 축이 의도의 수준에서 외부 자극에 대한 판정을 내려 생각과 감정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드, 자아, 초자아가 따로 있고 무의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외부환경에 맞서 마음이 일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드, 자아, 초자아의 포지션이 성립되는 것이다. 마음이 일을 끝내면 이드도, 자아도 초자아도 없다.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이라는 마음의 일처리 과정에서 정신을 통해 외부환경의 자극을 포착한 뒤, 의식에 의해 외부환경에 대응할 준비를 갖출 때 자아가 성립하여 의도-생각-감정을 진행시키고 최종적으로 감정을 연료삼아 행동에 이른다. 예를 들자면, 외부에서 적이 쳐들어와 이를 포착하고 군대에서 비상이 걸리면(정신) 준비태세가 걸려 평소엔 흩어져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던 부대원들이 한 군데 모여 명령을 기다리고(의식), 출동 준비가 되었으면 출동할 것인가 대기할 것인가를 결정하고(의도), 만약 출동을 결정하였다면 어디에서 어떻게 적과 대응할 것인지를 계획하고(생각) 계획에 따라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감정) 경계에 나서는 것(행동)이 마음의 일처리 과정이다. 여기에서 평소에 흩어져 있던 부대원들, 즉 신체의 감각기관과 사지를 두뇌가 통제하여 주도적으로 외부환경을 파악하고 행동으로 맞서 정신 단계에서 유발된 긴장감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자아의 역할이다. 자아는 이처럼 마음의 일처리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성립하며 일처리 과정을 무사히 마치면 사라진다.
이드 역시 마찬가지이다. 마음의 일처리 구조에서 이드는 가장 말단에 위치하는 감정의 포지션에 해당하며, 앞서 언급한 욕망이 바로 이드이다. 인간이 이드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으로 인해 이드가 마치 마음의 한 축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이는 마음의 구조에서 욕망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파악하면 해소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드는 성욕을 인간 행동의 무의식적인 동인으로 파악하고 여기에 리비도란 이름을 붙이면서 이를 저장하는 곳이 이드라고 가정하였지만, 이는 ‘살기 위해 밥을 먹는다가 아니라 밥을 먹기 위해 산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원인과 결과 측을 뒤집어 놓은 데 따른 오류일 뿐이다.
구조론에 따르면 성욕은 어디까지나 외부환경의 성적 자극에 대해 처음엔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절차를 밟아 해석된 결과물이다. 욕망은 정신, 의식, 의도, 생각의 점검을 잊어버리고 사전에 세팅된 일련의 감정-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성욕의 경우 성적 자극을 자신이 이전에 써먹은 적이 있는 성적 행동을 반복하고 싶다는 생각과 감정으로 나타난다. 뇌는 반복되는 행동 전체를 하나의 행동으로 치기 때문에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점검이라는 귀찮은 의사결정 단계를 거치지 않고 일전에 성공한 바 있는 세팅을 바로 불러서 써먹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의사결정에 투입되는 에너지를 줄이고 되도록 빠르고 신속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이다. 욕망은 과거에 이미 세팅된 상부구조에 따른 생각과 감정의 하부구조이며 욕망의 원인, 즉 정신-의식-의도의 상부구조가 자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점에서 무의식이다(김동렬, 2010a).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이러한 욕망을 저장해 놓은 이드라는 장소는 마음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드라는 축이 자아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사건으로 보면 욕망에 의한 행동의 무의미한 반복(이드)과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일처리 과정에서 신체의 감각 기관과 사지를 통제해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하는 의식의 단계에서의 자아가 있을 뿐이다. 이드(욕망)가 마치 마음이라는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를 구조론에선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마음은 정신이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서 촉발되어 의식과 의도와 생각을 거쳐 감정의 단계에서 호르몬을 분비하여 행동을 촉발하는 형태로 완결된다. 감정은 생각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저할 때 에너지를 증폭시켜 행동을 촉구하는 작용이다. 이때 호르몬의 분비가 과다하면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하게 되며, 그것이 욕망으로 발전하여 다시 정신으로 피드백 된다.
이때 외부자극이 없는 내부순환이므로 정신, 의식의 의도의 상부구조를 거치지 않고 바로 생각과 감정으로 되돌아온다. 뇌는 반복되는 행동을 새로운 사건으로 인식하지 않고 이전 행동의 연속선 상에서 판단하기 때문이다.“(김동렬, 2010a).
초자아 역시 구조론의 마음이론으로 보면 존재하지 않는다. 초자아는 정신분석에서 생애 첫 5년 동안에 부모나 보호자에게서 생기며, 부모의 기준과 권위가 내면화되어 자아를 위협하는 이드를, 즉 욕망을 통제하고 억누르는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면 마음에 초자아라는 또 하나의 축을 가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구조론에서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외부환경과 나의 포지션 관계에서 유도되는 일종의 역할, 입장, 태도, 성격, 방향성을 의미한다. 초자아는 아직 자아가 미성숙하여 외부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주로 부모라는 외부의 자아가 미리 설정한 의도를 그대로 받아들여 외부환경의 자극을 처리하는 데 쓴 결과 학습된 것이며, 따라서 초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어 내면화된 ‘의도’가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나중에 성숙한 자아가 외부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내면화된 의도와 대립하는 새로운 의도를 세울 때 갈등을 빚게 되며, 이는 초자아와 자아의 대립이 아니라 기존의 의도와 새로운 의도의 대립에 불과하다.
아직 외부환경에 능동적으로 맞서기에 인지능력과 판단능력이 부족한 어린 시절의 경우엔 부모가 미리 학습한 정신-의식-의도의 상부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써먹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지만, 점차 성장해가면서 부모로부터 습득하여 내면화된 상부구조로 대응할 수 없는 외부환경의 변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이 땐 새롭게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의 절차를 밟아 새로운 행동양식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초자아는 부모-자식, 즉 보호자-피보호자라는 관계에서 부모에 의해 주입된 의도이며, 학습되어 자각되지 않은 채 바로 양심의 가책 같은 불편한 감정으로만 포착된다는 점에서 무의식적이지만, 이 또한 이드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부구조를 관찰함으로써 얼마든지 관찰 가능하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론 의식의 영역 하에 있다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