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냉정한 진실 깨달음은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로 기울면 안 된다. 초능력은 없다. 신통력은 없다. 비슷한 것도 없다. 깨달아서 특별히 얻는 것이 없다. 깨달음은 그저 호르몬을 바꿀 뿐이다. 영적체험이니 기체험이니 하는 것은 그냥 호르몬 변화다. 그러므로 깨달았다고 해서 특별히 내세울 것도 없다. 호르몬의 변화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명상단체들이 기수련이라며 성추행에 가까운 신체접촉을 하는 것이 그러하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고 동료의 땀 냄새를 맡으면 호르몬이 변하고 안정감을 느낀다. 스트레스가 줄어든다. 노래와 춤이나 스포츠나 도박으로도 느낀다. 교회와 사찰의 행사에 참여해도 호르몬 변화를 체험을 할 수 있다. 마약을 먹는 방법도 있고 섹스를 권장하기도 한다. 이는 라즈니쉬의 기술이다. 사춘기만 되어도 호르몬이 변한다. 다른 많은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힘들게 장판에 엉덩이가 눌어붙도록 앉아있을 이유는 없다. 강자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약자 앞에서는 기세등등해진다. 호르몬이 변한 것이다. 깨달으면 강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주눅 들지 않는다. 깨달음으로 얻는 것은 그 정도에 불과하다. 담대해진다. 배짱이 늘어난다.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의사결정을 더 잘하게 된다. 스님이 안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도의 몬순에 비가 오면 우기가 끝날 때까지 나무 밑에 앉아있는게 안거다. 겨울에는 추워서 앉아있고 여름에는 더워서 앉아있는게 동안거 하안거다. 요즘은 냉난방이 된다. 겨울에는 보일러가 있고 여름에는 에어컨이 있는데 얼어 죽을 안거타령? 부질없는 짓이다. 명상을 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이다. 반대로 깨달은 사람이 명상을 하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머릿속의 빈칸을 채우는 것이다. 그럼 그 빈칸은 누가 만들었지? 그것이 깨달음이다. 인간의 뇌는 원숭이 수준에 맞춰져 있다. 정글에서 살도록 세팅되었다. 기본모드가 설정되어 있다. 문명은 인간의 몸에 맞추어진 옷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다. 문명을 버리면 침략을 당해 죽기 때문이다. 인구가 늘어나서 방법이 없다. 70억 인류가 합의해서 다 같이 문명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인간의 삶이 복잡해졌으므로 기본모드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집단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것이다. 사유의 도구를 바꾸는 것이다. 문제는 하향평준화된다는 점이다. 석가 시절에는 상위 0.1퍼센트에 속하는 엘리트가 명상을 했는데 이제는 개나 소나 명상을 하려고 한다. 점차 난이도가 내려갈 수밖에. 더 쉬운 명상법을 찾는다. 보나마나 사이비다. 마약명상, 섹스명상, 호흡명상, 요가명상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개도 그런 것은 한다. 쉬운 명상법을 찾겠다는 태도는 서울대 입시문턱을 낮춰서 이름만 쓸 줄 알면 누구나 입학시켜 줘야 한다고 떼를 쓰는 것과 같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사실 명상은 내가 왕년에 다 해놨다. 진도 빼놨다. 그냥 따라오면 된다. 예수가 대신 속죄했듯이 명상은 내가 대신해놨다니깐.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보어가 다 해놨는데 그것을 여러분이 재방송할 필요는 없다. 선배들이 먼저 와서 길을 닦아 놨다. 여러분들은 지름길로 곧장 가야 한다. 엘리트의 팀에 들면 호르몬이 바뀐다. 지식을 낱낱이 갖출 이유는 없고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연결만 되면 된다. 검색하는 방법만 알면 된다. 명문대 나왔다고 다 아는건 아니고 아는 사람과 무시로 연결된다는 점이 각별하다. 엘리트의 그룹에 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공자의 방법이다. 종교도 원래는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점차 하향평준화되었다. 똑똑한 사람은 과학으로 빠져나가고 사이비에 가까울수록 저능아가 종교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조계종의 수준은 크게 떨어졌다. 아는 것은 지식이고 깨달음은 앎의 틀을 갖추는 것이다. Know는 can과 관계가 있다. Can은 관이기도 한데 관 속에서 꺼낸다. 동물을 쫓다가 막다른 곳에 몰아넣는다. 굴속에 손을 집어넣어서 오소리나 너구리를 꺼내야 한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물릴 수 있다. 꺼낼 수 있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이다. can이다.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은 곳으로 꺼내는 것이 아는 것이다. 이는 어원을 연구한 바에 따른 필자의 추측이다. 방금 나온 것은 New, 지금 막 나오는 것은 now, 나오려는 조짐은 on이다. know-how는 어떻게 오소리에게 손을 물리지 않고 꺼내느냐다. 다 노하우가 있다. 장갑을 끼면 된다. 무엇인가? 우리는 지식을 머리에 주입하는 것으로 여긴다. 반대로 생각하자. 꺼내서 속을 노출시키는 것이 앎이다. 꺼내려면 입구를 파괴해야 한다. 문을 따고 자물쇠를 열고 뚜껑을 열어야 한다. 그 과정은 마이너스다. 깨달음은 깨는 것이다. 호두를 깨듯이 탁 하고 깨뜨린다. 방해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방해자는 호르몬이다. 호르몬을 바꾼다. 한 방에 된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다. 시간 잡아먹는 명상과 수행은 필요 없다. 한 번 호두를 깨본 사람은 또 깬다. 재미들렸다. 깨달은 사람이 명상을 하는 이유다. 가만있으면 호르몬은 원위치 된다. 호르몬이 바뀐 상태를 유지하려면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수행해서 깨닫는건 아니다. 얻은 것을 지키려고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은 안 해도 된다. 인간은 집단 안에서 역할을 얻을 때 호르몬이 바뀐다. 소속된 집단이 없고 역할이 없으므로 혼자 수행하는 것이다. 문빠집단에 속해 있으면 저절로 호르몬 나온다. 군자의 의리 속에 머무르면 저절로 호르몬이 나온다. 역할이 중요하다. 졸개 포지션에서 두목 포지션으로 바꿔야 한다. 그 방법은 신과의 일대일이다. 우주 안에 신과 나 둘뿐이다. 나머지 70억은 나의 다른 버전이다. 복제된 나의 모습들이 즐비하다. 그럴 때 호르몬이 바뀌고 안정감을 느낀다. 인간은 큰 무리에 가담할 때 호르몬이 바뀐다. 대승의 큰 배를 타야 한다. 호두껍질을 깨듯이 탁 깨지고 단박에 깨달음을 얻으며 그 상태에 머무른다. 꺼내는 것은 까는know 것이다. K가 묵음이 되었지만 숨어 있다. 우리는 밤송이를 까고, 호두를 까고, 과일 껍질을 까고, 무지를 깐다. 수행을 쌓지 말고 무지를 도끼로 까버려야 한다. 팀플레이로 가능하다. 대승의 큰 배에서 가능하다. 군자로 의사결정권자가 되고, 인의로 함께 가는 동료를 얻고, 괴력난신의 극복으로 게임의 주도권을 잡는다. 간화선이니 화두참구니 하는 것은 시간이 남아돌던 옛날 방법인데 아직도 그런 봉건시대 삽질을 하고 있으니 불쌍할 뿐이다. |
직장 선배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들도 일부러 어렵게 하게끔 돌아가게끔 어렵게 배우게끔 했었는데, 저희는 안그래도 힘든 일 쉽게 할 수 있는 건 쉽게 하도록 바꿨던 그런 의사결정 시스템?을 만들어온 끈끈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연차가 쌓여나가고, 후배들도 많이 들어왔는데 저희는 그걸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걸 후배들은 빨리도 습득하고, 저희보다 적은 시간과 경험에도 잘 사용하더군요. 그들 입장에서야 우리도 똑같은 직장선배들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깨달음 또한 마찬가지일 듯 합니다.
그래서 그냥 소시민으로 주어진 일 하면서 살아갈때는 구조론의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다가
사업을 하거나, 큰 투자를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뭔가 기존에 없는 새로운 판을 벌이거나, 신문물을 개척하거나, 열리는 분야에 뛰어들어 적극 의사결정해야하거나
이럴때 구조론의 깨달음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