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이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은 오직 공자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격이 떨어진다. 다들 기특한 아이디어를 하나씩 들고나왔지만 진리의 본질에서 멀다. 그들의 아이디어가 살을 보탤 수는 있으나 먼저 와서 뼈대를 세운 사람은 공자다. 먼저 공자의 뼈대가 서고 난 후에라야 플라톤과 예수와 니체의 가르침이 살로 기능하는 것이다. 공자 + 플라톤은 훌륭하지만 공자 없이 플라톤은 위험하다. 수학으로 치면 유클리드의 원론과 같다. 원론 다음에 각론이 나와야 한다. 본과 말이 있다. 본을 취하고 거기에 말을 더해야 한다. 뼈대를 버리고 살만 찌우면 배불뚝이가 되어 밸런스를 잃는다. 물론 공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뼈를 세운 다음 살을 찌워야 한다. 뼈대 없이 살만 가지고 전진하면 한동안 잘 나가다가 곧 한계를 만나게 된다. 멀리 가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 수학은 원론이 없어서 망한 것이다. 중국은 공자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고 공자 하나뿐이라서 망했다. 근래에 중국이 흥했지만 그들은 공자를 버리고 뼈대가 없어서 배불뚝이가 되었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일본은 개화기에 공자를 얻어서 흥했지만 패전 후에 공자를 버렸다. 하던 가락이 있어 이후로도 꽤 잘나갔지만 결국 한계를 만났다. 메이지 시절 흥한 것은 공자를 배웠기 때문이고 패전 후 다시 일어선 것은 공자의 여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이고 지금 한계에 직면한 것은 공자를 버렸기 때문이다. 후과는 나중 나타난다. 서구도 한때는 공자를 배웠다. 18세기에 흥한 것은 공자의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 절대주의 사상 덕분이다. 그때는 청나라가 선진국이었다. 중국을 따라잡자 그들은 재빨리 공자를 버렸다. 전쟁과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탈근대주의 5각파도를 만나서 망했다. 그들은 왜 양차 세계대전의 수렁에 빠졌을까? 공자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매몰되었을까? 공자의 계몽주의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반지성주의가 다분한 마르크스주의와 탈근대 사상에 빠졌을까? 그들은 왜 추악한 트럼프 똘마니가 되었을까? 공자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지성주의, 계몽주의, 인문주의, 합리주의다. 일체의 반지성주의, 반계몽주의, 반인문주의, 탈근대사상은 공자의 적이다. 중국이 공자묘를 때려 부순 사실에서 보듯이 마르크스는 물리력에 호소하는 점에서 반지성주의가 상당하다. 공자가 위대한 스승인 이유는 그의 직업이 스승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스승의 역할에 충실했다. 스승은 무엇을 하는가? 제자를 가르친다. 제자란 무엇인가? 평등한 동생들이다. 스승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한 법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원시 부족민으로 태어난다. 의사결정능력을 배워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이 된다. 공자는 제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평등한 동료로 묶어서 나란히 출발점에 세웠다. 그럴 때 인간은 강해진다. 공자는 지식을 전수한 사람이 아니라 문명의 시스템을 건설한 사람이다. 에너지는 시스템에서 나온다. 인간은 누구나 원시 부족민으로 태어난다. 문명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발가벗고 들판을 뛰어다녀야 정상인데 갑자기 이상한 옷을 입고 괴상한 책상에 앉아 얄궂은 펜을 든다. 적응하기 어렵다. 인간의 신체 구조부터 동굴 생활에 맞추어져 있는데 말이다. 나무를 오르고 조가비를 잡고 풀뿌리 캐고 사슴을 쫓아서 들판을 뛰어다녀야 할 텐데 말이다. 인류는 두 갈래 갈림길 앞에 선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가? 문명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공자의 가르침이다.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문명의 진보라는 거대한 에너지 흐름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한다. 공자는 어떤 지식을 전수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에너지 효율의 시스템에 올려 태운 것이다. 시스템에 속해 있으면 효율적으로 되어 더 많은 힘을 획득한다. 무엇인가? 평등한 동료를 얻는다. 내 편을 획득한다. 공자가 준 것은 내 편이다.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료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여전히 원시의 부족주의 본능이 살아있다. 인간은 언제라도 권력을 원한다. 권력은 인의가 만든다. 전쟁도 권력을 만들고, 민주주의도 권력을 만들고, 주술도 권력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냥 살았다. 학자들이 몽골의 많은 무덤을 발굴해 봤다. 유전자를 조사해 봤더니 5천 년 전에는 무려 1천 년 동안 3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전혀 교류하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유럽인과 고아시아인과 시베리아인이 몽골고원의 한 귀퉁이씩을 차지하고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3500년 전에 흉노족이 등장하면서 갑자기 섞여 버렸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지금부터 3500년 전에 풀무와 바퀴가 서쪽에서 전해져 왔다. 목축에서 유목으로 바뀌었다. 유목민은 항상 이동한다. 이동하면 핏줄이 섞이는 것이다. 흉노는 여러 민족이 섞인 일종의 제국이다. 대규모 이동을 하려면 튼튼한 바퀴가 있어야 한다. 바퀴축과 테는 쇠로 만든다. 이후 다시는 원래의 평화로 돌아가지 못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를 유지하게 하는 것은 권력이며, 권력을 만드는 것은 전쟁이고, 전쟁을 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만드는 기술은 민주주의고, 전쟁도 민주주의도 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만드는 방법은 교육이고, 교육의 내용은 인의이며 인의는 맹목적인 대항권력을 만드는 기술인 주술권력을 극복하는 것이다. 괴력난신의 극복이 인의다. 이것으로 무엇을 하는가? 사회화를 한다. 사회화하면 무엇을 얻는가? 수평적인 동료를 얻는다. 납득이 되는 정당한 권력을 얻는다. 어떻게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곧 대의명분이다. 서로 평등한 동료가 되는 것이 대의다. 곧 사랑이다. 인류는 세 가지 방법으로 권력을 창출한다. 경쟁, 사랑, 대항이다. 경쟁은 전쟁과 민주주의다. 전쟁은 이기는 자가 권력을 잡는다. 민주주의는 입씨름으로 전쟁한다. 둘 다 경쟁이라는 본질은 같다. 둘은 사랑이다. 다수의 이익을 통한 권력창출이다. 공자의 인의는 교육을 통해 다수에게 이익을 주는 방법으로 권력을 낳는다. 동료를 얻는 방법으로 권력을 얻는다. 세 번째는 대항이다. 무조건 상대의 반대로 가면 안티권력이 생긴다. 청개구리 권력이다. 하라면 하지 않는다. 가라면 가지 않는다. 교실에서 일진이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범죄자의 세력화다. 무당은 주술로 정치권력에 대항한다. 종교는 두 번째 사랑권력과 세 번째 주술권력을 섞어서 첫 번째 경쟁권력에 대항한다. 세분하자면 총칼로 먹는 정치권력, 정치권력에 맞서는 대항권력, 자본의 효율권력, 스승의 교육권력, 무당의 주술권력이 있다. 어떻게든 권력은 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가 있으니까. 원시상태로 돌아가서 담장을 높이고 서로 교류하지 않으면 되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까. 엎질러진 물이다.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대항권력, 주술권력이 조직하기 쉽다는 점이다. 노자가 먹히고 손자병법이 인기가 있는 이유다. 그러나 싼게 비지떡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손자병법은 적의 힘을 역이용하는 대항권력이다. 노자는 괴력난신을 판매하는 주술권력이다. 김어준이 음모론 지어내기만큼 쉽고 진중권의 정부 비판하기만큼 쉽다. 진중권은 초딩의 반사놀이 수법을 쓴다. 내로남불 타령이 그것이다. 니들의 주장으로 니들의 행동을 깬다는 수법이다. 집권당 숙명이다. 집권세력은 자기네가 주장한게 있기 때문에 무조건 진중권 수법에 깨지게 되어 있다. 야당은 비판할 수 없다. 하는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하나씩 정책이 성과를 낸다. 진중권들은 주술사의 편리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 인류는 권력 앞에 솔직하지 않다. 이런저런 말을 내뱉지만 본질은 권력이다. '내게 권력을 다오.' 이렇게 말하는 자는 없다. 문재인이 어떻다 하고 시비를 건다.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안철수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보면 '나를 대통령 시켜다오.' 이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진중권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보면 ‘국이도 장관 먹고 시민이도 장관 먹고 그런데 난 뭐냐?’ 이 말의 무한반복. 강자의 정치권력은 폭주한다. 민주주의는 브레이크를 걸어 균형을 잡는다. 대항권력은 주술로 빠진다. 공자의 인의는 인류를 통합시켜 전진하게 한다. 자본의 효율권력은 중립적이다. 인류에게는 다섯 가지 권력이 있다. 국가는 권력의 총량을 증대시켜야 한다. 인간은 밥이 아니라 권력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많이 한 나라가 흥했다. 전쟁이 옳아서? 아니다. 어쨌든 전쟁이 권력을 창출하는 것은 맞다. 역사의 90퍼센트는 전쟁사라 하겠다. 역사의 세 살인귀 나폴레옹, 알렉산더, 징기스칸이 숭상되는 이유다. 그냥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냥 사람을 많이 죽였을 뿐인데 영웅으로 떠받들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이 권력을 창출했고 그 권력이 동서양의 교류를 촉진시켜 인류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좋은 것이나 통제권을 벗어나면 위태롭다. 민주주의는 훌륭하다. 권력의 폭주를 감시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주의가 어떤 균형에 이르게 할 뿐 거기서 앞서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주의가 앞서가는 나라의 폭주를 차단하지만 뒤에 남은 나라들에 희망을 주지는 못한다. 후진국에서 독재가 기승을 부리는 이유다. 왜 한국인은 박정희 독재를 받아들였나? 당시로는 뾰족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선진국의 속도조절용이지 후진국의 따라잡기 용도가 아니다. 민주주의만으로 안 되고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그것이 공자의 교육권력이다.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후진국은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만으로 못 이기고 민주 플러스 교육의 힘으로 이긴다. 잘 나가던 선진국들이 함정에 빠진 이유는 안티세력의 묻지마 대항권력과 사이비들의 주술권력 때문이다. 그것이 필자가 말하는 부족주의다. 반대하라. 그러면 권력을 얻을 것이다. 개소리를 하라. 그러면 추종자를 거느릴 것이다. 사이비 목사들도 이를 실천하고 땡중들도 이를 실천한다. 옛날에는 훌륭한 종교인이 많았다. 기독교의 조만식과 불교의 성철이 있었다. 지금은 죄다 퇴행하고 있다.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그때는 문명의 백지상태에서 나란히 출발점에 섰기 때문에 목사와 스님들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감을 잃었다.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을 당해낼 수 없다. 치고 나가지 못하고 패배주의에 젖어 안티나 하고 있다. 대항권력과 주술권력을 찾아 퇴행하고 있다. 목사는 부흥회라는 명목의 사기쇼를 펼치고 스님은 부적을 쓰는가 하면 사주에 관상에 작명까지 부업으로 삼고 있다. 반 점쟁이가 되었다. 결국 답은 권력이다. 권력을 엄밀하게 디자인해야 한다. 정치권력의 폭주를 막고 주술권력의 퇴행을 막아야 한다. 자력으로 가야 한다. 민주주의만으로 안 되고 교육권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식만으로 안 되고 지식의 시스템이 작동해야 한다. 배우는게 남는게 아니고 배우는 과정에서 얻은 평등한 동료가 남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돈이 아니고, 쾌락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고, 편들어줄 내 편이 필요하다.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면 그것이 인생의 전부다. 나를 알아주는 동료를 얻으면 전부 얻은 것이고 동료를 잃으면 전부 잃은 것이다. 공자는 지식이 아니라 동료를 주었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무엇보다 권력 그 자체에 천착해야 한다. 도덕이니 윤리니 정의니 평화니 이런 개소리로는 안 된다. 도덕이 아니라 권력이다. 정의가 아니라 권력이다. 행복이 아니라 내 편이다. 내가 내 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권력이다. 막연한 사랑으로는 안 된다. 합리성에 기초해야 내 가족이, 내 남편이, 내 아내가, 내 형제가, 내 동료가 끝끝내 내 편을 들어준다. 천하의 큰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큰 사건을 일으키고 가담하여 패스를 주고받으며 함께 나아가기다. 그것이 인간이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전부다. 올바른 권력으로 잘못된 권력을 막는다. 권력 자체를 부정하는 노자의 삽질이라면 곤란하다. 스님들의 내려놓아라거니 비워라거니 하는 수작은 권력부정이다. 그것은 사회부정, 인간부정, 자기부정이니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다. 자본을 원천부정하는 비뚤어진 사회주의자의 소행도 황당하다. 에덴동산의 문명부정이다. 남산의 잠두봉은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남산의 잠두봉이 어떤 의도로, 무슨 꿍꿍이로,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윤리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정의롭게 거기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권력은 자연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옳게 디자인하여 건물을 세우거나 혹은 잘못 디자인하여 산사태에 깔려 죽거나다. 권력은 물과 같다. 잘 다스리면 이롭고 잘못하면 물에 빠져 죽는다. 맹목적으로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안티행동, 주술행동은 곤란하다. 권력의 남용은 당연히 곤란하다. 최종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인문주의, 지성주의, 계몽주의, 합리주의다. 탈근대사상은 권력을 원천부정하는 점에서 그들이 미워하는 전체주의만큼이나 위태롭다. 그것은 비뚤어진 주술사의 행동이다. 자동차는 원래 위험한 물건이다. 조심해서 잘 운전하는 수밖에 없다. 자동차를 버리는 자는 어리석다. 자동차로 폭주하는 자도 위험하다. 예수든 석가든 플라톤이든 소크라테스든 니체든 일개 학자에 불과하다. 참된 스승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함께 하는 시스템을 주지 않았다. 스승이 스승인 이유는 스승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자가 있기 때문에 스승의 권력이 성립한다. 제자들이 평등한 동료일 때 스승의 권력은 정당화된다. 그렇지 않다면 지식의 거래에 불과하다. 권력을 부정하는 비뚤어진 자는 스승이 될 수 없다. 노자는 스승이 아니다. 일부 배울 점이 있다고 해도 스승은 아니다. 스승을 부정하는 자가 스승이 될 수는 없는 이치다. 스승은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고, 먼저 배운 사람이 아니고,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고, 수평적인 동료로 이루어진 제자들에 대해 정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다. 내 편을 내 편으로 부릴 자격을 가진 사람이 스승이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가는 에너지 흐름이 있다. 질의 포지션에 선 사람이다. 질은 결합한다. 무리를 결합해서 평등한 동료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스승이다. 차별하는 자는 스승이 아니다. 권력을 디자인하고 통제하는 사람이 스승이다. 코로나19 사태에 교훈을 받아야 한다. 정치권력은 폭주할 수 있다. 대항권력은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 자본권력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 주술권력은 억제되어야 한다. 인의권력은 교육되어야 한다. 세상은 권력이고 권력은 시스템이며 문명은 시스템의 진보다. 지성주의, 인문주의,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동료주의가 아니면 안 된다. 원시인의 탈주본능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은 인간다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인간성의 어떤 측면을 버려서 얻어진다. ###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함양에 있지 않다. 의사결정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결정은 한계가 있다. 집단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집단은 장기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큰 결정은 큰 사건에서 나온다. 큰 사건을 일으키려면 큰 집단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 집단은 의리로 뭉쳐진 엘리트 집단이어야 한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대의로 뭉쳐 장기전을 수행하는 엘리트 집단이 인류의 뇌가 되어야 한다. 조선의 사대부가 그런 집단지성의 모색 혹은 실험이 된다. 동료를 잃고 고립된 개인은 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누가 희생하지 않고 천하를 거는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에 없고 우리에 있는 그것은 의리다. |
오늘도 감동과 지식을 듬뿍 받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