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진리다. 구조론은 아는 사람들이 진리를 논하는 곳이다. 띨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개소리해대면 피곤하다. 솔직히 말이 통하는가? 대화가 되고 있는가? 어린애하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된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상대가 곡해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해했다면 오해한 것이다. 곡해와 왜곡이 짜증 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런 거다. 무신론자와는 수준 높은 대화를 할 수 없다.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영화가 있다. 인류가 모두 불임에 빠져 인류의 대가 끊어질 위기다. 그게 허무다. 사건이 다음 단계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 허무다. 그렇다면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아기가 태어나야 연결된다. 그러나 무신론자가 보기에는 아기가 태어나든 말든 상관없다. 아기가 태어난다고 해서 달라지는게 뭐지? 무신론은 무의미론이라는 말이다. 허무주의다. 허무하면 닥쳐. 허무하면 의미가 없고 의미가 없으면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닥쳐. 언어는 사건을 연결한다. 연결되지 않는데 왜 연결해? 허무하다는 말은 사건이 끊어졌다는 뜻이다. 인생에는 의미와 허무가 있다. 의미는 사건을 연결하고 허무는 사건을 종결한다. 둘은 동전의 양면이니 의미 있는 만큼 허무하고 허무한 만큼 의미 있다. 그중에서 인간은 의미를 논하고 허무를 닥친다. 죽은 자식 불알은 만지지 않는다. 16강에 못 올라간 월드컵 경기는 중계하지 않는다. 시합이 열리지 않는데 어떻게 중계하냐? 바보야! 막연한 허무타령은 탈락한 팀의 다음 시합 중계계획과 같다. 신의 의미가 중요하다. 사건은 존재하는가? 월드컵은 열리고 있는가? 사건이 있다면 중심이 있다. 연결은 중심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움직이는 둘의 연결은 반드시 중심을 잇는다. 전화로 연결하든 이메일로 연결하든 중심에 연결된다. 신의 부정은 중심의 부정이자 연결의 부정인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신이라 부르는가? 신이 수염 난 할아버지를 말하는건 아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주라는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이고 다음 단계가 있다는 거다. 사건은 계속 진행된다. 신의 부정은 사건의 부정이다. 무신론은 무의미론이고 허무주의이며 다음 계획이 없다. 인류의 다음 계획을 말할 수 없다. 종교인들도 대화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뭐든 신에게 위임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므로 그들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신을 긍정하면서 그만큼 인간을 부정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는 신의 부정과 같다. 종교인들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지만 깊은 의미에서는 종교도 무신론이다. 그러므로 지구에는 무신론을 표방하는 무신론자와 무신론을 부정하는 무신론자만 있다. 진지한 대화 상대는 어디에도 없다. 대다수의 종교인은 사실상 신과의 연결을 부정하므로 대화할 수 없다. 종교인과 무신론자는 아는 사람의 진지한 대화상대가 될 수 없다. 신을 긍정한다는 것은 사건을 긍정한다는 것이고 의미를 긍정한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가 공간에 내던져진 존재 곧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반영하여 사건 속에서 호흡하는 동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움직이면 반드시 중심이 생긴다. 그리고 연결은 오직 중심과만 연결된다. 정지해 있는 물체는 그냥 연결하면 된다. 그러나 움직이는 말에 올라타려면? 날아가는 새를 잡는다면? 물에 떠 있는 배의 난간을 붙잡으면? 난간을 잡으면 배의 중심이 기울어진다. 중심을 흔든다. 우주 안의 모든 움직이는 것은 오직 중심과 연결될 수 있을 뿐이며 주변과는 연결될 수 없다. 인간이든 문명이든 진화든 우주든 모두 움직이는 동적 존재다. 연결은 반드시 중심을 건드리게 된다. 중심의 존재를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구조론에서 말하는 신의 의미다. 진지한 대화를 하려면 신이라는 개념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 개념을 배제하면 사건과 의미와 다음 단계를 말할 근거가 없다는 말이다. 종교인들은 이 대화에 낄 자격이 없다. 허무주의자와 무신론자도 대화에 끼지 못한다.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의 다음 단계를 말할 수 없다.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준비가 된 사람만 구조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 내 입에 맞는 떡을 넣어줘. 나를 케어해 줘.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줘. 이런 식으로 찌질하게 나오는 어린이는 퇴장이다. 진지한 대화의 준비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진도를 나가보기로 하자. 구조론은 진리다. 이해했는가? 모르겠다면 뒤집어 보자. 진리는 구조론이다. 같은 말이나 순서가 다르다. 전제가 다른 거다. 만약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는 구조론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리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다. 진리가 없다고 믿는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므로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허무는 의미를 부정하고, 의미는 곧 연결이며, 연결의 수단은 대화다. 대화를 부정하는 자와 대화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과는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함께 보면서 대화할 수 없다. 계획이라는게 원래 없다고 믿는 사람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6강에 탈락해서 8강전이 무산되었다고 믿는 사람과 다음 시합의 중계계획을 두고 대화할 수는 없다.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진리는 인간과 어떻든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진리는 주변과 연결할 수 있는 촉수를 가져야 한다. 진리는 입자 형태일 수 없다. 입자는 공간에 위치하는 개념이므로 시간성을 반영할 수 없다. 존재의 동적 성질을 반영할 수 없다. 우리의 계획은 시간을 타고 가는 동적인 존재다. 진리는 일의 프로세스일 수밖에 없다. 각이 셋인 사각형이라거나, 네모난 동그라미라거나, 굽은 직선 같은 개똥 같은 소리는 곤란하다. ‘진리가 아닌 진리’라는 말은 언어파괴다. 언어는 약속인데 약속을 깨는 자와 언어를 공유할 수 없다.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라면 언어도단이다. 구조는 겹치는 부분이다. 겹치는 부분이 뼈대가 되고 덧입혀진 부분이 살이 되어 존재의 뼈와 살을 이루니 곧 절대성과 상대성이다. 겹치는 부분을 절대라고 하고 겹치지 않는 부분을 상대라고 한다. 상대성은 각자 알아서 할 영역이고 절대성은 사전에 약속해 둬야 한다. 미리 약속하는게 진리다. 축구를 한다면 룰은 사전에 정하지만 전술은 각자가 알아서 한다. 우리편의 전술을 상대팀에게 알려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적에게 반드시 통보해야 하는 부분이 룰이다. 시합의 룰을 우리만 알고 적에게 감추는 일은 없다. 그 경우는 적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도 알고 나도 알아야 하는 부분이 절대성이고 나만 알고 적은 몰라야 하는 부분은 상대성이다. 절대와 상대는 항상 같이 간다. 그래서 세상은 일원론이다.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물체가 간다면 그림자가 따라가듯이 절대가 있으면 언제나 상대가 있다. 우리는 절대성에 해당하는 부분을 논하기로 하며 그것이 구조론이다. 진리는 둘이 공유하는 절대성 부분을 따로 빼서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리 약속했기 때문에 어김이 없다. 모든 진리는 절대진리다. 상대적인 진리라는 표현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상대적인 전술이라면 약속하지 않고 약속하지 않으므로 지켜질 리 없고 지켜지지 않으므로 진리가 아니다. 구조론이 진리라는 말은 역으로 진리가 있다면 구조론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며 이는 진리가 지켜지는 약속의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며 곧 진리의 정의다. 왜 그렇게 되는가는 언어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므로 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따질 수 없다. 룰은 참과 거짓의 판단이 아니고 미리 정해놓는 거다. 진리가 과연 침일까? 이런 말은 불성립이다. 룰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질문하면 넌센스다. 국어를 배워야 한다. 룰은 있느냐 없느냐다. 시합이 끝난 후 심판이 룰을 제대로 적용했는지 따질 때 참과 거짓을 논하는 것이다. 룰은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 없고 유무를 판단할 뿐이다. 진리는 침거짓을 판단할 수 없고 유무를 판단할 뿐이다. 진리는 언제나 참이며 그래서 진리라고 한다. 결론은 우리가 진리를 시간적인 순서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건을 반영해야 한다. 인간들은 뭐든 공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므로 아인슈타인도 답답해서 가슴을 쥐어뜯는다. 진리가 있느냐는 말은 사건의 진행에서 사전에 약속된 부분이 있느냐는 말이다. 진리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건이 깨지기 때문이다. 룰이 없으면 시합은 불성립이기 때문이다. 시합이 진행 중인데 룰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넌센스다. 그런 말은 시합을 하기 전에 말하는 것이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건이 깨지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우주가 정적 존재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인식은 액션이기 때문이다. 우주가 동적 존재라면 서로 충돌하여 깨진다. 그렇다면 역시 우리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우주가 정적 존재이든 동적 존재이든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데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동과 정이 조화되어 있다는 말이고 이는 약속된 부분과 약속되지 않은 부분 곧 절대성과 상대성이 공존한다는 말이며 그 약속된 절대성의 부분을 우리는 진리라고 하고 혹은 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진리는 시간성을 반영하므로 구조론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 약속된 부분과 약속되지 않는 부분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종교인은 신에게 모두 위임한다. 이는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약속되지 않은 우리팀의 전술을 부정하고 승패는 미리 정해져 있다고 우기는 거다. 그렇다면 시합을 뛸 필요가 없잖아. 이는 허무주의다. 말했듯이 종교는 허무주의이자 무신론이다. 신이 다 해 먹고 인간은 할 것이 없다면 신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된다. 신과 인간이 단절되면 사건은 종결된다. 사건이 종결되면 신은 부정된다. 정과 동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는 형태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축과 대칭 형태다. 대칭된 둘이 축 하나를 공유하므로 약속된 것이고 대칭된 둘은 각자 별도로 움직이므로 약속되지 않은 부분이다. 심판은 공유되는 부분이고 응원단은 공유되지 않는 부분이다. 심판은 공정해야 하지만 응원단은 당연히 공정하지 않다. 공정하게 상대팀도 응원해주자? 그건 응원이 아니다. 신은 있다. 사건의 전개는 미리 약속된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절대성이 작용하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심이 있고 코어가 있고 중심이 있으므로 진리가 있다. 만약 없다면 외부와 연결할 수도 없다. 모든 연결은 중심부의 연결이다. 한국과 미국이 연결한다면 한국의 중심과 미국의 중심이 연결하는 것이다.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통화해야 연결이지 한국의 대통령이 뉴욕의 어떤 노숙자와 전화했다면 미국과 연결한게 아니다. 우리는 공간 위주로 사유하므로 착각한다. 시간성을 말해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흐르면 움직이고 움직이면 연결이 끊어진다. 만약 움직였는데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면 둘은 중심부가 연결된 것이다. 지구만 도는게 아니고 태양도 돈다. 태양이 움직이므로 지구와 태양은 중심이 연결되어 있다. 지구도 태양을 흔들 수 있다는 말이다. 인간도 신을 흔들 수 있다. 그래야 신과의 연결이 유의미한 것이다. 문명이 진보해야 하는 이유, 역사가 발전해야 하는 이유,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 새로운 뉴스, 새로운 유행, 새로운 트렌다가 발굴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변화가 없으면 연결이 끊기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