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시스템에 있다. 진보가 분열되는 이유는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참여자의 절대 숫자가 많아야 구조가 안정된다. 내부에 밸런스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범선이 바닥짐을 싣는 이유다. 메뚜기도 제곱미터당 30마리가 넘어야 방향성이 생긴다. 그때부터 외부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체 논리를 따라가므로 탄탄해진다. 숫자를 늘리는 방법은 지자체를 장악하는 것이다. 구청장과 시의회에 진보 인사를 밀어 넣어야 한다. 이렇듯 언제나 답은 있다. 답을 알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낙관주의가 있어야 장기전을 할 수 있다. 비관주의에 빠지면 테러를 저지르거나 단기전 위주의 모험주의, 한건주의에 매몰된다. 비관주의 큰 문제는 옆길로 새는 것이다. 진보의 최종승리보다는 개인의 명성에 집착한다. 어차피 못 이길 싸움이므로 명성이라도 얻어 명맥을 잇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을 한다. 명성을 위해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던 동료를 짓밟는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이 진중권 병이다. 진중권이 저렇게 된 것은 '안티조선 우리모두' 시절의 자신감과 낙관주의를 잃었기 때문이다. 숫자가 적으면 비관론이 우세해져서 동료를 불신하며 '내가 아니면 안돼' 하는 독선에 빠진다. 그럴수록 영웅을 찾고, 도덕가를 찾고, 순결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모 아니면 도' 식의 도박을 하게 된다.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 박원순은 비관주의자 진중권이 보기에는 순결한 도덕가요, 진보의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만한 영웅이었다. 이런 식의 영웅주의가 문제다. 필자는 생태, 유기농, 천연 이런 말 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안철수와 박원순은 비슷하다. 둘 다 배낭 매고 운동화 신고 걷기 좋아한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거나 마라톤 하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몸으로 때우는 사람은 불안요소가 있는 거다. 박원순 한 명을 잃었을 뿐 진보진영의 타격은 크지 않다. 박원순은 의리를 지켰으므로 우리도 의리로 답해야 한다. 사람을 잃는 것은 작게 잃는 것이요 의리를 잃는 것이 크게 잃는 것이다. 의리가 다수파를 만들고 다수가 되면 낙관론이 우세해져서 판이 안정된다. 다수가 되어야 도덕적으로 변한다. 원래 서구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없었다. 도덕은 18세기에 부르주아 문화가 만들었다. 중산층이 여유를 찾으면서 한가하게 도덕을 논하는 것이다. 다수의 눈치를 보고 분위기를 맞춰주는게 도덕이다. 배현진중권의 똥탕전쟁을 보면 아스퍼거와 소시오패스 듀오의 쌍끌이가 아닌가 싶다. 논리도 없고 지적인 바탕도 없고 오로지 아스퍼거의 특별한 감각과 소시오패스의 과감함이 있을 뿐이다. 들이대기만 잘한다. 박원순은 문재인과 달리 스킨십을 잘한다. 친화력이 뛰어나고 소통능력이 대단하다. 위험하다. 바이든도 같은 구설수에 올랐다. 바이든은 대통령에 출마하고 박원순은 죽었다. 차이가 있다면 미국인은 바이든을 칼로 찌르지 않았고 한국인은 박원순을 칼로 찔렀다는 점이다. 누가 찔렀는가? 진중권식 영웅주의자가 등을 찔렀다. 순결한 영웅에 대한 판타지가 큰 만큼 실망감도 크기 때문이다. 적의 칼은 막아주는 동지가 있으니 괜찮다. 등 뒤에서 찔러야 사람이 죽는다. 순결주의 진보가 노무현을 죽이고 노회찬을 죽이고 박원순을 죽였다. 우리는 사회의 상식과 상규에 의지해야 한다. 극단적인 자기희생, 헌신, 도덕, 순결, 영웅놀음은 걷어치워야 한다. 상식으로 돌아가자. 효자나 도덕가는 부인을 힘들게 한다. 흥부는 착해서 명성을 얻지만 흥부 마누라는 남편 잘못 만나서 무슨 고생이냐고? 소크라테스도 부인 크산티페에게 밉보여 구정물을 덮어쓴 판이다. 도덕가는 주변을 힘들게 한다. 진보는 다수가 의리를 지켜야 한다. 예쁘고 재능이 있어도 극단주의자는 멀리해야 한다. 진보 일각의 비관주의가 문제다. 극단적인 자기희생, 헌신, 도덕, 순결, 영웅주의가 왜 강조되는가? 그게 언플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언플로 뜨려다가 언론에 트집을 잡혀 죽는 악순환이다. 언제나 기레기의 펜은 칼보다 쉽게 사람을 죽여 왔다. 기레기가 띄워주는 인물을 경계하라. |
"의리가 다수파를 만들고 다수가 되면 낙관론이 우세해져서 판이 안정된다. 다수가 되어야 도덕적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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