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술이부작과 온고지신 공자의 술이부작, 온고지신을 한나라 시절에 유가들이 잘못 해석하는 바람에 많은 혼란이 일어났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문이다. 분서갱유로 한동안 유가의 대가 끊어졌다가 나중에 부활했는데 문제는 훈고학의 등장이다. 책이 사라졌는데 골방에서 찾아낸 사람이 있다. 문제는 믿을 수 있느냐다. 공자의 책을 자신이 모두 암기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골방에서 찾아냈다는 사람이 충돌하여 서로 디스한 것이 훈고학이다. 유교의 본질은 잊혀지고 유가 특유의 과장된 복장이나 허례허식만 남아서 우스꽝스럽게 되었다. 고제 유방은 유생만 만나면 조롱하며 골탕 먹였다고 하니 분위기를 알만하다. 한나라 초기는 도교가 지배했다. 유교는 제사를 비롯한 행사에만 사용되었다. 술이부작과 온고지신은 우스꽝스런 복장으로 눈요깃거리가 되고 놀림거리가 된 유교가 서로 디스하면서 강조된 것이다. 근본을 봐야 한다. 공자는 여러 가지 말을 했다. 그중에 살아남은 언어가 술이부작 온고지신이다. 왜 살아남았을까? 영감을 줬기 때문이다. 공자의 더 좋은 말도 많았지만 잊혀졌다. 왜? 이해한 사람이 없으니까. 논어는 공자가 쓴 게 아니다. 제자들이 잊어먹지 않고 기억한 것이 논어에 모였다. 집필을 주도한 증자의 수준에 맞는 말만 남았다. 문제는 공자가 머리가 나쁘다고 증자를 디스한 점이다. 공자의 제자 중에서 아둔하다고 여러 번 욕 먹은 사람이 논어를 썼으니 혀를 찰 일이다. 술이부작 온고지신의 본질은 연역적 사고다. 술이부작은 이미 주어진 것에서 답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게 연역이다. 온고지신은 옛것에 기초하여 새것으로 나아가라는 말인데 그게 연역이다. 그래서 영감을 준다. 원인은 옛것이고 결과는 새것이니 원인의 바운더리 안에서 결과를 찾는게 수학이고 연역이다. 게임의 규칙을 먼저 정하고 그 규칙 안에서만 게임을 운영한다. 전제를 미리 깔아놓고 그 울타리 안에서 진술하는 것이 명제다. 그것이 논리적 접근이다. 전건의 범위 안에서 후건을 조직하는게 언술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은 이러한 일원론을 따르고 있다. 예컨대 이런 거다. 먼저 땅장사가 온다. 토지를 구획하고 빠진다. 일정한 이윤을 챙겨간다. 다음 건축업자가 온다. 역시 건물을 짓고 빠진다. 다음 백화점이 들어선다. 입점업체가 들어선다. 마지막에 고객이 찾아온다. 순서대로 먹고 빠지기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키코 사태 같이 연쇄부도가 일어난다. 자본주의 원리는 이렇듯 먹고 빠지기다. 그런데 빠지지 않고 얼쩡대며 방해한다면 피곤한 것이다. 전건과 후건, 전제와 진술, 원인과 결과, 온고와 지신, 술이와 부작, 사단과 칠정, 음양과 오행을 이런 먹고빠지기로 보면 그게 일원론 사상이다. 그런데 버티고 앉아서 잔소리를 하니 재앙이 일어난다. 퇴계의 사단칠정은 양반의 인의예지 사단이 상놈의 희로애락애오욕 칠정 머리꼭지에 앉아서 감독하며 잔소리하는 것이다. SH공사가 건축가를 억압하고 재벌이 중소기업을 억압하고 백화점이 입점업체를 착취하며 괴롭히는게 퇴계 이원론이다. 우주의 근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연쇄적인 먹고 빠지기 연결고리로 보는게 일원론이고 둘이 치고받고 하는게 이원론이다. 브라흐마 신은 창조하고 떠났다. 먹고 빠진 것이다. 더 간섭하지 않는다. 비슈누는 다스리고 유지하며 시바는 파괴한다. 시작과 현재와 종결로 하나의 사이클이 완성된다. 세상을 이러한 연결과정으로 보지 않으면? 퇴계처럼 단서를 찾아 헤맨다. 센놈을 찾는다. 가장 센 신이 누구지? 이런 식이다. 최초의 단서는? 원자인가? 양자인가? 소립자인가? 영혼인가? 사원소설의 원소인가? 음양인가? 오행인가? 미궁에 빠진다. 영혼설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이다. 위험하다. 차별의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일원론으로 보면 먼저 LH공사 먹고 빠지고, 다음 건설회사가 먹고 빠지고, 다음 백화점이 먹고 빠지고, 다음 입점업체가 먹고 빠진다. 퇴계 이원론으로 가면 도덕과 순결로 무장한 채 상놈을 감독하며 빠져주지 않는다. 아주 신혼여행지까지 따라붙을 기세다. 음양에는 오행이 따라붙고, 빛에는 어둠이 따라붙고, 하느님에게는 사탄이 따라붙고, 양반 뒤에 상놈이 따라붙는다는 식의 이원론은 고약하다. 율곡의 기 일원론으로 보면 최초의 단서는 없으며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에서 사건이 격발되면 단계적으로 먹고 빠지는 프로세스의 연결고리가 있을 뿐이다. 사건이 격발되었을 때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 전건과 후건, 전제와 진술, 명사와 동사의 수순이 있을 뿐이다. 사건의 메커니즘이 존재할 뿐이며 단서는 없다. 단서를 찾으면 안 된다. 단서는 앞으로 가는 건데 뒤로 가야 한다. 단서가 있다고 믿으면 명목은 유심론인데 유물론의 경향을 띠게 된다. 플라톤의 이데아설도 이데아라는 물질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기 쉽다. 최초의 단서가 있으므로 그 단서를 키워야 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도덕심을 함양해서 내부에 순결과 고상함이라는 엑기스를 만땅 충전해야 한다고 여긴다. 명문대를 가야 고결하고 숭고한 엑기스가 만땅 충전된다는 식이다. 검찰이 지쪼대로 나대는 이유도 사법고시에 붙으면 그런 엑기스가 충전된다는 식의 사고 때문이다. 그런 것은 없다. 사건을 진행하는 시간적인 프로세스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구조다. 의사결정구조가 있을 뿐이다. 무엇이 다른가? 이원론은 선과 악이 공간에 공존하고 인간은 그 둘 중에서 선택한다. 일원론은 먹고 빠지므로 선택하지 않는다. 선을 먹고 남는 껍질이 악이다. 시간은 언제나 일원론이다. 같은 하나가 시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발견이 발명에 앞선다. 아침에 발견하고, 점심에 발명하고, 저녁에 제조하면, 밤중에 상품이 나오고, 다음날 시장에 진열되니 이건 시간의 순서일 뿐이다. CEO가 먼저 방향을 정하면, 이사들이 협력업체를 결정하고, 부장이 상품을 선택하면, 과장급 실무자가 현장을 담당한다. 이것은 시간적인 순서다. CEO는 방향을 정하고 빠진다. 이사도 부장도 차례로 빠지고 과장급이 결정한다. 집에 안 가고 계속 눌러 붙어 있으면 피곤하다. 빠져주는게 일원론이다. 인의예지를 충전해야 해. 인을 만땅으로 채웠는데 의가 좀 부족하군. 의를 더 채워봐. 인과 예를 채웠으니 이제 예를 집어넣자고. 센 걸로 팍팍 넣어줘. 이런 식의 뭘 채운다는 플러스 사고를 하므로 김성근식 노력야구, 몸빵야구가 된다. 그러다가 트라이애슬론 장윤정이 최숙현을 죽음으로 이끈다. 철인 3종을 하려면 죽음 문턱까지 가봐야 한다. 실제로 장윤정은 죽을 뻔한 적이 있다. 죽음을 겪어본 자가 후배에게 초죽음을 강요한다. 왜 감독과 코치와 선배가 적절히 빠져주지 않고 따라붙는가? 이원론의 병폐다. 선이 악을 감독하고 선배가 후배를 감독해야 한다는 이원론적 사고방식 때문이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면 하체로 던진다. 와인드업을 하면서 하체가 빠진다. 다음 상체가 빠지고 어깨에 넘긴다. 어깨가 빠지고 팔꿈치에 넘긴다. 팔꿈치가 빠지고 손목에 넘긴다. 단계적으로 넘기면 일원론이다. 타격자세가 나쁘면 오른 어깨가 방해하고 팔꿈치가 방해한다. 빠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빠져준다는 말이다. 원인과 결과든 선과 악이든 공존하며 치고받는게 아니라 빠져주는 것이다. 잘 빠져주면 선이고 못 빠져서 버벅대면 악이다. 빠져주지 않으므로 선택해야 한다. 선택하면 이미 나빠져 있다. 빠져주지 않고 사적 심부름을 시키므로 로드매니저가 항의한다. 6시 땡이면 빠져줘야 하는데 집에 안 가고 사무실에서 버티는 부장과 과장이 고약하다. 빠져주는게 미덕이다. 적절히 빠져주지 않고 도덕과 순결과 고결함으로 무장하고 옆에서 비벼대므로 말썽이 일어나는 것이다. 퇴근만 잘해도 부하들에게 존경받는다. 빠지지 않고 엉기는 이원론을 경계할 일이다. |
"구조론은 마이너스다. 빠져준다는 말이다. 원인과 결과든 선과 악이든 공존하며 치고받는게 아니라 빠져주는 것이다. 잘 빠져주면 선이고 못 빠져서 버벅대면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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