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프로세스다. 뭐든지 절차가 있다. 문제는 절차가 본질이라는 사실이 간과된다는 것이다.
예컨데 현명하고 인격이 뛰어난 리더라도 투표라는 절차를 거치질 않는다면? 대표성이 없으므로 집단의 협력을 이끌어낼수 없다. 집단의 저항을 받는다. 그 경우에는 리더가 아니다. 문제는 세상이 이렇듯 딱딱한 존재들이 아니라 애매한 반존재라는 것이다. 지지율이 50%인 리더와 100%인 리더는 다르다. 사랑으로 결속된 가정과 그렇지 않은 가정은 다르다. 민주주의로 균일한 국가와 부족연합 불균일 국가는 다르다. 이쑤시개로 나온 상품인데 너무커서 이를 쑤시지 못하면 내게는 이쑤시개가 아니다.
슈퍼컴퓨터라도 110v라서 쓰지 못한다면 고철이다. 일본으로 가져간다면 슈퍼컴 맞다. 무중력 우주비행선 안이라면 물마시는데 컵은 필요없다. 컵은 컵이 아니라 장식이다.
대상의 본질은 대상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과의 상호작용안에 있다. 보통은 대상안에 축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깥에 축이 있다. 입자 이전에 장이 있다. 장은 바깥에서 유도된다. 카톡이 유용하기 이전에 의사소통의 유용성이 있다. 이쑤시개는 치아에서 유도되고 상품은 소비자에서 유도되고 리더는 집단에서 유도된다. 그 유도되는 과정에서 바깥에 반작용하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자동차는 다 같은 자동차이나 수소차나 전기차냐 휘발류차냐 다르고 엔진이 다르고 마력이 다르다. 같은 것은 무엇이 같은가? 외부와 상호작용하는 지점이 같다. 이를 쑤시면 다 이쑤시개고 도로를 달리면 다 차다. 다른 것은 무엇이 다른가? 내부에서 조절되는 정도가 다르다. 마차는 마력을 쓰고 기차는 화력을 쓴다. 자전거 위에 사람이 타면 기어는 변속기고 장딴지는 엔진이고 ATP는 휘발류다. 인차라 할 수 있다. 에너지위상으로 보면 선풍기나 오토바이나 같다. 모터에 날개를 달면 선풍기고 모터에 바퀴를 달면 오토바이다.
거시세계의 반존재를 생각할 때, 입자이전의 장의 존재가 뚜렷해진다. 아프리카에 살면 국가의 존재란 것은 애매하다. 실제로 국가단위로 작동하는 게 드물테니까. 마찬가지로 세계사회는 애매하다. 세계가 하나의 사회단위로 작동을 드물게 하니까. UN이나 2차대전의 다국적 연합군이나 되야 세계사회가 실감난다. 사랑이 애매하면 사랑을 축으로 행동이 결정되지 않는다. 존재는 연출된다. 국가가 국가로 기능할때 국가는 있고 국가가 국가로 기능하지못할때 국가는 없다. 애매한 것이다. 힉스메커니즘에 의해 질량이 부여되기 전까지 질량은 없다. 질량도 없다가 있으니까 존재도 없다가 있는 것이다. 없다가 있는것이 연출되는 과정을 파헤치면 사건이다.
화성 침공이 있어야 전 세계 사람들이 균일해지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