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교육으로 갈아타자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동세서점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차이는 교육에 대한 관심의 정도에 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이 이 모양 이 꼴로 된 것은 교육이 망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요체는 최선의 의사결정구조를 건설하는데 있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다. 문제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칠 수 있느냐다. 방해자는 호르몬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본능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한다. 동물은 오줌을 묻혀 놓으면 가족으로 인식하고 더 공격하지 않는다. 냄새로 피아구분을 하는 것이다. 낯선 냄새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교육의 목적은 타자를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협력대상인 동료로 인식하게 하는데 있다. 호르몬이 바뀌어야 교육된 것이다. 차별과 혐오를 무지의 소산으로 본다면 안이하다. 일본이 혐한을 하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반일이 편향된 지식의 주입 때문이라 여긴다.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면 일본인도 변하고 한국인도 변할 것이라고 여긴다. 인간을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건 전략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둘 다 자신을 약자로 규정한다. 약자의 전략은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고 그 반응을 토대로 상대의 허점을 공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각을 세우고 상대의 약점을 찾아서 집적거리게 되어 있다. 결국 철학의 문제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한다. 90년대만 해도 일본이 강했기 때문에 혐한은 없었다. 한국은 일본문화를 개방했고 극장에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모노노케 히메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이 상영되었다. 일본이 약해지면서 혐한이 흥한 것이다. 서로가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니 답이 없는 교착상태다. 한국이 월등하게 강해져야 이 지루한 게임은 끝나게 되어 있다. 약자의 철학은 답이 없다. 더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강해진다. 공자의 철학이 강자의 철학이라면 노자의 철학은 약자의 철학이다. 서구권은 니체사상이 강자의 철학에 가깝지만 개인문제에 집착하는 소승적 태도에 매몰되어 있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권력의지로는 강해질 수 없고 다수가 힘을 합쳐야 강해진다. 대승적 태도가 아니면 안 된다. 기독교는 약자의 철학이다. 예수는 박해받았고 유대인은 노예로 끌려갔다. 서구사상은 대체로 약자의 철학이며 경쟁을 중시하는 일부 게르만족 관습이 강자의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집단적으로 강해져야 강자가 된다. 강자의 호르몬이 나와야 한다. 두목 자리에서 끌어 내려진 늙은 수컷 침팬지는 호르몬이 바뀌어 어리광부리며 늙은 암컷 침팬지들의 품에 안긴 이후 다시는 두목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 절치부심에 와신상담하는 도전자의 자세를 잃었기 때문이다. 강자의 철학이냐 약자의 철학이냐가 교육철학의 문제다. 방향이 한 번 정해지면 그 길로 계속 가게 된다. 20세기는 공장에서 일할 수 있는 노동자의 양성이 중요했다. 중등교육으로 충분하다. 작업 매뉴얼을 읽을 수 있는 정도면 교육이 잘된 것이다. 지금은 21세기다. 승부는 교육에서 난다. 올바른 교육철학이 없는 이유는 교사들이 교사의 입맛에 맞는 교육철학을 주문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했다. 교사들에게 아부하는 교육론이 진보교육, 민주교육으로 포장되었다. 빌어먹을! 공자의 교육사상이 옳다. 노자의 길을 가면 망한다. 존 듀이의 교육사상은 히피교육에 불과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말이 그러할 뿐 교사들에게 아부하는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목적도 없고 교육목표도 없다. 교육의 목적은 그룹의 가장 뛰어난 자와 대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지식을 모두의 지식으로 복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최대다수가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대중 속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도덕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주입으로 되는게 아니다. 치열한 토론과 경쟁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된다. 문제는 대화가 되는가다. 숫자를 모르면 수학자와 대화할 수 없고, 영어를 모르면 외국인과 대화할 수단이 없다. 기본은 갖추어야 한다. 어떻게든 레벨을 올려야 한다. 문제는 사회 분위기다. 두목 자리에 도전하는 젊은 침팬지의 호르몬이 나오는가 아니면 늙은 암컷들의 동정심에 호소하며 어리광을 부릴 것인가다. 호르몬이 방향을 정하면 그 길로 계속 간다. 말로는 자유와 민주를 주장하지만 어리광이다. 엄격한 교육이 아니면 안 된다. 조금 과장하면 이런 거다. 필자가 정당의 대표라면 금뺏지 중에 걸어 다니는 자는 출당이고, 3분 이상 지각하는 자는 퇴장이고, 5분 이상 발언을 끌면 마이크를 빼앗는다. 5천 원 이상을 밥값으로 쓰는 자는 퇴출이다. 운전기사나 수행비서는 인정할 수 없다. 운전도 못 하면서 금뺏지를 바래? 기본이 안 된 자들이다. 이렇게 썩은 자들이 정치를 한다니 말이 되는가? 요즘 여의도 밥값이 올랐다면 7천 원까지 인정하겠다. 하여간 되먹지 못한 자들이 너무 많다. 장난이 아니라야 한다. 정치는 전쟁이다. 제대로 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측근들과 회의할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회의시간에 잡담이나 하면서 부하직원의 웃음을 유도하는 자는 1초 만에 아웃이 맞다. 긴장 타야 한다. 높은 레벨에 맞추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는게 교육이다. 존 듀이가 등신교육을 주장한 이유는 일반인들은 고도의 긴장이 요구되는 높은 레벨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이야 뭐 슬금슬금 걸어 다녀도 되겠다. 리더는 뛰어다녀야 한다. 완전군장한 병사의 행군속도보다 느리면 자동퇴출이 맞다. 청와대 직원 700명은 어쩌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사 빠진 자가 있을 것이다. 이 시국에 이태원 술집에 출입하는 청와대 직원도 있을 것이다. 기강을 잡아야 한다. 강자의 철학으로 갈아타야 진짜 강자가 된다. 박지성은 열심히 뛰어다녔다. 메시의 패스를 받으려면 메시보다 많이 뛰어야 한다. 기술이 메시만 못해도 손발은 맞춰야 한다. 집단에서 가장 뛰어난 자와 호흡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게 교육의 목표다. 리더의 마음을 읽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집단의 의지를 나의 마음으로 삼아야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이 맨유의 박지성만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방향을 그리로 잡아야 한다는 말이다. 반지성주의에 빠져서 지식인을 경계하면 망한다. 집단의 구성원이 집단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바라보고 맞춰가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개고기 먹는 자는 교육이 안 된 자다. 개를 묶어서 마당에서 키우는 자는 교양이 없는 자다. 성소수자 혐오를 드러내는 자는 경멸 되어야 한다. 그것이 부족민의 야만행동이기 때문이다. 탈근대사상은 비판되어야 한다. 대중에게 아부하는 저질행동이다. 21세기가 요구한다. 모든 자원이 언제든 지휘관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대장이 전사하면 부관이 지휘한다. 모두 전사하면 그대가 장군이다. 스위스인은 그렇다. 청소하는 사람도 엘리트인 척하며 넥타이 매고 출근한다. 물론 전해 들은 이야기다. 아마 과장된 내용일 것이다. 지성을 존중하고 지성적인 분위기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민주주의 핑계로 대중에게 아부하는 저질행동은 곤란하다. |
"교육의 목적은
- 그룹의 가장 뛰어난 자와 대화가 되게 하는 것이다.
- 한 사람의 지식을 모두의 지식으로 복제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 최대다수가 집단의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 대중 속의 잠재된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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