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이 있다. 언어의 한계이자 표현의 한계다. 나는 신을 믿는다. 신이 수염 난 할아버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폐가 있지만 달리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내 가슴 속의 진실을 전달하기에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아스퍼거인의 어떤 예민함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막다른 길을 만나거나 오를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할 때마다 신은 내게 어렴풋한 길을 보여주었고 나는 신의 안내에 의지하여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또다시 벽 앞에서 신의 뜻을 묻는다. 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어쩌면 내게 주어진 소임을 다 했는지도 모른다. 김동렬 너는 여기까지. 다음 페이지에 대한 구상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할 만큼 했고 대한민국도 이 정도면 체면을 세웠고 인류도 그럭저럭 제 발걸음으로 굴러갈 것이다. 다만 진리에 대한 열정 하나만은 안타까움이 있다. 왜 열병처럼 전염되지 않을까? 그들에게 진리란 시시한 것인가? 진리를 두고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보듯 한다는 말인가? 진리를 알았을 때의 감격은 도무지 없다는 것인가? 아닌 것을 쳐내는 유쾌함을 맛보지 못한다는 말인가? 노자도 쳐내고, 장자도 쳐내고, 마르크스도 쳐내고, 다윈도 쳐내고, 프로이드도 쳐내고, 데모크리토스도 쳐내고, 플라톤도 쳐내고, 헤겔도 쳐내고, 니체도 쳐내고, 칸트도 쳐내고, 마구마구 쳐내고. 아닌 것들의 모가지를 뎅겅뎅겅 잘라주는 기쁨을 누리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오직 쳐낼 수 없는 사람 하나가 있다면 공자다. 공자는 특별히 말한 것이 없으니 쳐낼 것도 없다. 그는 단지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을 뿐이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을 만드는 것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을 만드는 것은 에너지다. 에너지를 만드는 것은 호르몬이다. 호르몬을 결정하는 것은 만남이다. 만남에 필요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획득하게 하는 것은 배움이다. 논어의 첫머리는 배움과 만남의 기쁨에 대한 이야기로 출발하고 있다. 이야기는 만남에서 시작된다. 언어가 일치해야 만날 수 있다. 배우면 언어를 얻고 그 바닥에서 통하는 언어를 익혀야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만났을 때 기쁨을 얻고 거기서 호르몬이 바뀐다. 호르몬이 사람을 한 방향으로 일관되게 밀어붙이니 그 사람의 운명이 바뀌게 된다. 답은 최종적으로 뇌과학에서 찾을 수 있다. 바른 배움, 바른 언어, 바른 만남, 바른 호르몬, 바른 운명이 있을 뿐이다. 그 운명이 당신의 인생을 결정한다. 인간은 별 수 없이 에너지에 지배되는 동물이다. 만남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흥분하므로 거기서 에너지를 얻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비뚤어진 길을 가는 사람은 만나야 할 것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며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느낀 적이 없는 사람이다. 혹은 만나도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사이코패스다. 공자가 길을 알려주었다. 군자라고 표현하지만 간단히 엘리트주의다. 지성주의다. 더 높은 세계를 바라보고, 더 큰 뜻을 품고, 서로를 만나게 하는 최대공약수는 거기서 발견되는 것이며 서로가 내놓을 수 있는 최소공배수도 거기서 확정되는 것이다. 그것이 이정표가 된다. 두 사람이 만나려면 뭐라도 공통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큰 것에서 찾아진다. 성별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르고, 나이가 다르고, 취향이 달라도 같은 21세기를 공유하는 같은 인류라는 점은 공통되니 서로는 만날 수 있다. 작은 다름을 큰 같음으로 극복한다. 공자의 길은 합리주의, 진보주의, 인문주의, 절대주의, 일원론의 길이다. 작은 길과 큰 길이 있다면 큰 길을 선택하라는 말이다. 왜? 큰 길에서 만나기가 쉽기 때문이다. 작은 골방에서 만날 수 없고 큰 광장에서 만날 수 있다. 주인이 될 것인가, 노예로 만족할 것인가? 집단의 중심으로 쳐들어가서 의사결정권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집단의 한 구석탱이에서 작은 역할의 획득에 만족할 것인가? 앞에서 길을 열고 무리를 이끄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뒤에서 팔짱 끼고 비웃으며 시험하고 조롱하는 자로 남을 것인가? 보통은 뒤에서 킥킥대며 조롱하는 자가 인기를 얻는다. 어차피 진정한 자는 만에 하나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70억의 경쟁무대이고 조금 높은 그룹으로 올라서면 만에 하나가 70만 명이나 우글거린다. 학계든 스포츠계든 예술계든 만의 하나가 7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뒤에서 이죽거리는 촌놈 짓은 예천이나 문경 같은 촌구석에서 먹히는 거다. 공자가 어려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2는 1보다 크다. 그대가 진정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큰 길에서 만날 확률이 작은 길에서 만날 확률보다 높다. 군자의 길에서 운명을 바꿔놓을 누군가를 만날 확률이 높다. 소인배의 길에서 누군가를 만났다면 방해자일 확률이 높다. 사람이 귀하다. 운명을 걸고 만날 사람은 더욱 귀하다. 큰 길에서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진리 앞에서 어찌 전율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뭐 그런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 가슴이 식어버린 자가 있다. 에너지가 없는 자가 있다.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자가 있다. 소리가 나지 않는 북은 칠 수가 없고, 반응하지 않는 존재는 끌어낼 수 없으니 더욱 만날 수 없다.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자의 길은 다수고 만나는 길은 하나다. 일관되게 그 하나를 선택한다면 정상에서 전모를 보게 된다. 나는 더 오르고 싶은 욕망이 없다. 대인관계가 서툴러 사람 만나기가 무섭다. 그러므로 더욱 사람이 절실하다. 나는 다만 하나의 작은 불씨를 던져서 세상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신은 내게 불씨 하나를 주었고 나는 등불 하나를 켜고자 했다.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이루어져도 상관없다. 진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평판공격을 가하려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용기 있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인류의 높은 의사결정그룹에 들었거든 주변에서 시시덕거리는 낮은 자의 시선을 의식할 이유가 없다. 여러분은 구조론의 제자인가, 지나가는 뜨내기 눈팅인가? 여러분이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자부심뿐이다.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될 진리를 남보다 조금 먼저 안다는 것 뿐이다. 수학자는 타협하지 않는다. 수학의 세계에 중도는 없고 물타기는 허용되지 않는다. 정답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오답이다. 그러므로 얼떨리우스를 쳐내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하나가 그대가 만나야 할 사람이다. 진리의 길을 가는 자가 될 것인가, 대중에 아부하는 거렁뱅이가 될 것인가? 당신이 길에서 우연히 진짜를 만날 확률은 만분의 일이지만 70억이 사는 세상에는 만의 하나가 70만 명 있다. 그 세계로 뛰어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말인가? 노자나 장자 따위에게 쫄아서 함부로 감탄사를 바치고 라즈니쉬 따위 머저리에게 속아서 책을 백 권이나 사서 쟁여놓고, 환빠짓에 창조과학회에 달착륙음모론이나 믿고 그런 너절함이 창피하지 않다는 말인가? 태연하게 교회에 다니고 절에 가서 절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는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는다. 만나지 못한다. 더 높은 세계가 있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고 1+1=2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세계를 방문할 수 있다. 다만 배움이 있어야 언어를 얻고, 언어를 얻어야 만남을 이루고, 만남을 이루어야호르몬이 나와준다. 호르몬이 나오지 않으니 좋은 것을 배워도 기쁨이 없다. 너절한 잔꾀나 꼼수나 요령이나 실용이나 경험이나 이런 짓에 함부로 감탄사를 던진다. 천하인의 길을 가지 않고 뒷골목을 숨어다니는 그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는 말인가? 진리 앞에서 전율하게 하는 호르몬이 나오지 않는 무미한 사람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 전율하라. 그리고 운명을 바꿔라. 그 다음은 신이 길을 안내할 것이다. 당신이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라면 이미 신의 표지를 찾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