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진보의 이데올로기]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는 가치와 특정 이해집단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 널리 공유되는 가치가 우선한다. 보편가치와 특수가치다. 우선순위를 판단한다면 보편성이 특수성에 앞선다.
민주주의는 계급을 떠나 널리 공유되는 보편가치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계급이라는 특정 이해집단을 중심으로 한 특수가치다.
사회를 하나의 『게임의 장』으로 본다면, 민주주의는 먼저 공정한 게임의 룰 부터 마련하자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 게임의 장 안에서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다.
룰이 먼저 정해지고 난 다음에 승부가 있는 법이다. 민주주의가 먼저 담보되고서야 참다운 의미에서의 사회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한나라당이 없어져야 민노당이 산다]
물론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일상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둘은 별개의 가치로서 공존할 수 있다. 문제는 선거다. 1인 2표제가 시행되지 않는 한, 선거 때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예컨대 한겨레신문이 평소에는 민노당이 대변하고 있다는 여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선거 때는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하다.
서기 2003년 이 시점의 한국인들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민노당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가치들은 먼저 공정한 룰이 만들어진 다음에 유의미한 진전이 가능한 문제들인 경우가 많다. 애초에 공정한 룰의 적용을 방해하는 한나라당이 없어지고서야 민노당이 제목소리를 낼 수 있다.
노무현정부가 추진하는 개혁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념적 지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참여정부가 말로는 개혁을 외치고 있으나 개혁의 이념적 토대를 굳건히 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진보주의의 두가지 측면]
진보주의는 민주주의 관점에서 파시즘(권위주의)에 대항하는 측면이 있고, 또 사회주의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는 측면이 있다. 이 지점에서 혼선이 일어나고 있다.
과거 러시아와 독일이 전쟁을 벌이는 등 현실 사회주의권과 파시즘체제가 극단적으로 대결했다고 해서 이들이 이념의 측면에서 서로 반대된다는 식의 판단은 곤란하다.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모두 파시즘이다. 넓게 보면 전제군주제나 봉건제 역시 일종의 파시즘이며 구소련의 사회주의실험도 변형된 형태의 파시즘일 수 있다. 이차대전과 그 이후의 냉전도 넓게 보면 파시즘과 파시즘의 충돌이다.
본질은 『공동체의 룰』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성원들이 공동체의 룰에 합의해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성원 다수에 의해 합의되지 않은 룰은 모두 파시즘이다.
설사 선거 등의 형태로 형식적인 합의의 절차를 거쳤다 해도, 공동체의 목적과 배치되는 룰이 온존한다면 또한 파시즘이다. 사회는 부단히 진보한다. 공동체의 룰 역시 그 시대의 흐름에 맞는 형태로 시스템의 최적화를 지향하여 부단히 변경되어야 한다.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공동체의 룰을 파괴하는 일체의 행동』이 파시즘이다. 공동체의 진정한 목적과 어긋나는 체제 역시 파시즘이다.
파시즘은 국수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 전체주의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지지만 이는 파시즘권력이 대규모 동원을 위해 꾸며낸 거짓 얼굴이다.
진짜는 따로 있다. 파시즘의 본질은 그 사회가 합의하고 있는 『공동체의 룰』이 과연 그 공동체의 정신과 일치하는가 관점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근대국가에서 파시즘은 주로 급성장을 추구하는 후진국이나 개도국에서, 외국에서 직수입된 선진과학기술과 낙후한 국민의 의식수준 사이의 괴리 때문에 나타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진보에 비해 국민의 의식수준이 상대적으로 낙후한 때, 사회는 과학기술을 인간에 우선시킨다. 여기서 공동체의 목적과 배치되는 본말의 전도가 일어난다.
인간을 위해 봉사할 목적으로 창안된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되며,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충격을 받아 판단력이 마비된 국민들도 이러한 전도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공동체의 자기모멸과 지도자의 타락]
모순이라는 말은 물적토대가 되는 산업과 국민의 정치의식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의미한다. 공동체는 경제적, 군사적 급성장의 방법으로 그 괴리를 해소하자는 목표를 내걸게 된다.
이 상황에서 공동체의 리더는 국민의 낙후한 의식수준이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유권자들에게 짜증을 부리기 시작한다.
『이것들 데불고 민주주의 못해먹겠다. 에라이 막 나가자』
절차와 과정을 생략하고 리더에게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유권자들 또한 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압도되어 가치판단과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권리를 리더에게 위임하게 된다.
정리하면 과도한 목표를 내건 공동체의 리더가 공동체의 성원들을 사회발전의 걸림돌로 지목하고, 인민들을 다그치기 시작한 것이 곧 근대국가에 있어서의 파시즘이다.
[열린사회를 지향하며]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성원 각자의 의식수준과 비례한다. 물질문명의 급격한 발전에 대응하여 공동체의 성원 각자가 주체적인 가치판단과 의사결정능력을 갖도록 훈련시키는 것이 민주주의다.
2003년 한국은 급격한 성장을 이루고 있다. 공동체의 성원 다수는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급속한 진보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주체적인 의사결정능력을 상실한 채, 리더에게 자신의 정치적 권한을 위임하려는 자포자기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파시즘의 토양이 된다.
독재자 박정희에 대한 향수, 서민출신의 대통령에 대한 잔인한 공격들이 이에 해당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대한민국호의 항로가 가리키는 방향은 닫힌사회에서 열린사회로의 이행이다. 닫힌 사회는 공동체의 성원이 자신의 권한을 리더에게 위임한 사회이며, 열린 사회는 공동체의 성원이 스스로 권한을 행사하는 사회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마르크스는 산업화시대 과학기술의 급속한 진보에서 인류의 희망을 발견하려 했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일정부분 파시즘과 결탁하고 있다.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이 스스로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지 못할 때, 문명은 인간을 소외시키게 된다. 인간은 소통을 통하여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소통을 위한 룰을 만드는 것이며 사회주의는 충분한 소통이 이루어져서 인간의 가치가 물질문명의 가치에 비해 우위에 서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파시즘을 극복한 사회주의를 의미한다. 인간이 발달한 과학기술과 상공업, 물질문명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위에 선 것을 말한다.
인간이 가치판단과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인간이 미디어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거꾸로 미디어를 지배해야 한다. 인간이 시장의 논리나 군사적 무력에 압도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이 과학기술의 진보에 끌려다니지 않아야 한다.
[물질과 정신 그리고 자본과 인문]
역사와 문명의 발전을 과학기술, 전쟁기술, 이동기술 등 물질적 측면과 언어, 문자, 종교, 문화 등 정신적 측면으로 대비시켰을 때, 물질적 측면의 우위를 반영한 것이 자본주의체제라면 정신적측면의 우위를 반영한 것이 사회주의체제일 수 있다.
이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변증법적 지양과 지향을 거듭할 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는다. 둘은 사람의 두 다리가 나란히 걷듯이 영원한 평행선을 그리는 것이다.
상공업이 상대적으로 자본주의의 편에 서고, 인문학이 상대적으로 사회주의의 편에 서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 뿐 어느 일방이 타방을 배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지식인이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하는 것은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옳고 다른 가치들은 모두 무시되어도 좋다는 식의 독선이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