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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4195 vote 0 2010.10.07 (23:38:48)


  평화 


  ‘돈방석’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화폐가 널리 유통된 것은 조선왕조 하고도 숙종 이후의 일이고, 그 전에는 금, 은이 아니면 쌀이나 비단을 화폐로 이용하곤 했다. 가게 주인들이 돈으로 쓰는 비단 한 필을 방석처럼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기 때문에 돈방석이라고 했던 것이다.


  peace의 어원을 추적해 보면, 본래의 의미는 ‘받았다’인데 지불하기로 약속(pact)된 돈을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pact(박다)는 pack(박은 것)에서 나왔고, pack은 꾸러미(박은 것)를 저울에 올린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물물교환이었으므로 돈방석을 주고받으며 혹시 돈방석 안에서 비단을 몰래 몇 자 잘라냈을지 모르니까 일일이 저울에 달아서 계량을 해야 했던 것이다. 저울에 올린다(pack-박다)≫저울에 달아 돌려주기로 약속한다.(pact-박다)≫저울에 달아 되돌려 받았다(peace-받았다)로 의미가 발전하여 평화가 되었다. 우리말에도 약속을 흔히 ‘박는다’고 표현한다. 약속(pact)이 지켜지는 것이 평화다. 파생어를 고찰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pawn는 저당잡히는 것이고, pledge는 전당포에 맡기며 맹세하는 것이고, pay는 저울에 올려놓은 돈을 고객이 눈금을 확인하고 집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이 저울과 관계가 있다. 저울의 눈금대로 정확하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야 평화가 온다. 평화는 pay다. 현찰이 오고가야 평화가 온다. 줄 것을 주지 않고 받을 것을 받지 못하면 불화다.


  저울은 형(衡)이다. 형이 수평을 이루는 것이 평형이다. 저울이 평형이 되어야 화(和)할 수 있다. 그것이 평화다. 저울은 balance다. 막연히 평화를 외친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니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서 구조의 밸런스가 맞아야 비로소 평화가 온다. 이 점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평화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아라. peace는 pay다. 치러야 할 댓가 없이 평화는 없다.


  마음의 평화도 마찬가지다. 평정심 혹은 평상심이라고들 한다. 평상심이 도(道)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쉬울듯 하지만 쉽지 않다. 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바란다. 그러나 좀처럼 평안해지지 못한다. 평상심은 밸런스이기 때문이다. 균형을 잡는 것이 밸런스다. 그런데 균형잡기가 힘들다. 


  멈춰 있는 것을 균형잡기는 쉽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균형잡기가 쉽다. 멈춰있는 것과 달리는 것 사이에 어중간한 것이 균형잡기가 어렵다. 달리는 자전거는 넘어지지 않는다. 세워둔 자전거도 넘어지지 않는다. 멈춘 상태에서 달리는 상태로 변환하려 할 때가 어렵다. 달리는 상태에서 멈춘 상태로 변환할 때도 주의해야 한다. 여기에 법칙이 있다. 법칙을 바로 알아야 평화에 이를 수 있다.


  야구선수가 공을 던질 때는 힘을 빼고 던져야 한다. 그런데 힘을 빼고 던지기가 쉽지 않다. 야구판에 ‘힘을 빼고 던지는데만 10년이 걸린다’는 말도 있다. 평상심은 매우 쉽다. 그것은 힘을 빼고 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힘 빼고 공 던지기가 매우 어렵다. 평상심은 매우 어렵다. 자유자재로 평상심에 들어가는 경지에 도달하는데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이제 힘 빼고 공을 던질 만하니까 은퇴할 때가 됐어요.”(김일융 선수)


  “선동렬 코치에게 전수받은 기술은 힘을 빼고 공을 던지는 방법입니다.”(배영수 선수)


  왜 힘을 빼기가 어려울까? 교육학 용어인 전습법과 분습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분습법은 부분을 학습한 후 이를 연결하여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전습법은 서로 맞물려서 있는 전체의 맥락을 이해한 후 부분동작을 가다듬는 것이다. 구조로 보면 부분의 합이 전체보다 작으므로 전습법이 옳다. 구조에는 부분과 부분을 연결하는 정보가 추가되기 때문에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 분습법으로는 리듬과 타이밍과 호흡을 재지 못한다. 밸런스의 맞물림을 포착할 수 없다.


  세워둔 자전거는 균형잡기 쉽다. 달리는 자전거도 균형잡기 쉽다. 세워둔 자전거는 사람과 자전거가 분리되어 있다. 분해된 상태이다. 부분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분습법이다. 달리는 자전거는 사람과 자전거가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습법이다. 그 사이가 어렵다. 세워둔 상태에서 달리는 상태로 변환하기가 어렵다. 달리는 자동차의 기어를 변환할 때는 클러치를 밟아 동력전달을 끊어야 한다. 이 부분이 어려운 것이다.


  힘을 빼고 던진다는 말은 전습법에서 강조되는 릴렉스 원리를 활용하는 것이다. 구조의 작용반작용에 따라 앞에서 사용되었다가 다시 반사되어 되돌아온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때 클러치를 밟아 일단 동력전달을 끊어야 한다. 이것이 힘을 빼고 던진다는 말의 의미다. 이 원리를 이용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공을 던지는 것은 손가락이다. 힘을 빼고 던진다는 것은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의 쓰고 남은 힘을 손가락이 빌어 쓴다는 말이다. 손목은 어깨의 힘 중에 쓰고 남은 힘을 빌어 쓰고, 어깨는 상체의 힘 중에 쓰고 남은 것을 빌어쓰고, 상체는 하체의 힘 중에 쓰고 남은 것을 빌어 쓰고, 그 하체는 발로 땅을 구르고 되돌아오는 힘을 빌어 쓴다. 결국 투수는 하체의 힘으로 던지는 것이다.


  피아노를 연주한다면 손목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전개된 엄지와 비엄지의 균형이 있다. 피아니스트가 열 손가락을 다 쓰지만 원리로 보면 항상 두 손가락으로 친다. 항상 둘이 힘의 대칭을 이룬다. 엄지와 비엄지의 균형이 평형에 도달할 때 손목이 개입한다. 낮은 단계의 대칭이 평형을 이룰 때 높은 단계가 개입한다. 낮은 단계의 밸런스를 평형에 이르게 하는 것이 클러치를 밟아 동력전달을 끊는 것이다. 곧 힘을 빼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손가락 근육 힘으로 건반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친 힘이 손목으로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 힘으로 친다. 앞에서 쓰고 남은 힘을 빌어쓰려면 자기 힘을 빼야 한다. 만약 힘을 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앞에서 쓰고 되돌아오는 힘과 충돌을 일으켜 오류가 일어난다.


  투수는 손목의 스냅으로 공을 던지지만 동시에 어깨의 쓰고 남은 힘을 빌어 쓴다. 손목에 힘을 주면 어깨에서 넘어온 힘과 충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공은 엉뚱한 데로 날아가고 만다.


  힘을 뺀다는 것은 바깥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 바깥을 찾아야 한다. 손가락의 바깥은 손목이고, 손목의 바깥은 어깨이고, 어깨의 바깥은 상체이고, 상체의 바깥은 하체이다. 결국 상체와 하체의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더 나아가 사람 전체와 대지의 밸런스가 맞아야 한다. 전부 직결로 연결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불화는 포지션 원리에 따라 일어난다. 포지션 지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자리를 두 명이 차지하려고 하므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는 공간의 문제이다. 이를 시간으로 전환할 때 문제는 해소된다. 동시에 두 사람이 하나의 공간을 차지하는 방법은 한 사람씩 교대로 차지하는 것 뿐이다. 이때 먼저 온 사람이 쓰고 남은 힘을 다음 사람이 쓰는 것이며, 다음에 온 사람은 앞사람에게 곧바로 바톤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에게 받는다. 앞사람에게 힘을 받으려고 하면 자기 힘과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항상 한 단계 위로 올라가야 힘의 전달이 순조롭게 된다. 왼쪽 손가락 힘을 오른쪽 손가락이 받으려면 손목을 거쳐와야 한다. 이것이 밸런스 원리다. 이 원리를 따를 때 다툼은 끊어지고 평화가 온다.


  힘을 주고받는 두 손가락이 날이면 더 높은 단계의 개입인 손목이 심이다. 날에서 날로 힘이 전달될 때 더 높은 차원인 심을 거쳐와야 한다. 그 심에 의한 날의 밸런스가 평정심이요 평화다. 평상심이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 밸런스가 있다. 평상심은 밸런스의 축을 장악하는 것이다. 저울의 양 날개가 움직여도 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바퀴가 굴러도 축은 움직이지 않는다. 수레가 움직여도 길은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다른 것을 움직에게 돕는 것이 심이다. 그것이 도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시스템이다. 조직의 지속적인 성장이다. 조직은 점점 커질 때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낳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버스는 승객이 타고 내릴 때 움직이지 않는다. 산모는 자식을 낳을 때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어미는 움직이지 않는다. 자식을 낳는 어미의 고요함이 평상심이다. 그러므로 자식의 포지션에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분주할 뿐이다. 어미의 포지션을 차지해야 한다.


  남의 일에 개입하므로 마찰이 일어난다. 같은 레벨에서 개입하려 하므로 문제가 된다. 높은 레벨로 올라가서 개입해야 한다. 일층의 문제는 2층을 이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 방은 하나인데 두 사람이 쓰려고 하면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해주어야 한다. 한 사람이 2층으로 올라가야 자리가 비고, 그래야 다른 사람이 쓸 수 있다. 같은 차원에서는 결코 해결이 안 된다. 선의 문제는 면으로, 면의 문제는 입체로 비약해야 문제가 해소된다.


  손과 손목 사이에서 힘의 배분이 평형에 이를 때 팔꿈치가 개입하고, 팔꿈치와 손목이 균형을 이룰 때 어깨가 개입한다. 그리고 상체와 하체가 차례로 개입한다. 최종적으로는? 대지(大地)가 개입한다. 그리고 온 우주가 개입한다. 마침내 신(神)과의 합일이 된다. 같은 레벨에서 개입하지 않고 항상 더 높은 레벨에서 개입한다. 한국과 북한의 문제에 일본이 개입하면 피곤한 거다. 유엔에서 개입하면 그나마 낫다. 개인과 개인의 마찰에 제 3자가 나서면 곤란하다. 국가가 법과 제도로 개입해야 문제가 해소된다. 그러한 단계적 개입 과정에 리듬과 타이밍과 호흡의 맞물림이 있다. 전습법으로 훈련해야 그러한 맞물림에 의한 높은 단계에서의 개입을 깨닫게 된다.


  평상심은 릴렉스다. 릴렉스는 막연하게 긴장을 풀고 힘을 빼는 것이 아니다. 절묘하게 균형을 이룸으로써 상부구조가 개입하기 쉽게 자리를 깔아주는 것이다. 릴렉스는 막연히 힘을 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용한 힘을 뒤에서 이어받는 것이다. 전달받아 전달하고 본인은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전달의 순간은 동작을 중지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심이다. 달리는 자동차가 기어를 변환시킬 때는 클러치를 밟아 동작그만 상태에서 변환시킨다. 그것이 평상심이다.


  ◎ 정신≫의식≫의도≫생각≫감정

  ◎ 존엄≫자유≫사랑≫성취≫행복 


  낮은 단계에서 개입하려 하므로 불화가 있다. 감정의 문제는 한 단계 위의 생각이 개입해야 해결된다. 생각의 문제는 한 단계 위의 의도가 개입해야 해결된다. 의도의 문제는 위에 있는 의식이 개입해야 해결된다. 의식의 문제는 정신이 개입해야 해결된다. 감정으로 감정에 개입하면 실패한다. 생각으로 생각에 개입하면 실패한다. 의도로 의도에 개입하면 실패한다. 의식으로 의식에 개입하면 실패한다. 수평적 위치에 있는 제 3자가 개입하면 일은 틀어지고 만다. 옆에서 개입하면 틀어지고 위에서 개입하면 해소된다. 항상 더 높은 단계에서 개입해야 평화가 있다. 릴렉스 된다. 평상심에 이른다. 아기가 엄마 품에서 온전히 긴장을 풀듯이 완전히 릴렉스 되며 그 상태에서의 개입은 평온하기만 하다.


  행복에 행복으로 개입하면 역시 실패한다. 성취로 행복에 개입해야 성공한다. 성취로 성취에 개입해도 실패한다. 사랑으로 성취에 개입해야 성공한다. 한 단계 위로 올라가서 자유로 사랑에 개입해야 하고, 존엄으로 자유에 개입해야 한다. 자유로 자유를 치고, 사랑으로 사랑을 치고, 성취로 성취를 치고, 행복으로 행복을 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같은 레벨에서 개입하면 무조건 충돌한다. 항상 높은 단계를 거쳐서 우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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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0.10.08 (13:10:33)


자기안의 평화, 집단의 평화, 사회의 평화, 국가의 평화, 세계의 평화....
밸런스의 회복이 평화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아서 구조의 밸런스가 맞아야 비로소 평화가 온다. 이 점을 바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양을 쫓는 모험

2010.10.15 (00:33:11)

등산을 좋아하는 곰다방 님이 종종 '축지법' 에 관하여 얘기 하곤 했소. 그것이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축지법의 의미와 같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곰다방 님의 얘기로는 산을 오를 때, 숨을 헐떡거리지도 않으면서 빠르게 오를 수 있다고 했소. 이 얘길 듣고 나는 '리듬을 탄다' 고 말했는데, 곰다방 님께서는 그 말이 맞다고 했소.

다시 말해서, 발목과 무릎에 힘을 빼고, 땅을 밟고 솟구치는 힘과 다시 내려오면서 내딛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오.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지 않으면, 대지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오. 야구에서의 작용 반작용, 피아노에서의 작용 반작용과 같은 것이지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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