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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764 vote 0 2020.03.05 (16:57:11)

      
    긍정의 배신
   

    검색해 봤다. 부정신학의 거두 칼뱅이 원죄설을 강조하고 모든 것을 부정한 데 따른 후과로 19세기 미국인들이 무수한 질병에 시달렸으며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노만 빈센트 필의 긍정주의가 유행한 것이 미국 개신교계이며 이것이 한국에서 무속의 기복신앙과 결합하여 이 나라를 사이비 개독천지로 만들었다는 거다. 그럴듯하다.


    바바라 에런라이크가 미국의 이런 풍조에 반발하여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을 비롯하여 일련의 배신 시리즈를 썼다고 한다. 하여간 그렇다. 노력은 반드시 배신한다. 희망은 반드시 배신한다. 긍정은 반드시 배신한다. 우리는 부정적 사고를 익혀야 한다. 그런데 구조론의 최종결론은 긍정주의다. 단, 부정을 거친 역설적 긍정이다.


    부정적 사고는 노자사상이다. 그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그런데 단 하나 자기를 부정하지 못했다. 불로장수 따위에 집착한다면 유치하다. 중국인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 그리고 돈과 건강에 대한 집착은 노자의 부정적 사고에 영향받은 것이다. 이쪽을 부정하면 저쪽의 긍정이 된다. 그러므로 부정을 해도 기술적으로 잘해야 한다.


    긍정이냐 부정이냐? 단어 하나로 해결할 수 없고 메커니즘을 봐야 한다. 구조론은 긍정도 하고 부정도 한다. 질을 긍정하면 입자, 힘, 운동, 량은 부정된다. 두루 부정하되 핵심은 긍정한다. 칼뱅이 부정신학을 휘두른 것은 카톨릭의 횡포에 맞서 권위를 획득하려는 것이었다. 젊은이가 기득권과 싸우면 당연히 부정어법을 쓰게된다.


    그때 그 시절 꼰대들은 젊은이들에게 말했다. ‘니들은 왜 세상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냐? 삐딱하게 살지 말고 세상을 좀 긍정적으로 보라구.’ 필자가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그런데 김어준의 ‘쫄지마 씨바!’ 이후로 진보진영은 상당히 긍정주의로 바뀌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은 우리에게 많은 자신감을 주었다. 진중권 혼자 뿔났다.


    그는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두고 파시스트 짓이라고 공격했다. 박노자도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왕따 되었다. 2020년 한국은 국민소득 3만 불을 돌파하고 1인당 PPP에서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일본의 어깨까지 따라잡았다. 예전에는 국뽕이라고 놀렸는데 BTS에 손흥민에 봉준호의 활약 덕분에 자동뽕이 되었다.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철학적 사유는 원래 부정하는 것이다. 부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 부정한다는 것은 대칭을 세운다는 것이다. 대칭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칭을 세우고 맞대응을 해야 한다. 그러다가 특이점에 도달한다. 정상에 도달하면 더 이상 올라설 곳이 없다. 그때는 긍정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미국의 청교도라는 것이 통째로 부정신학이다. 영국이 성공회와 싸우다가 온갖 탄압을 다 받고 식민지로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양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쑥대밭이 되고 미국이 홀로 강성해지자 긍정주의가 대두된 것이다. 한국의 긍정주의도 일본을 추월하고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정상에 오르면 긍정해야 한다.


    처음은 부정으로 시작해야 한다. 자기 자신부터 부정해야 한다. 필자는 그것을 ‘의식의 표백’이라고 표현한다. 백지상태가 되지 않으면 백지 앞에 앉을 자격이 없다. 아닌 것을 제거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모든 것을 부정한 끝에 정상의 한 점에 도달하면 자발적 대칭성 붕괴가 일어나 비로소 긍정할 수 있다. 이제 게임이 시작된다.


    군부독재를 부정하면 민주주의가 긍정된다. 민주주의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최후에는 긍정모드로 바뀌는 것이다. 어쨌든 말싸움에는 당연히 부정이 이긴다. 공자와 노자가 말싸움을 하면 무조건 거짓말 면허를 가진 노자가 이긴다. 권력을 잡는 과정에는 언제나 부정이 승리하지만 권력을 잡은 후에는 긍정모드로 갈아타야 한다.


    신은 사랑이다. 이런 말은 긍정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다. 이것도 긍정이다. 이런 말은 전부 논파 당한다. 신이 악마를 사랑할 리가 없다. 신이 전지전능하면 신이 자살하는 수가 있다. 신이 농담으로 '에잇! 신이 없었으면 좋겠어.' 하고 한마디 한 결과로 신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은 농담도 맘대로 못하는 약한 존재이니 가련하다.


    긍정은 낮은 단계에서 먹힌다. 어떤 것을 긍정하려면 반드시 상부구조가 있어야 한다. 전제조건을 걸어야 한다. 부정은 간단하다. 그 전제를 날려버리는 것이다. 대화는 친구관계에나 하는 것이다. 누가 논쟁을 걸어오면 그것은 서로 대화하는 동료 사이라는 전제를 걸어온 것이다. 암묵적인 전제가 반드시 있다. 판을 깨버리면 된다.


    ‘니가 네 친구냐?’ 이 한마디로 거의 모든 논객을 날려버릴 수 있다. 예컨대 이런 거다. ‘자한당은 양심도 없냐?’ 이런 양심타령은 동료들 사이의 평판공격이다. 상대의 평판을 떨어뜨리겠다는 위협이다. 이런 말은 자한당은 우리의 동료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말이다. 그런데 자한당이 우리의 동료냐? 이런 부분을 공략하는 것이다.


    전제를 치는 부정의 칼은 매우 힘이 있기 때문에 거의 죽는다. 비수로 단칼에 목을 찔러버리는 것이다. 애들에게 알려줄 수 없는 위험한 방법이다. 부정은 힘이 있다. 칼뱅의 명성은 부정신학 덕분이다. 카톨릭이 권력을 잡은 것도 부정신학 덕분이다. 노자도 부정어법으로 떴다. 진중권도 부정어법으로 뜨려고 저런다. 한계가 있다.


    메이저에서는 이 수법이 먹히지 않는다. 김대중이 부정어법으로 대통령 된 것이 아니다. 뉴DJ플랜은 긍정어법으로 바꾸는 선거전략이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인터넷이라는 긍정무기로 떴고 문재인은 SNS라는 긍정무기로 떴다. 부정어법으로 중간까지 갈 수 있어도 챔피언은 못 된다. 정상을 찍으려면 긍정의 신무기가 필요하다.


    노무현이 청문회스타로 뜬 것은 정주영을 공격한 부정어법 덕이었다. 부정을 계속하면 왕따 된다. 그래서 후단협에게 배후를 털린 것이다. 노무현을 살린 긍정은 노사모다. 노사모는 의리다. 노무현은 종로를 내놓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방법으로 의리를 지켰다. 노무현은 적을 공격해서 출세한게 아니라 자기를 버려서 성공했다.


    정주영을 치고 이인제를 친 것은 부정이다. 안철수가 문재인을 친 것은 부정이다. 긍정하지 못하면 후보는 되는데 그 이상은 못 된다. 최후의 부정은 자기부정이다. 남을 부정하는 진중권 수법, 강준만 수법으로는 중간까지 간다. 최후에는 자기 목을 내놓아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면 천하를 긍정하게 된다. 대중에게 털리는 거다.


    자기를 버리고 그 결과로 대중에게 털리고 나서 대중과 하나 되면 긍정할 수 있다. 김어준이 졸라와 씨바를 구사하며 자학개그로 망가지는 것이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이야말로 위대한 천하긍정이 되는 것이다. 정봉주와 같은 깔때기는 자기긍정이다. 자기긍정은 천하부정이다. 천하를 부정하는 자가 천하를 얻을 수는 없다. 


    진중권식 두루까기 모드는 자기애다. 그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와 연애를 하고 있다. 필자가 철학자를 두루 까지만 공자는 까지 않는 이유다. 공자를 까면 그게 자뻑이다. 자기애를 들키면 죽는다. 긍정은 반드시 당신을 배신한다. 희망은 반드시 당신을 배신한다. 긍정은 자기긍정이고 희망은 자기애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부정한 끝에 자기까지 부정하면 다른 경지를 본다. 의식의 표백에 도달하면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다. 참모는 부정어법을 쓰지만 보스는 긍정어법을 쓴다. 야당은 본능적으로 부정하지만 여당은 긍정해야 한다. 자동차는 부정하지만 길은 긍정한다. 자동차는 부단히 뒤를 밀어내는 방법으로 앞에 이른다.


    길은 모두 연결한다. 진리는 길과 같으며 모두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자동차가 부단히 뒤를 밀어낸 결과로 얻어진다. 먼저 비움으로써 공간을 얻은 다음에 채울 수 있다. 막연한 긍정은 채움이며 그것은 부모가 준 공간에 채우는 것이다. 자기공간은 사라진다. 부정은 변화다. 변화의 끝에 포지션을 얻고 긍정은 다음이다.


    구조론은 긍정주의다. 그러나 구조론의 논리는 일관된 부정의 논리다. 칼뱅의 부정은 80년대 운동권의 부정과 같고 노만 빈센트 필의 긍정은 미국의 양차대전 승리를 반영한다. 지식인은 부정에 능해야 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지도자는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부정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자라야 긍정할 수 있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3.06 (12:15:08)

"모든 것을 부정한 끝에 자기까지 부정하면 다른 경지를 본다. 의식의 표백에 도달하면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다."

http://gujoron.com/xe/1175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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