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주의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ideology에는 실천이 따른다. 이데올로기는 이데아를 따르는 것이며 이데아는 원형이다. 복제본은 원본을 따른다. 그냥 세상은 이러하다 하고 소개하는데 그치지 말고 그러므로 이러하게 실천하자는 것이 이데올로기다. 구조론사람은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관념론이라고 비판했다. 서구 구조주의 철학은 그런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다. 양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겪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체주의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일어난 것이 탈이데올로기 경향이다. 한국에서 노자사상의 유행은 그 아류다. 구조론의 이념은 꿋꿋하게 공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변증법적이다. 부르주아 계급의 관념적 이데아에서 마르크스의 현실적 이데아로 그리고 서구 구조주의 철학의 탈이데아로 그리고 구조론은 다시 이데아로 돌아온다. 다른 것은 도구다. 이데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장악하는 것이다. 총을 처음 본 사람은 총을 신전에 모셔놓고 숭배할 뿐 그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 구조론은 총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처음 온 자유주의자는 막연히 총을 섬겼고 다음에 온 마르크스는 총을 무차별 난사했고 다음 온 구조주의는 그 총을 버렸다. 우리는 다시 그 총을 집어 들어야 한다. 단, 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결정론은 총을 부정한다. 자유의지론은 총을 긍정한다. 과학계는 총을 부정한다. 세상은 게임의 법칙, 맞대응의 원리, 전략의 원리, 동원의 원리, 주체의 원리를 따른다. 그것은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것이다. 그 전에 자아를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문제다. 피아구분의 문제다. 내가 누구이고 적이 누구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것이 주체의 철학이다. 소승불교는 운명론을 앞세워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선업을 쌓으면 보상이 따른다며 일부 숨구멍을 열어놓는다. 카톨릭 역시 운명론을 앞세워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고행과 성지순례와 자선과 면죄부로 살길이 있다고 꼬드긴다. 일부 개신교는 그 총이 하느님에게 있으며 인간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똑똑한 그룹에 묻어가면 혹시 모른다며 탈출구를 암시한다. 대승불교는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천하와 함께 당당하게 가면 된다고 말한다. 이들은 대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숙명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교묘하게 탈출구를 제시한다. 총은 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인간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너와 나 사이에 걸쳐져 있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면 그 총은 주도권의 형태로 내 손에 들어온다. 너와 내가 적대하면 그 총은 내 손을 떠난다. 너와 나의 편을 가르고 주체를 공고히 하며 타자를 명확히 하여 게임에 임하되 나의 자원을 최대한 동원하여 나의 자아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이겨야 하며 그것은 장기전을 하는 것이고 부분을 져주고 전체를 이기는 전략적 대응을 하는 것이다. 환경의 변화에 부단히 맞대응하는 것이다. 누가 적이고 아군인지 미리 정하면 안 되고 51 대 49로 계속 아군의 세를 넓혀가야 한다. 그런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변화와 나란히 가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겉돌고, 마르크스주의자는 폭주하고, 서구 구조주의자는 도망치고, 구조론의 길은 나란히 가되 음악의 연주처럼 혹은 빠르게 혹은 느리게 혹은 높게 혹은 잔잔하게 음을 조율하는 것이다. 권력을 생성하고 그것을 연주한다. 그것으로 집단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아름다워야 한다. 허영만의 타짜 시리즈를 떠올릴 수 있다. 그 판의 호구가 누구인지 모르면 내가 그 판의 호구다. 호구 한 사람을 빼놓고 그 테이블에 앉은 사람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지 않고는 승부를 걸 수 없다. 피아를 고정시키지 않고 내 편을 확장해 가는데 게임의 의미가 있다. 다루어야 할 총은 유기적이고 가변적인 피아관계 그 자체다. 먼저 관계를 장악하지 않으면 판을 짤 수 없다. |
"그 전에 자아를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성의 문제다. 피아구분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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