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대응의 철학 카오스이론이니 상대성이론이니 양자역학이니 하는게 나올 때마다 한 차례씩 들썩거리긴 했지만 과학계는 결정론으로 되돌아가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비결정론은 이름이 없다. 사이비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카오스적 세계관, 상대성의 세계관, 확률론적 세계관 같은 것을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그런 붐이 오래가지는 못한다. 어중간하게 타협한 결과로 확률론적 결정론 같은 것도 있다. 결정론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맞대응론은 상황 봐가며 맞게 대응한다는 것이다. 미리 정해두려는 사람이 많다. 대개 팩트를 강조하며 이건 이렇게 하면 되고 저건 저렇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 미리 계획을 세워놓고 로드맵에 따라 하나씩 추진하는 것이다. 대중이 어떤 사실을 몰라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며 계몽하여 알려주면 된다는 식이다. 좌파가 빠지는 함정이다. 알아야 한다. 인간이 비뚤어진 길을 가는 것은 뭐를 몰라서 그런게 아니고 알면서 일부러 그런다. 권력 때문이다. 자동차의 핸들은 하나뿐이다. 핸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다. 방해자가 있다. 순진한 골방샌님 진보가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현장에서 실천해 보려고 하지만 교묘하게 뒤에서 트는 자들 때문에 도무지 진행이 안 된다. 귀농인들이 시골텃세에 어떻게 시달리는지 검색해 보면 나온다. 다들 알면서 일부러 상대를 집적거리며 간을 보다가 상대의 대응을 보고 거기서 힌트를 얻어 자기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세상은 결정론이 아닌 게임의 원리, 맞대응의 원리, 전략의 원리, 동원의 원리, 주체의 원리를 따른다. 미리 계획을 세우면 정보가 새서 상대가 교란한다. 현장은 교과서와 다르고 돌발상황은 언제나 일어난다. 상대의 행동을 보고 이쪽의 자원을 어디까지 동원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것을 정하는 주체인 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제법무아라 했다. 자아는 없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때 가서 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나를 규정하는 능력이 있다. 내가 동원하는 한계까지가 나다. 나의 가족, 식구, 패거리를 전부 동원할 것인가다. 동원능력 곧 대응능력이 나를 규정한다. 내가 가진 잠재력과 자원을 얼마까지 동원하고 퍼부을 것인가? 결정론 반대편에 맞대응의 철학, 주체의 철학, 게임의 세계관, 전략적 사유, 자유의지론이 있다. 결정론으로 보면 기독교의 예정설이 있다. 구원받을 것인지는 미리 정해져 있다. 불교의 업보설도 결정론적인 운명론이다. 그런데 맞대응으로 보면 마지막에 누구편인지가 중요하다. 큰 죄를 지었어도 마지막에 우리편이면 구원된다. 선행과 악행을 저울에 달아보고 저울이 기울어지는 쪽으로 심판한다면 예정설이다. 인간이 고행을 하고 순례를 하고 면죄부를 사면 살생부에서 명단을 빼주는가? 개신교가 카톨릭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예정설을 도입했다. 불교식 업보론으로 가면 사제들이 권력을 가진다. 카톨릭의 소승적 예정설로 보면 사제가 농간을 부린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는 저울에 달렸는데 신부님이 고해성사를 받고 죄를 감해주며 면죄부를 팔아 저울 눈금을 속인다. 카톨릭에 맞서는 개신교로 보면 선행이나 자선이나 성지순례나 고행은 필요없고 선민그룹에 들어야 한다. 구원은 하느님 입맛대로 하는 것이지 개개인의 이력서를 살펴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스펙이 필요없어? 그렇다면 우월한 그룹을 단체로 구원시켜줄 확률이 높다. 이 개념은 상당히 인종차별주의적이다. 우월한 민족만 구원된다고? 개신교가 청교도 논리로 근면성실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월한 그룹에 들라는 것이다. 강남에 사는 부자들은 우월한 그룹이므로 단체로 구원된다. 명성교회 신도만 구원된다? 소망교회 신도만 구원된다? 이거 꽤 위험하다. 문제는 왜 패거리에 숨으려고 하는가이다. 맞대응으로 가면 인간이 정치화된다. 단체의 지도자를 잘 뽑아야 구원된다. 개개인의 선행이나 악행은 중요하지 않고 모세를 따라가면 구원되고 줄을 잘못 서면 지옥에 간다. 여기서 개신교의 예정설과 대승불교가 점점 맞대응설과 수렴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 소승불교 업보설 - 선악을 저울에 달아서 천국과 지옥을 결정한다. * 카톨릭의 운명설 - 심판의 저울에 달 때 고행, 성지순례, 자선을 참고하되 신부님에게 잘 보이면 지옥행 명단에서 이름을 빼준다. * 대승불교 구원설 - 개인의 선악은 무의미하고 천하가 구원되면 묻어간다. * 개신교 예정설 - 하느님 입맛대로 구원하므로 착한 일 스펙쌓기 필요없고 우월한 그룹에 들면 구원될 확률이 높으며 근면과 성실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해야 한다. 여기서 소승과 대승, 카톨릭과 개신교의 구원관 차이를 알 수 있다. 성지순례, 자선사업, 회개와 기도로 스펙을 쌓았다가 하느님의 심판 때 증거자료로 제출해야 하나? 착한 일을 하면서 영수증 모으듯이 자료를 모아서 연말정산 때 써먹어야 하나? 그런 짓을 열심히 하는 성격이 꼼꼼한 사람만 천국에 가는가? 이건 아니잖아. 하느님이 과연 주판알을 튕기고 저울에 달아보고 그럴까? 컴퓨터에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를 입력하고 있을까? 하느님이 그런 노가다를 한다고? 예정설은 자체 모순이다. 하느님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노가다를 할 이유가 없다. 하느님이 입맛대로 구원한다면 인간을 경쟁시켜 우월한 그룹을 단체로 구원해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높은 그룹에 들려는 노력이야말로 맞대응설과 일치한다. 맞대응설로 본다면 중간과정은 볼 것 없고 막판에 줄을 잘 서야 한다. 게임에 이겨야 한다. 이기는 자가 구원된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마지막 순간에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을 써서 작은 게임을 져주고 큰 게임을 이겨야 한다. 예정설은 자체 모순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으며 누가 구원될지는 하느님만 안다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하느님도 그 결정의 노예가 되므로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부정된다. 그래서 개신교는 아직도 열심히 논쟁하고 있다. 이중구원설 이런 것도 있다. 점점 맞대응설을 닮아가고 있다. |
"마지막 순간에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을 써서 작은 게임을 져주고 큰 게임을 이겨야 한다."
"세상은 결정론이 아닌 게임의 원리, 맞대응의 원리, 전략의 원리, 동원의 원리, 주체의 원리를 따른다. 미리 계획을 세우면 정보가 새서 상대가 교란한다. 현장은 교과서와 다르고 돌발상황은 언제나 일어난다. 상대의 행동을 보고 이쪽의 자원을 어디까지 동원할 것인지를 정해야 한다. 그것을 정하는 주체인 나는 정해져 있지 않다."
"결정론 반대편에 맞대응의 철학, 주체의 철학, 게임의 세계관, 전략적 사유, 자유의지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