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2669 vote 0 2020.01.06 (22:20:10)

      
   이중의 역설

   
    단순히 찢어진 상처는 잘 봉합해 놓으면 쉽게 아물지만 진피층의 섬유조직이 떨어져 나가면 잘 아물지 않는다. 상처에 딱지가 생기면 상처가 덧나고 감염되는 것을 막아 치료를 돕는다. 아니다. 상처에 딱지가 생기면 산소 유입이 차단되고 세포재생이 중단되어 잘 낫지 않는다. 딱지가 앉은 채로 완전히 낫지 않고 몇 달을 끄는 수가 있다. 


    상처 부위에 모여든 백혈구가 성장인자를 자극하고 육아조직을 발달시켜 세포재생을 돕는 절차가 있다. 딱지는 상처의 진물을 제거하여 그 과정을 방해한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는 이유는 진물을 유지하여 백혈구의 활동을 돕기 위해서다. 세포재생이 시작되면 딱지를 제거해야 한다. 어떤 상처든 2주가 지나면 빠르게 새 살이 돋아난다. 


    잘 넘어지는 다섯 살 꼬맹이는 정강이나 팔꿈치에 딱지 대여섯 개는 달고 사는 법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가렵다. 딱지를 떼고 싶다. 무리하게 떼면 피가 난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조심스럽게 제거해야 한다. 딱지는 좋지만 좋지 않다. 치료를 돕지만 돕지 않는다. 이것이 이중의 역설이다. 세상은 항상 이런 식이다. 좋다가도 좋지 않다.


    진보는 오히려 진보의 방해자가 된다. 우리는 혁명을 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혁명을 혁명해야 한다. 우리는 진보를 해야하지만 동시에 그 진보를 진보해야 한다. 우리는 딱지를 씌워 상처의 감염을 막아야 하지만 동시에 그 딱지를 제거해서 새살을 자라게 해야 한다. 세상은 항상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보다 정밀한 대응이 요구되는 것이다.


    적절한 때에 엘리트 진보에서 대중의 진보로 갈아타야 한다.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된다. 진보가 진보의 방해자가 되는 시점이 있다. 우리는 옳기 때문에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이 있기 때문에 진보하는 것이다. 처음은 옳음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은 옳음이 역량을 방해한다. 그 반대로 생각할 때도 있다. 역량이 부족해도 옳으면 가야 한다.


    가다 보면 역량이 생긴다. 우리는 역량이 부족하니까 일단 관망하며 기회를 보자는 세력과 우리는 옳으니까 일단 가보자는 세력이 충돌하는게 보통이다. 지금은 진보가 행정권력을 장악하고 의회권력과 실질권력을 넘보는 시점이다. 이런 때는 좌우의 갈림길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고저의 오르막 내리막에서 역량의 문제가 제기된다.


    처음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므로 옳고 그름의 판단이 중요하다. 그러나 한 번 탄력이 붙으면 방해자의 제거가 중요하다. 기세로 밀어야 한다. 역량의 제고가 중요하다. 지금은 상처를 보호하는 피딱지를 제거하고 백혈구를 활성화시켜 진피층의 섬유조직 재생을 도와야 한다. 엘리트 진보를 탈피하고 대중적 진보로 저변을 넓혀가야 한다.


    딱지가 오히려 상처의 회복을 방해하는 것이 역설이라면 큰 틀에서 볼 때 그 딱지의 제거과정에서 역량이 강화되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다. 엘리트 진보가 도리어 대중적 진보를 방해하는 것이 역설이라면 엘리트 진보를 타격하면서 대중적 진보가 세련되어지는 것이 이중의 역설이다. 엘리트 진보는 제거되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진보는 두 번 이겨야 한다. 한 번은 적의 삽질에 기대어 타력으로 이기고 두 번은 대중적 진보가 엘리트 진보를 극복하면서 보다 세련되어져서 자력으로 이긴다.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첫 번째는 상대방을 이기고 두 번째는 자신을 이긴다. 첫째는 상대방의 실수를 추궁해서 운으로 이기고 두 번째는 스스로 역량을 강화시켜 실력으로 이긴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13]kilian

2020.01.07 (08:38:52)

"한 번은 적의 삽질에 기대어 타력으로 이기고 두 번은 대중적 진보가 엘리트 진보를 극복하면서 보다 세련되어져서 자력으로 이긴다."

http://gujoron.com/xe/1155747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sort 조회
6596 나폴레옹은 누구인가? 김동렬 2023-12-17 1867
6595 영웅 죽이기 스티브 잡스편 김동렬 2023-12-17 1789
6594 방향과 순서 김동렬 2023-12-15 1535
6593 차령산맥은 없다 image 김동렬 2023-12-15 1819
6592 김건희 마녀사냥 문제 있다 김동렬 2023-12-14 2721
6591 존재론과 인식론 김동렬 2023-12-13 1632
6590 훈요십조의 진실 image 김동렬 2023-12-13 1799
6589 정치의 본질 김동렬 2023-12-12 2107
6588 서울의 봄 위대한 전진 2 김동렬 2023-12-12 1976
6587 제 1 지식 김동렬 2023-12-11 1582
6586 영웅은 누구인가? 2 김동렬 2023-12-10 2019
6585 영화 나폴레옹 실망? 김동렬 2023-12-10 1672
6584 백인문명의 몰락조짐 김동렬 2023-12-08 4225
6583 직관의 힘 김동렬 2023-12-06 1783
6582 민주당 전략은 허허실실 김동렬 2023-12-06 1766
6581 이기는 힘 image 김동렬 2023-12-05 1442
6580 인생의 첫 번째 질문 김동렬 2023-12-04 1561
6579 왼쪽 깜박이와 모계사회 김동렬 2023-12-04 1513
6578 유인촌 막 나가네 김동렬 2023-12-03 1795
6577 87년 양김의 진실 김동렬 2023-12-03 15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