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선이 빚어지는 이유는 언어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론은 존재론이고 존재론은 주체의 언어다. 반대편의 원자론은 인식론이고 인식론은 대상의 언어다. 언어가 대상화되면 곤란해진다. 권력이 상대방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축구시합은 공을 잘 차는 팀이 이기는 경기다. 그런데 이질러버를 쓰는 중국탁구는? 전신수영복을 써서 얻은 세계 신기록은? 특수신발로 이뤄낸 마라톤 신기록은? 권력이 선수에게 있지 않고 옷이나 신발에 가 있다면? 기술적 도핑이 일어난다. 주체의 언어가 아닌 대상의 언어가 되면 이런 혼란이 일어난다. 사람이 결정해야 하는데 스테로이드가 결정한다. 약물이 권력을 가진다. 그래서 합의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TV토론에 나온 논객들은 다들 이런 짓을 하고 있다. 언어도핑을 한다. 진중권의 궤변이 언어도핑이다. 대화는 의미가 없다. 토론은 결론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언제라도 권력이 주체에 있어야 한다. 대상이 권력을 획득하면 안 된다. 손흥민이 골을 넣어야 한다. 그런데 공에 특수장치가 있어서 손흥민을 피해다니면? 공이 선수를 가려서 골을 결정한다면? 정유라를 믿을 수 없는 이유는 30억짜리 말이 메달색깔을 정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권력을 가지면 황당한 일이 일어난다. 묵가는 전쟁을 없애려고 했다. 전쟁은 국가 때문에 일어난다. 국가를 없애버리자.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자니 진시황이 맹렬히 국가를 없애고 있었다. 진시황을 지지했다. 망했다. 묵가는 소멸되었다. 현대 공산주의도 묵가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 그들은 목적이 있다.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이 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안 된다. 도달점이 있으면 인간 대신 그 목표점이 권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인간을 물먹인다. 어떤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면 반드시 중간에 지름길을 발견하게 된다. 샛길로 빠지다가 보면 상규에서 이탈해 있다. 꼼수와 편법을 먼저 써먹는 자가 권력을 쥔다. 공산주의 안에서 가장 나쁜 세력이 권력을 잡는다. 공산주의든 묵가든 발상은 좋았는데 지름길 찾다가 망한다. 과연 발상은 좋았을까? 의도는 선했을까? 아니다. 어떤 사람이 테레사 수녀 같은 성자가 되겠다고 하면 나는 그를 위험인물로 본다. 권력의지를 숨기고 있다. 대중에게 아부하고 있다. 대중을 끌어들여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다. 어떤 목표점이 있으면 즉 대상화되면 반드시 반칙을 하는 자가 권력을 쥔다. 목표를 정하는 행동이 타락한 권력의지다. 원자론은 위험한 사상이다. 원자론과 같은 쪼개지지 않는 무엇이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이 권력을 쥐고 인간을 탄압한다. 진리는 물과 같아서 시간과정일 뿐 공간의 위치에 도달하면 안 된다. 그 공간이 인간을 멈춰세우고 대신 권력을 휘두른다. 국민이 권력을 쥐어야 한다. 검찰이 권력을 쥐는 역전현상이 원자론의 폐해다. 원자의 쪼갤 수 없는 성질을 윤석열의 칼날이 휘두르고 있다. 법이 권력을 쥐면 안 된다. 무사가 칼을 휘둘러야지 칼이 무사를 휘두르면 안 된다. 인간이 권력을 쥔 주체의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들어보면 다 맞는 말이다. 성무선악설도 있다. 인간에게는 식욕과 성욕이 있을 뿐 선악은 없다는 말이다. 들어보면 그 말도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룰이 있다. 각자의 룰 안에서는 각자의 말이 맞는 말이다. 애초에 의도가 그렇기 때문이다. 다들 맞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맞다 틀리다 위에 옳다 그르다가 있고, 그 위에 같다 다르다가 있고, 그 위에 있다 없다가 있고, 그 위에 이다 아니다가 있다. 맞다 틀렸다는 의미있는 토론이 아니다. 맥락을 봐야 한다. 맹자의 선은 인간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인간은 원래 사회적 동물이므로 선하다. 이 말이 맞는지는 호르몬을 조사해보면 된다. 고양이는 개인주의고 개는 사회주의다. 인간은 고양이보다 개다. 맹자의 말은 확실히 맞는 말이다. 순자의 선은 사회화다. 사회성과 사회화가 한끗 차이지만 의미가 다르다. 선이라는 단어를 다른 뜻으로 쓰고 있다. 아기는 사회화되어 있지 않다. 사회로 나아가려면 부모와 이웃과 친구와 부족과 민족을 차례대로 만나야 한다. 국가와 인류까지다. 이 과정을 모두 졸업해야 사회화되어서 선에 이른다. 사회화가 안 되면 교정되어야 하는데 그 작업은 교도소에서 담당한다. 아기를 전혀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범죄자가 되므로 학교에 보내야 한다. 순자의 말은 한 치도 어긋남 없이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둘을 충돌시키면 어떨까? 맹자의 사회성과 순자의 사회회가 충돌하면? 맹자가 옳다. 사회성이 원인측이면 사회화는 결과측이다. 선이라는 단어를 사회성과 사회화로 다르게 사용하므로 각자의 논리에서는 맞지만 합쳐서 보면 맹자가 옳다. 구조론은 사건의 원인측을 보는 관점이다. 사회성이 먼저고 사회화는 나중 이야기다. 그렇다면 고자의 성무선악설은 또 뭐냐? 요즘은 고자가 교과서에 나온다는 말이 있다. 우리 때는 안 배웠는데. 인간의 본성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거다. 이는 개인의 관점에서 본 것이다. 선악은 사회적 맥락에서 파악된다. 개인적 행위는 선악이 없다. 자연인이 혼자 자위행위를 하든 자기를 성추행하든 무죄이다. 정신분열증에 걸려 인격이 두 개인 자연인 중에 하나가 게이라면? 자기를 성추행하면? 이성애와 동성애 두 개의 인격을 가진 정신분열증 환자 중에 동성애자 인격이 이성애자 인격을 성추행했다면? 미투를 해야하나? 하여간 이런 개소리를 하면 안 된다. 선악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곧 사회적 행위에 대해서만 판정이 되는 것이다. 하여간 당신이 법관이라면 이런 것을 조목조목 따져야 한다. 개인의 관점에서는 고자가 맞고 사회화 관점에서는 순자가 맞고 사회성 관점에서는 맹자가 맞다. 사건의 우선순위로 보면 맹자가 가장 급이 높다. 순자와 고자는 범위를 좁혀놓고 있다. 못생긴 차를 만들어놓고 그래도 더뉴그랜저가 실내 인테리어는 괜찮지 하면 곤란하다. 부분을 강조하면 안 된다. 무엇인가? 각자의 논리에서는 각자의 주장이 다 맞으니까 모두 맞는 걸로 치자는 다원주의는 개소리다. 통합적 관점을 얻어야 한다. 당신이 판사라면 황희정승처럼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고, 부인 말도 옳소 하면 안 된다. 지성인이라면 합당한 판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상의 관점으로 보면 판정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각자 입장과 논리가 다르니까. 예술분야로 가보자. 개떡 같은 작품을 만들어놓고 내 관점에서는 내가 옳다고 우긴다. 인정해야 할까? 천만에. 판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재판관은 그 상황에서도 명판결을 내려야 한다. 맹자가 옳고 순자가 틀렸고 고자는 초딩수준이다. 대상의 언어를 가지면 판정 자체가 불성립이다. 주체의 언어는 인간의 능동적 행위를 강조한다. 인간의 권력을 긍정한다. 권력적으로 보면 답이 나온다. 사회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냥 개인이 있을 뿐 사회라는 것은 원래 없다고 우겨보자. 양주는 말했다. 내 몸에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에 이익이 된다해도 나는 끝내 그 터럭 하나를 뽑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터럭을 몽땅 뽑히고 죽는다. 그런 위험인물은 사회가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만인은 만인의 터럭을 뽑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지식집단은 노예주다. 노예의 털을 뽑아서 먹고사는 주제에 자기 털은 양보하지 않겠다면 그런 자는 죽어야 마땅하다. 그런 발언을 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온몸의 털을 뽑혀 죽었을 테니까. 그러므로 어불성설이다. 양주가 온몸의 털을 뽑힌 후에 아 사회라는게 실체가 있구나 하고 알아채게 된다. 사회는 존재한다. 신은 존재한다. 언어는 의미를 따라간다. 신이라는 단어가 의미가 있으면 신이 있는 것이다. 귀신이나 영혼은 의미가 없다. 의사결정주체가 없다. 내세도 없고 천국도 없고 초능력도 없다. 의사결정이 없다. 신이 없다는 말은 사회가 없다는 말과 같다. 사람은 있다. 물리적으로 작용하면 반작용한다. 사람을 한대 쳐보자. 어떤 반응이 있나? 귀싸대기가 돌아온다. 아 있구나. 사회를 한 대 쳐보자. 지존파 범죄자가 TV카메라를 향해 대한민국 부자들 다 죽여버리겠어 하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 사형판결을 받게 된다. 사회의 반응이 있다. 사회라는 의사결정단위가 실제로 존재해 있는 것이다. 대상의 관점을 가지므로 사회의 존재를 부정한다. 신을 부정하고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회가 있고 신이 있고 의미가 있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당신이 어떤 사건을 저지르면 다른 사건을 촉발한다. 주차해 있는 차를 절도해 보자. 아무런 일이 없을까? 아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져 있다. 사건의 연결은 있다. 그러므로 의미는 있는 것이다. 대상의 관점으로 말하면 의미가 끊어진다. 대상화는 인간과 대칭되어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작용이 반작용으로 돌아오므로 사건이 연결되지 않아 자기를 타격하게 된다. 결국 자기를 죽이게 된다. 왜 허무하게 느껴질까? 개인에게서 답을 찾기 때문이다. 자기 안에는 당연히 없다. 사건은 밖으로 연결되어 간다. 내 안에 뭔가 단단하고 견고하며 관통되지 않고 원자론의 성질을 가진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 부처님의 사리를 찾지마라. 내 안에 없으니까 없다는게 원자론의 사고다. 허무주의는 원자론이다. 구조론은 밖에서 답을 찾는다. 나의 행위가 사실은 사회의 행위임을 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의 의미가 있으므로 신이 있다. 우주단위의 사건이 있으므로 우주가 있듯이. 자동차는 죄가 없지만 운전자는 죄가 있다. 인간은 자동차가 아니고 운전자다. 운전자는 전방주시 의무가 있다. 인간을 능동적 행위의 주체로 보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정할 수 있다. 범위를 좁혀서 인간을 수동적 대상으로 보면 답이 없다. 아기는 잘못이 없다. 아기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가 아니므로 권력이 없고 책임이 없다. 사회는 능동적 행위의 주체이므로 선악이 있다. 효율적인 사회가 선이고 비효율적인 사회가 악이다. 허무를 극복하는 의미가 있는 것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는 생각은 신을 대상화시켜 딜을 하려는 것이다. 딜이 안 된다는 말이다. 개인이 사회를 부정하고 신을 타자화시켜 타자와 딜을 하므로 당연히 안 된다. 원래 타인은 남의 말을 안 듣는다. 당신의 말을 안 듣는다고 그 타인이 없는게 아니다. 타인은 당신 말을 안 듣지만 당신은 타인 말을 들을 수 있다. 사회는 당신 말을 안 듣지만 당신은 사회 일에 가담할 수 있다. 손흥민은 당신 말을 안 듣지만 당신은 손흥민을 응원할 수 있다. 신은 당신 말을 안 듣지만 당신은 신의 일에 가담할 수 있다. 신을 대상화시켜 당신 바깥의 어떤 존재 곧 옛날 옷 입기가 취미인 수염난 백인 할아버지라는 망상을 버린다면 반대로 그대가 그대 자신을 주체화시켜 능동적 행위의 주인으로 승급시킨다면 신을 당신의 일에 복무시키려 말고 그 반대로 간다면. 당신이 신의 일에 복무한다면 많은 의사결정의 성공을 얻어낼 수 있다. 가지가 뿌리를 흔들 수는 없다. 뿌리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뿌리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뿌리는 언제라도 그대를 흔들 수 있으므로 미리 파악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당신이 신의 일에 복무한다면 많은 의사결정의 성공을 얻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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