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중력이론 구조론에서 하는 이야기가 요즘 학계에서도 슬슬 나오고 있는 모양이다. 이곳저곳에서 단편적으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 방향은 수렴방향이다. 구조론으로 수렴되고 있다. 학계의 정설로 공인되지 않았지만 양자중력이론 등의 가설단계에서 점차 힘을 얻어가는 모양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은 없다. 이것이 구조론이다. 빛은 있으면 어둠은 없다. 빛은 광자가 있고 어둠은 입자가 없다. 광자에 대칭되는 암자가 없다. 진보가 있으면 보수는 없다. 진보는 이상주의가 있고 보수에는 이를 대체할 무엇이 없다. 이상주의가 있으므로 진보는 오류가 있어도 시행착오를 거치며 계속 전진한다. 보수는 단지 진보를 반대할 뿐이다. 진보가 죽으면 보수로 방향을 틀어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조용해진다. 진보가 죽는 과정이 보수일 뿐 진보를 대체할 무엇은 없다. 잠수함이 뜨지 못하면 가라앉는다. 어디로 가지 않는다. 삶이 다하면 어디로 가는 게 아니라 죽음으로 끝난다. 삶의 진행은 있어도 죽음의 진행은 없다. 구조론은 일원론이다. 대칭된 둘 중의 하나를 지운다. 하나의 방향성 '->'는 있고 좌우의 둘은 없다. 모든 대칭된 둘은 관측자가 개입해서 만들어낸 허상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하나인데 화살의 머리와 꼬리를 각각 보고 둘로 착각한다. 세상은 동動이다. 동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둘로 보인다. 관측자의 개입문제다. 그래서 하나를 지웠더니 사건은 있고 사물은 없다. 에너지는 있고 물질은 없다. 대칭은 있고 공간은 없다. 변화는 있고 시간은 없다. 관계는 있고 존재는 없다. 거리를 좁히면 속도가 빨라진다. 빙판 위의 김연아가 몸을 웅크려 자세를 낮추면 회전속도가 빨라진다. 좁힌 거리와 빨라진 속도는 각운동량 하나다. 이렇듯 인과관계로 짝지어진 둘에 숨은 하나를 찾아서 통합시킨다. 대칭시켜서 그중에서 하나를 계속 지우는 것이 대통일이론이다. 간단하다. 이게 아니면 저거다. 이것과 저것은 관계로 엮여 있다. 동전을 잃었는데 이쪽에 없으면 저쪽에 있다. 사과를 쥐고 있었는데 손에 없으면 뱃속에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과감하게 베팅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망설이고 주저앉는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소극적으로 되어 간다. 아인슈타인도 예외가 아니다. 젊었을 때는 과감하게 질러서 단번에 학계의 스타로 떴는데 나이가 들면서 신중해졌다. 밑져봐야 본전이니까 질러본 거다. 그런데 너무 일찍 성공했다. 얻어놓은 명성 때문에 밑지면 본전도 못 건질 판이다. 조심하다가 결국 삽질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다. 관계가 있으면 실체는 없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하는 데는 배짱이 필요하다. 온도, 압력, 부피는 없고 전하, 질량, 스핀은 있다. 온도, 압력, 부피는 인식의 귀납이고 전하, 질량, 스핀은 존재의 연역이다. 우리는 편의적으로 온도나 압력이나 부피라는 말을 쓸 수 있지만 낱낱이 해부해보면 없다. 공간이 없듯이 온도는 없다. 분자의 진동을 온도라고 표기할 뿐 온도의 실체는 없다. 부피가 없다는 말은 크기가 없다는 말이다. 비례가 있으므로 크기가 없다. 이게 한 번 가면 저게 두 번 간다는 규칙이 모여 크기를 만든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마음에 있고 자연에 없는 것을 낱낱이 걸러내자. 존재의 근거는 반응이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의 상호작용 단위가 하나의 존재다. 학계는 여전히 공간이나 시간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제는 그런 용어들을 버릴 때가 되었다. 실제로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필자의 과거로 돌아가 보자. 제논의 궤변이다.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는 반걸음 앞에서 출발한다. 아킬레스가 반걸음을 따라잡으면 거북이는 반의 반걸음을 전진해 있다. 이런 식으로 무한반복하면? 무한의 수렁에서 빠진다. 무한은 오랫동안 수학계를 분열시키고 수학자를 괴롭히는 덫이다. 볼츠만과 칸토어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 무한의 수렁이다. 무한이 존재하는 이유는 제 3자인 관측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측자는 당사자가 아니다. 관측자를 배제하면 간단하잖아. 이것이 40년 전에 생각해낸 필자의 제안이다. 우주 안에 두 개의 물체 중에서 A가 B를 도는지 B가 A를 도는지 정할 수 없다. 그것은 제 3자가 정하는 것이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아킬레스와 거북이 둘만 논하면 어떻게 될까? 아킬레스와 거북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우주 공간 어디에서 아킬레스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거북이가 반걸음 앞서 출발하고 거북이는 아킬레스가 간 거리의 절반씩 가고 주변에 비교할 그 무엇도 없다면? 우리는 아킬레스-> 거북이->로 생각하지만 비교할 제 3자가 없는 우주공간에서는 아킬레스-><-거북이다. 둘은 한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걸로 무한의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 우주 안에서 무한은 완전히 사라진다. 무한은 둘 사이의 접점에서 성립하는데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질도 사라지고 공간도 사라지고 시간도 사라진다. 대신 시간단위 1과 공간단위 1이 등장한다. 양자화된 것이다. 공간단위 1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상호작용 최소단위다. 반응하는 지점이 있다. 거기에 밸런스가 있다. 밸런스가 맞으면 반응하고 반응하면 존재한다. 대칭의 최소단위와 변화의 최소단위가 있다. 과감하게 질러야 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아킬레스와 거북을 존재로 여기지만 사실은 둘의 관계가 존재다. 둘은 시간적 인과관계와 공간적 대칭관계로 묶여 있다. 이것이 이렇게 되면 저것이 저렇게 된다. 거북이 커지면 아킬레스가 작아지고 아킬레스가 커지면 거북이는 작아진다. 모든 것은 양자화된다. 중력도 양자화된다는 것이 양자중력이론이다.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모든 연속은 불연속으로 바뀐다. 양자화되면 최소단위 1이 생긴다. 광속이 절대값을 가지듯이 모든 것이 절대크기를 가진다. 무한은 사라진다. 블랙홀은 크기가 있다. 상호작용의 최소단위가 블랙홀의 크기다. 우리는 두 A와 B가 관계 하나를 가진다고 믿는다. 반대다. 관계가 존재다. 관계는 2에 의해 성립하므로 불연속적이며 더 작아질 수 없다. 즉 어떤 2가 일치할 때만 존재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불일치면 존재가 없다. 왜 전자의 위치는 확률적으로만 파악될까? 위치를 정하는 둘의 일치를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이 없으므로 전자가 그곳에 있다는 개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밸런스가 맞는 곳이 전자의 위치다. 확률 때문에 전자구름이 되는 게 아니고 공간이 없어서다. 빛은 진행하면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일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광속은 유한할 수밖에 없다. 양자단위로 보면 세상은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필름을 통과한 빛이 스크린에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물질과 시간과 공간과 정보는 고유한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의 활동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양자중력이론과 초끈이론의 성과들은 점차 이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구조론은 하나가 있으면 다섯 개가 있다는 거다. 세균이 발견되면 귀신은 사라진다. 귀신과 천사와 도깨비와 사탄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것들이 세균의 소행으로 확인된다. 진짜 하나가 증명될 때 가짜 넷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단순화된다. 세상은 에너지의 방향성 하나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 세상에 실제하여 있는 것은 <-밖에 없다. 중력과 강력과 약력과 전자기력은 너무 많다. 하나가 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yx5iy9h5E_g
양자중력연구단체에서 제작한 우주론관련 영상입니다. 공간과 시간이 플랭크 단위라는 최소단위로 이루어져있다는 내용이 구조론과 통해서 인상깊게 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