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뇌란 무엇인가?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뇌가 보는 것이다. 우리가 보는 영상은 눈동자의 망막에 맺혀진 2차원 평면영상을 뇌가 3차원 입체영상으로 해석한 것이다. 뇌의 해석이 잘못되면 오목한 요(凹)가 볼록한 철(凸)로 보이는 착시현상이 일어난다는 데서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뇌의 3차원 해석은 매우 빨라서 인간이 발명한 그 어떤 슈퍼컴퓨터도 뇌의 연산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고 한다. 실시간으로 영상이 출력되기 때문에 인간은 뇌가 여러 단계를 거쳐 뇌 안의 어딘가에 있는 스크린에 영상을 출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눈동자와 뇌 사이는 신경세포로 연결되어 있다. 어디까지가 눈이고 어디부터가 뇌인가? 과학자들은 눈동자의 망막까지 뇌로 친다고 한다. 과연 눈동자의 망막이 뇌의 한계선일까? 그렇지 않다. 구조론의 작용반작용 원리로 보면 눈동자에 작용하는 범위가 뇌의 범위다. 뇌는 우리의 생각보다 크다.
눈과 뇌는 엄격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 눈 안에도 뇌가 있고 뇌 안에도 눈이 있다. 환상통의 예를 참고할 수 있다. 팔을 잃은 장애인이 존재하지 않는 팔에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믿는 영상이 실제로는 뇌 안의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스크린에 출력된 영상이듯이 우리가 팔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는 팔을 담당하는 뇌의 어느 부위였던 것이다.
과학자들이 눈동자의 망막을 뇌로 인정하듯이, 뇌만 뇌가 아니고 뇌 아닌 것도 뇌다. 뇌가 상당히 뇌 바깥으로 뻗어나와 있다. 굴껍질은 딱딱하게 죽어서 굴의 몸 바깥으로 버려졌지만 동시에 소중한 굴의 일부다. 껍질없이 굴은 살 수 없다. 나무의 속 심재는 생물학적으로 죽어있고 표면의 수관부만 살아있다. 나무의 속은 죽어서 지구의 일부가 되었지만 동시에 나무의 일부이기도 하다. 어디까지가 나무에 속하고 어디까지가 지구에 속하는가? 그 경계는 명확하게 나눌 수 없다.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를 박고 서 있다. 지구와 융합되어 있다. 우리가 땅 위로 솟아난 줄기와 가지만 나무로 안다면 착각이다. 실제의 나무는 나무보다 더 크다. 나무가 빨아들이는 물과 햇볕을 포함한 생태계 전체가 나무의 일부다. 이렇듯 인간의 뇌 또한 상당부분 뇌 바깥으로 진출하고 있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 인체의 모든 부위가 뇌의 말단 조직이다.
뇌는 원래 원시생명체의 위장에 있던 신경이 발달하여 만들어진 조직이라고 한다. 말미잘이나 성게나 우렁쉥이라면 눈도 없고 코도 없고 귀도 없으니 딱히 뇌라고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먹이활동은 해야 하니 위장은 있고 그 위장의 활동을 조절하는 신경은 있었고 뇌는 그 신경조직이 뭉쳐진 것이다. 뇌 안에만 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 전체에 신경망으로 퍼져있다.
구조론의 작용반작용 원리로 보면 뇌는 몸과 교감한다는 점에서 몸도 뇌의 일부다. 우리가 눈으로 백미터 밖의 사물을 볼 때 눈과 사물은 빛신호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뇌는 백미터 거리까지 파견나가 있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진실한 나의 범위다. 나의 주권이 작으면 내가 작고 나의 주권이 크면 나도 크다. 나라는 개념, 자아개념은 주도권 개념에 따라 재정립되어야 한다. 존재의 의미를 확대해 보아야 한다.
부대가 첨병을 두어 전방을 정찰하듯이 뇌는 눈이라는 창을 통하여 몸 밖으로도 상당히 진출하고 있다. 그러므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을 한다고 믿지만 착각이다. 머리에 힘 주고 우두커니 앉아있어봤자 두통이 생길 뿐이다.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어지는가? 바깥뇌에서 얻어진다. 인간의 창의는 머리를 쥐어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용반작용 원리에 따른 환경과의 교감에서 얻어진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대개 민감한 센서를 가져서 환경의 변화를 잘 읽는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의 창의력은 예술가 특유의 신경증에 가까운 민감한 센서에서 나온다. 스티브 잡스의 뛰어난 창의력은 높은 아이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애플제품의 유려한 곡선에 반영된 그 아름다운 곡선을 유년의 꼬마 스티브 잡스가 처음 보고, 그의 뇌가 격렬하게 반응할 때 생겨난 그의 강박증에서 나왔다. 그의 센서는 지나치게 민감하여 그의 뇌에 커다란 자국을 남겼으며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나서 스티브 잡스의 마음을 그 유려한 곡선에 가두어버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사로잡혀버린 것이다. 그는 분명 천재지만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그의 고집과 변덕에 골치를 앓는다. 그와 마찰하여 애플을 떠난 엔지니어가 한 둘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 교감능력 - 환경과 대화한다. ● 소통능력 - 동료의 지혜를 결집한다. ● 집중력 - 변화에 대응하여 긴장을 끌어올린다.
창의력은 높은 지능이 아니라 환경과의 교감능력, 동료와의 소통능력, 환경변화에 대응하여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집중력에서 얻어진다. 바야흐로 21세기다. 정보화 사회라 한다. 인류문명의 레벨이 한 단계 상승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새로운 접근법이 제시되어야 한다. 안쪽뇌가 아니라 바깥뇌로 승부할 때다.
문제의 해결
구조론으로 보면 문제의 해결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외부에서 에너지를 끌어오는 것, 둘째 내부에 질서를 부여하여 에너지의 이용을 최적화 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능이라고 믿는 것은 대개 두 번째다. 대기업이 하청기업을 착취하여 이윤을 얻듯이 뇌 안에 축적된 지식을 쥐어짜는 능력이다. 이 방법으로는 2등까지 가능할 뿐 1등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지능에 주목하여야 한다. 외부자원을 이용할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대두된 개념이 EQ(감성지능)라거나 SQ(영성지능)라거나 다중지능이라거나 하는 따위다. 그러나 이런 입장들은 대개 이름만 그럴듯하게 지어놓고 막연한 구호를 반복할 뿐 구체적인 콘텐츠가 없다.
인간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머리를 쥐어짜는 것은 과거의 판단을 재탕하는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서는 새로운 판단을 내놓아야 한다. 새로운 판단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 안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읽고 이심전심의 원리를 적용하여 성공시킨다. 게임의 법칙이 지배하는 대결구도 안에서 상대방의 행동을 짐작하고 거기에 연동시켜 나의 대응을 결정하는 형태로, 피아간에 주거니 받거니 하며 사유를 진행시켜 가는 것이다.
바둑실력을 늘리려면 아무래도 고수와 대결해 보아야 한다. 혼자서 바둑을 둔다면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상대방의 절묘한 공격이 있음으로 해서 나의 멋진 반격계획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라이벌과 좋은 동료가 창의력의 밑거름이 된다. 지적 능력이 상당히 떨어지는 둔한 사람도 게임의 구조 안에서는 주의가 환기되어 제법 눈치를 읽고, 주제파악을 하고, 분위기를 감잡고 개념을 챙겨 좋은 판단을 하게 된다. 분명 머리가 좋고 시험성적이 우수한데도 군대와 같은 단체생활에서 분위기파악을 못하고, 개념을 잡지 못해서 고문관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어떤 상황에서도 금방 적응을 하지만 시험만 치르면 0점을 맞는 사람도 있다. 바깥뇌의 활용방식 차이다. 지능이 머리 속에만 들어차 있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사이의 경계면에 걸쳐져 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머리 속에 든 지능이 없어도 바깥뇌를 활용해서 고도의 지적인 활동을 한다.
광고천재 이제석의 예가 좋은 본보기가 된다. ‘광고천재 이제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화제가 되었는데 이 분은 단지 지방대를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국내에서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다.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국내의 공모전에서 수상하지 못했고 이름있는 광고회사에 취업하지도 못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이 안 되어 고향에서 간판일을 하다가 울화가 치밀어서 큰 결심을 하고 외국유학을 가더니 해외의 유명광고제를 싹쓸이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그를 알아주지 않은 국내의 공모전 주최측이나 혹은 일류대학 출신을 선호하는 유명 광고회사만의 탓일까? 물론 그런 점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고립되어 있으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고래는 넓은 물에서 헤엄쳐야 한다. 거기서 좋은 동료를 만나야 재능이 발휘된다. 한국에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던 사람이 프랑스에 가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예는 흔히 있다. 문제는 이런 사람이 다시 한국으로 귀국하면 원래의 재능없는 사람으로 퇴행하는 수가 있다는 점이다. 아이큐가 자기 머리 안에 박혀 있다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재능있는 사람이 외국에서 성공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좋은 동료를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바깥뇌의 아이큐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민화를 예로 들 수 있다. 외국에서 격찬을 받는다고 하지만 정작 한국에서 알아주지 않는다. 외국에서 격찬을 받는다고 해서 한국의 민화를 대량생산하면 가치가 있을까? 아니다. 외국의 회화시장은 날로 진보하고 있으며 그 진보의 방향성과 한국의 민화가 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 것이며, 한국 안에서 민화는 진보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방향성도 없다. 한국의 민화는 보편의 흐름으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채 호흡하지 못하고 있다. 시대정신과 교감하지 못한다.
한국의 민화가 프랑스의 예술을 살찌울수는 있어도 그냥 한국 안에서는 스스로 성장할 수 없다. 박제되어 박물관에나 보존될 뿐이다. 구조는 심과 날을 얻어야 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이다. 서구의 보편적 심에 한국민화의 특수적 날을 보탤 수 있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구조적으로 불능이다. 한국의 민화는 구조의 심이 없으므로 이 상황에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결국 남 좋은 일 시킨다. 서구에 아이디어를 약탈당한다.
한국 뿐 아니다. 2차대전 후 예술계에 아프리카풍, 인도풍, 일본의 젠스타일, 라마교 붐 등 다양한 붐이 있었고 그 기세가 뻗어와서 마침내 한국의 민화까지 넘보게 된 것이다. 유럽에 아프리카붐이 있었다고 해서 아프리카 예술이 진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아이디어를 약탈당할 뿐이다. 결국 유럽문화를 살찌우는데 구색맞추기로 이용된다. 유럽의 지식인들이 서재를 아프리카풍 혹은 인도풍, 인디언풍, 일본풍으로 꾸며놓고 잘난체 하며 겉멋을 과시하는데 이용될 뿐이며 아프리카 정신의 본질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은 세치 혀를 놀려 입으로 격찬하며 표피를 훔칠 뿐 한국정신의 본질은 악착같이 배제한다. ‘예쁘다’고 감탄하며 미(美)를 추켜세울 뿐 그 안에 숨은 성(聖)은 도외시 한다.
광고천재 이제석의 광고아이템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대개 인류의 보편가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TV광고는 유머러스한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고 한국의 TV광고는 인기연예인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광고시장이 섬처럼 격리되어 갈라파고스 신드롬을 일으킨 결과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져 다른 방향으로 독특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에 보편가치를 앞세운 이제석의 광고스타일과 맞지 않았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하나의 원리만 가지고 세계적 천재 이제석의 모든 좌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상당부분 학벌에 따른 편견이 작용했음은 명백하다. 분명한 것은 이제석이 국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졸업과 동시에 국내의 일류 광고회사에 취업했다 하더라도 그의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갈라파고스 신드롬이 문제다.
특히 일본인들이 그러하다. 세계 IT시장의 흐름과 동떨어져 일본에서만 통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서만 팔리는 미니디스크가 대표적이다. 닌텐도와 같은 게임기 시장에 집착하는 것도 그러하다. 일본의 바깥뇌가 죽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어느 면에서 고립된 섬이다. 미일의 가치만 받아들이고 중러의 가치,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치, 유럽의 가치는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가면 미일에 종속되어 그 방향으로 뇌가 굳어진다.
예술은 소통의 수단이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표준이 제시되어야 하며 낮은 레벨의 표준에 갇혀서 진보할 수 없게 되는 것이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다. 예컨대 일본회화의 경우 전통적으로 인체를 왜곡하여 표현하는 경향이 있다. 입을 작게 그리는 것이다. 그 안에도 독특한 세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애니메이션은 모두 캔디처럼 눈만 크게 그리고 코는 생략하고 입은 작게 그리는 유행에 보편화 되어 표준이 되어버린다. 한번 잘못된 표준이 만들어지면 그 방향으로 계속 가는데 그 길이 낭떠러지다. 돌이킬 수 없다. 특수성이 보편성을 죽인 것이다. 바깥뇌의 죽음이다.
창의력은 바깥뇌에서 얻어진다. 구조론의 밸런스 원리에 따라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내부에서 자가발전으로는 결코 창의하지 못한다. 한국과 같은 좁은 시장일수록 강고한 트렌드의 위력에 종속되어 한 가지 방향의 창의만 선택되며 다른 가치는 매장되고 만다. 좋은 창의는 바깥뇌의 사용에서 얻어지며 바깥뇌의 사용은 고립되고 정체한 좁은 시장에서는 먹히지 않고 진보하고 개방된 큰 시장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답은 항상 바깥에 있다.
천재의 자궁
바야흐로 1명의 뛰어난 천재가 10만명의 평범한 사람을 먹여살리는 시대이다. 요즘 잘나간다는 삼성이 힘주어 강조하는 논리다. 그러나 삼성은 착각하고 있다. 지금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이어 아이TV까지 싹쓸이하려고 하고 있다. 인간의 삶 전체를 뜯어고치려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아이디어라곤 없는 삼성의 주체사상 비슷한 독재자 마인드로는 뒤처질 뿐이다.
창의력 교육은 이명박식의, 주입식의, 스파르타식의 영재교육이 아니라 그 한명의 천재가 아이디어를 훔칠 수 있는, 라이벌의식을 가지고 신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죽이 맞는 동료가 되어주는 열명의 개성있는 친구를 붙여줌으로써 가능하다. 그 열명의 친구는 뛰어난 지능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한 명의 천재와 대화가 되어야 한다. 죽이 맞아야 한다. 비슷한 공부벌레만 모여있는 서울대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지식의 근친상간으로 열성인자만 결집될 뿐이다.
진정한 천재는 그 독특한 열명의 개성있는 친구와 교감하는 데서 아이디어를 얻는다. 천재의 90프로는 내부의 아이큐가 아니라 바깥 환경과의 교감능력, 동료와의 소통능력, 환경변화에 지속적으로 대응하여 마음의 긴장을 끌어내는 능력인 집중력에서 얻어진다. 미국인들이 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보면 미국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익숙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마이클 스코필드는 개성있는 동료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종합할 수 있는 뛰어난 소통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구조론의 심과 날에서 두 날의 밸런스를 자유자재로 제어할 수 있는 심이 된다. 물론 중국에도 수호지가 있어 인내심과 결단력을 동시에 갖춘 급시우 송강의 캐릭터가 신중함과 과감함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제어하는 마이클 스코필드의 캐릭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발명가 에디슨의 아이디어는 대부분 아마추어 연구가들에게서 얻어졌다. 그들 아마추어들은 좋은 아이디어를 가졌지만 그것을 구체화할 능력이 떨어졌다. 에디슨은 신문의 보도나 혹은 거리에서 떠도는 다른 사람의 미완성 아이디어에 자기의 재능을 결합하여 그것을 완성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그는 발명회사를 차려 수백명의 직원을 고용해놓고, 남의 불완전한 아이디어를 그 수백명 직원의 뛰어난 개발력으로 완성시킨 다음 자기 이름으로 특허를 냈던 것이다. 개발력 없는 다락방의 개인 발명가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실험재료와 연구비를 조달할 수 없기 때문에 에디슨에게 아이디어를 사냥당하고 만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발명공식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있어도 일을 풀어가는 순리를 몰라서 누군가의 도움을 구하지 않고 혼자서 끙끙대다가 좌절하고 만다. 그러나 발명공식을 아는 에디슨은 매뉴얼을 만들어 놓고 300명의 부하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려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나의 제품은 소재, 기능, 성능, 효능, 양식 다섯 단계에서 혁신을 일으킬수 있으며 이 중에 어느 것을 변화시켜도 동일한 목표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 효율성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되는 수가 있다. 어떤 제품을 발명하려 하는데 소재를 바꾸면 쉽게 해결되는 것이, 기능을 바꾸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매우 어렵게 해결되는 것이다. 또 기능을 바꾸면 쉽게 해결되는 것이 성능의 문제로 접근하면 더욱 어렵게 되기도 한다. 문제는 소재나 기능의 변화를 꾀할수록 더 높은 수준의 개발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더 많은 실험과 중간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이 없고 동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마추어들은 더 낮은 레벨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발명과정에서 아이디어만 뺏기고 실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을 도모할 때는 먼저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유리한 포지션에 가서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 바깥뇌다.
스티브 잡스의 예도 그러하다. 그의 친구들은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디어를 약탈당하지만 불만은 없다. 어차피 자기 능력으로는 그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직접 연주하지 않으면서도 멋진 화음을 끌어내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로 자기의 작품을 성공시키곤 한다. 스티브 잡스가 한때 좌절했다가 최근에 다시 뜨는 이유는 좌절하여 낭인으로 보냈던 10여년 사이에 아류 스티브 잡스가 무수히 생겨나서 큰 세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티브 잡스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괴퍅하기 짝이 없는 스티브 잡스와 무리없이 대화가 된다. 스티브 잡스와 대화가 통하는 인재가 무수히 양성된 것이 애플의 최근 성공비결이다. 이렇게 바깥뇌가 만들어진 것이다.(양을쫓는모험님 글 참고 http://changtle.com/)
지성이 바깥뇌다
필자가 강조하려는 것은 지성 개념이다. 인격을 닦아야 인격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 있어야 인격자가 된다. 은자가 혼자 깊은 산중에 앉아 도를 닦거나 혹은 강단의 학자가 골방에 앉아 홀로 천하를 근심하며 이마를 찡그리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는 인격을 닦을 수 없다. 그들은 고매한 지식인의 표정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을 시켜보면, 특히 정치판에 데려다 놓으면 갑자기 정운찬 바보가 된다. 진정한 지성은 내 안의 마음을 닦는데 그치는 소승적 태도로는 도달할 수 없다.
내 바깥에 뇌를 건설함으로써 가능하다. 죽림칠현이 무더기로 죽림에서 놀았다거나, 혹은 소동파가 서원아집도에 묘사된 것처럼 온갖 다양한 개성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혹은 시를 쓰고 혹은 그림을 그리고 혹은 토론을 하며 즐겼다거나, 혹은 추사가 신분이 다른 초의와 다산과 교유하였다거나, 혹은 조선시대 선조임금 대에 이르러 고봉과 율곡과 퇴계와 화담을 비롯하여 무수한 인재가 떼로 나타난 예와 같이 서로 경쟁하면서 어떤 변화의 흐름을 끌어내는 가운데 참된 지성이 얻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대승의 정신이다. 큰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서야 한다.
그 현장에서 역사의 엔진이 작동을 중지하면 세상에 선비는 사라지고, 지성은 소멸하고, 인격자는 없어지고 그 바닥은 완전히 명박스러워져서 그만 황폐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단지 주입식으로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인격을 닦을 수 없고, 실제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어 경쟁해야 한다.
근대의 지성인 개념은 비판적 지식인, 실천적 지식인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이들은 앙드레 지드, 앙드레 말로, 헤밍웨이, 로망 롤랑, 생텍쥐페리, 에밀 졸라, 피카소, 조지 오웰, 브레히트, 네루다들이며 이들은 대개 스페인 내전에 국제여단으로 총을 들고 직접 참전하였거나 혹은 작품활동으로 인민전선을 측면지원한 데서 그 구조의 중핵이 이루어졌다. 구조론의 심을 이루고 날을 얻어 방향성을 확보하고 외부 에너지 공급을 받아 생명성을 얻어 전진을 개시한 것이다.
현대의 지성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국제여단의 참여정신, 실천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도 그 이야기다. 말하자면 지성은 그냥 지식을 얻고 인격을 닦아 골방에서 혼자 에헴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공간에 뛰어들어 실천함으로써 역사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 흐름 안에 다수를 끌어들이는 형태로 세력화 되어 구조의 나무를 키워가는 데서 탄생하는 것이며 이것이 대승의 정신이고 그 안에서 지성은 호흡하고 있다. 말하자면 바깥뇌를 건설한 것이다.
인류는 60억이다. 60억개의 뇌세포가 모여 또다른 인격이 만들어진다. 그것이 지성이다. 지성인이란 그 인류전체가 공유하는 바깥뇌와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다. 그 뇌는 역사의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한다. 만약 현장에서 그러한 역사의 변혁이 중단되면 지식이 역할을 잃고, 대신 산업이 목청을 높이며, 지성은 퇴조하여 이문열, 김동길, 전여옥 같은 불량한 변종이 출현하게 된다. 우리 지성이 호흡할 수 있는 지성의 나무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성의 아이디어풀이 독립적 인격을 가지고 작동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부의 구심점과 외부의 방향성을 얻어 구조의 심과 날을 이루며, 바깥에서 에너지 공급라인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자원을 끌어들여 세력화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성은 구조의 나무가 성장하고 있는 동안만 작동한다. 성장과 발달, 진보와 혁신을 멈출 때 호흡은 중단된다. 그렇다면 길은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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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 머리통 몸통, 온통
온통 번쩍거리오. 번쩍거리리면 뇌.
기꺼이 바깥뇌와 사유하오.
안뇌 바깥뇌 온뇌로 사유. 온몸으로 작업, 온통 번영이오.
번쩍번쩍하오.
오늘 잠시 서점에 들러 이제석의 책을 봤는데, 확실히 그의 광고는 그만의 스타일이 있었소. 나도 소시적 국내 광고공모전에 출품했던 기억이 나더이다. 미국에 유학간 후에 커뮤니케이션에 관하여 나름 공부를 하면서 달라진 점도 있을 테지만, 그가 해외의 광고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작품들을 보면, 결코 우리나라 광고회사와 광고제에서는 딱 선호하지 않는 작품인거 같다는...
이제석의 작품은 메세지는 단순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평면의 이미지와 공간의 상황이 맞닿아 발생하는 시각적인 아이러니. 그 스타일을 줄기차게 고수하였소. 말하자면 A라는 이미지와 전혀 상관없는 B라는 이미지를 함께 놓으면서 C라는 강력한 메세지가 나오는 변증법적인 디자인이오. 이제석의 작품은 평면이미지 + 공간(그 자체) = 입체적인 메세지를 창조한 게요.
디자인에서 공간을 발견하여 메세지의 에너지를 끌어온 게요. 여러 작품들을 보았지만, 모든 작품을 하나로 꿰는 스타일은 바로 '공간'이었소. 한국의 광고회사라면 이런 디자인을 좋아하질 않소. 이런 디자인이 해외에서 통하는 이유는 메세지가 간결하면서, 이미지가 보는이에게 영감을 주기 때문이오. 제품이 잘팔리느냐도 중요하지만, 광고가 보는이에게 영감을 주느냐를 해외에서는 더 쳐준다오.
구조론 모임이 큰 수레가 되고 바깥 뇌가 될 것이오.
이 커다란 나무에서 앞으로 무수한 지성이 탄생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