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구조론을 알아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조론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뭔가 대화가 계속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구조론은 언어감각이다. 언어는 당연히 전제와 진술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여차여차해서 여차여차하다고 말해야 한다. 그 안에 메커니즘이 있다. 많은 지점에서 대화의 장벽을 느낀다. 메커니즘이 없다. 공허하다. 아귀가 맞지 않다. 대화는 겉돌고 있다. 엉성하잖아. 예컨대 달착륙 음모론이라고 치자. 아폴로 우주인이 깃발을 휘두르는 동영상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정말이지 패버리고 싶다. 더 많은 것을 보지 못했느냐는 말이다. 재현실험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았어? 예컨대 이런 거다. 눈부신 미인이 있다고 치자.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이 선수를 친다. '발이 너무 못생겼잖아. 저런 뻔뻔스러운 추녀를 봤냐고.' 이렇게 말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동의를 구한다면? 그는 전족미인만 봐온 청나라 사람이다. 주먹이 날아가지 않을까? 보신탕 골목 앞을 지나가며 철창에 갇혀있는 개가 불쌍해서 한마디 하려는데 선수를 친다. '이야. 맛있겠네. 된장 발라야지.' 이러면서 입맛을 쩍쩍 다신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달에는 공기만 없는 게 아니라 중력도 약하다. 영상에는 그에 따른 많은 짚어줄 만한 포인트들이 있다. 거기에 전율함이 있다. 재현실험을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왜 그것을 말하지 않지? 답답하기 짝이 없다. 나만 억장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전족한 발을 찬양하는 청나라 관리들과 문답한 서양 선교사의 기록은 많다. 다들 억장이 무너져서 기록을 남긴 것이다. 눈에 보이는 소실점을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자들과의 대화는 허무하다. 인상주의 회화의 등장 이후와 그 이전의 그림은 완전히 방향이 다른 것이다. 예술에 대한 태도와 관점이 다르다. 대화가 막히는 답답한 지점이 분명히 있다. 예술을 두고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일종의 기예로 여기는 사람과의 대화는 허무하다. 서커스 구경하러 왔다는 말인가? 기생을 불러놓고 나를 만족시켜 봐라 하는 자들과 대화할 수 있단 말인가? 초딩도 안 믿을 귀신이니 내세니 천국이니 환생이니 영혼이니 이딴 개소리를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해? 귀신이라는 말이 단어로 성립하려면 넘어야 할 많은 전제가 있다. 전제의 전제의 전제의 더 전제가 있다. 왜 그걸 이야기하지 않지? 세상이 일원론이냐 다원론이냐 하는 주제가 전제된다. 세상이 에너지냐 물질이냐 하는 전제가 앞선다. 세상이 사건이냐 사물이냐 하는 전제가 선결되어야 한다. 왜 뱀을 봤다면서 머리를 말하지 않고 꼬리만 언급하느냐 말이다. 용을 봤다고 치자. 당연히 용머리를 말해야 한다. 근데 왜 용꼬리만 언급하느냐고. 자동차를 타봤다면서 엔진이나 핸들이나 계기판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손수레를 타본 것이 아닐까 의심해야 한다. 비행기를 타봤다면서 공항에 대해서 여권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놀이동산에 가서 장난감 비행기를 타고 온 거 아냐? 이런 의심이 드는 것이다. 먼저 정리해야 할 선결과제가 있는 것이다. 타임머신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단 말이 아니다. 곡을 작곡한다고 하면 말이 되는데 북을 작곡한다고 하면 뭔 개소리여? 북을 친다고 해야 맞지. 영구기관도 마찬가지다.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일단 언어가 아니다. 그런 말이 언어로 불성립이다. 굳이 말하면 숫자가 더해지는 빼기라는 말과 같다. 덧셈이면 덧셈이고 뺄셈이면 뺄셈이지 덧셈이 되는 뺄셈이라는 엉터리 말이 어디에 있어? 말 되느냐고.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궁이 있다. 그 이전 단계를 먼저 설명해야 한다. 갑툭튀 하면 어색하잖아. 사과가 있기 전에 사과나무가 있었다. 비가 내리기 전에 먹구름이 끼었다. 땅거미가 올라가기 전에 해가 기울었다. 영혼이든 귀신이든 내세든 천국이든 자궁부터 말해야 한다. 애초에 관점이 다르고 시선이 다르고 방향이 다른 자와 노닥거릴 이유가 없다. 물리쳐야 하는 적이다. 무인도에 두 사람이 있다. 서로 잡아먹으려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서로 힘을 합치려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맞다. 진보는 힘을 합치고 보수는 잡아먹자는 것이다. 물론 배가 고프면 잡아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는 불성립이다. 세상에 보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그들과 대화할 이유는 없다. 나를 잡아먹겠다는 자와 무슨 대화?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세계에도 나름대로 건질 것은 있다. 뽕짝에도 숨은 매력 있다. 그런데 단조롭잖아. 풍성하지 않잖아. 무협지도 나름대로 뭔가 있으니까 독자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상에서는 더 많은 것이 보이잖아. 미인의 머릿결, 얼굴, 쇄골, 가슴, 허리, 엉덩이 등 많은 매력포인트들이 있는데 하필 발에 감탄사를 던지다니 환장할 일이다. 보수로 가도 뭔가 있지만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 반면 진보로 가면 무궁하다. 계속 발굴되어 나온다. 달착륙 음모론자들이 내세우는 게 1이라면 그 반대쪽은 100배다. 그게 보이지 않는가? 번쩍이는 금을 외면하고 굳이 우중충한 납을 찾는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영화를 보되 9천 원 티켓값이 아깝지 않게 서비스해달라는 수요자의 관점을 가진 사람과 자신이 영화감독이라면 저 장면을 어떻게 찍을까 하는 공급자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상반된 위치에서 영화를 본다. 내가 돈을 냈으니 대접받아야 한다며 재미 위주로 영화를 본다. 반대로 내가 작가라는 관점을 가지면 재미에 더하여 작품성까지 본다. 더 많은 얘깃거리를 건질 수 있다. 어느 방향이든 맞추어야 한다. 감독아. 배우야. 내가 고객이다. 고객은 왕이다. 나를 즐겁게 해봐라. 이런 비뚤어진 관점으로 영화를 본다면 많은 부분을 놓친다. 영화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눈 감고 영화를 보는 것이나 진배없다. 조명은 어떻게 처리하고 미장센은 어떻게 해결하고 배우는 어떻게 움직였는지 생각하면서 본다면 디테일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재미를 왜 포기해? 세상을 이끌어가는 대표자 관점에 서야 보인다. 약자의 관점, 피해자 코스프레, 방어적 관점, 사물을 보고 속성을 보고 결과에 주목하는 관점으로 본다면 거의 눈을 감고 사는 셈이다. 객석에 앉지 말고 무대를 장악하는 연주자가 되어야 한다. 승객이 되지 말고 핸들을 잡자. 차를 타는 재미보다 운전하는 재미가 훨 낫다. 강자의 관점, 대표자의 관점, 공격자의 관점, 통제가능성의 관점을 얻어야 한다. 사건을 보고 에너지를 보고 구조를 보고 사건의 원인측에 주목하는 관점을 얻어야 한다. 독자가 아닌 작가의 눈높이가 필요한 거다. 할 이야기가 태산처럼 쏟아진다. 백 배로 더 즐길 수 있다. 음모론 따위 찐따 같은 소리나 하는 자들은 콤플렉스를 숨긴 것이며 보상받으려는 것이다. 뭔가 반대하고 부정하고 맞서고 대결하면 그 안에서 권력이 작동한다. 너절한 권력놀음에 중독되는 것은 권력 없는 자들의 자위행위다. 사실이지 인간은 근본 권력을 찾는 존재다. 하긴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는 것보다 그냥 대마초 피우는 게 빠르다. 도전해서 성과를 내기보다 그냥 아무거나 기왓장이나 하나 주워들고 이것이 성과다 하고 자기를 속이는 게 빠르다. 진실은 어렵고 거짓은 쉽다. 그러나 길을 알았다면 이제라도 진실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
"독자가 아닌 작가의 눈높이가 필요한 거다. 할 이야기가 태산처럼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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