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속성으로 사물을 이해한다. 만유에 고유한 속성이 있다는 거다. 금은 금의 성질이 있고 구리는 구리의 성질이 있다. 천만에. 속성은 없다. 그것은 얼버무린 표현이다. 관측자 기준에 그렇게 보일 뿐이다. 예컨대 사과가 빨갛다고 한다. 그런데 색맹이 봐도 붉은가? 밤에도 붉은색인가? 벌써 헷갈리기 시작한다. 붉음은 사과에 있는가, 그 사과를 보는 눈에 있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사과와 눈을 연결하는 매개인 빛에 있는가? 우리가 막연히 믿는 만유의 고유한 속성은 없으며 그것은 인간의 감각기관이 연출한 허상에 불과하다. 게다가 원자 단위로 쪼개보면 의미가 사라진다. 일정한 조건에서만 성립하므로 운이 좋아야 한다. 화창한 날에는 사과가 붉은색이지만 깜깜한 밤에는 색이 사라진다.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 논해야 한다. 사과의 붉은 색깔은 사과와 빛과 눈이라는 3자 간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맞아떨어지기에는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그렇다면? 고유하지 않다. 내적인 속성이 아니라 외적인 관계가 결정한다. 그 사과를 바라보는 사람과 그 사과를 비추는 빛은 사과 밖에 있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것은 속성이 아니라 일이다. 빛이 일을 해서 색깔을 연출한 것이다. 그런데 일은 시간이 걸린다. 과연 일하고 있는지 알아내려면 지켜봐야 한다. 예컨대 금이 금이고 구리가 구리라는 사실을 판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아니다. 황금과 구리가 각각의 고유한 광택을 내는 데는 적어도 광속이 걸린다. 광속보다 빠르게 알아낼 수는 없다. 분명히 일을 하고 일정한 시간이 걸린다. 너무 빨라서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에 무시할 뿐이다. 그런데 지구가 과연 태양을 도는지는 적어도 1년을 지켜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무시할 수 없다. 모래시계를 보자. 모래시계를 규정하는 것은 모래시계가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일은 혼자 못한다. 모래시계의 일은 세 가지가 결정한다. 첫째, 깔때기 구멍의 크기다. 깔때기 구멍이 너무 넓으면 모래는 순식간에 빠져버린다. 그 경우 시간을 잴 수 없다. 모래알 굵기도 중요하다. 너무 굵으면 깔때기를 통과하지 못한다. 결정적으로 중력의 기여가 있다. 무중력 공간이라면 모래시계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은 어떤 둘이 구조적으로 결합해야 성립하며 여기에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의 것이 추가된다. 최소한 셋이 모여야 일할 수 있다. 작용측과 반작용측 그리고 에너지다. 그런데 에너지는 언제나 외부에서 들어와 순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 똑 떨어지는 존재는 없다. 수학의 불완전성과 같다. 무모순적으로 내부에서 똑 떨어지는 독립적인 공리계는 우주 안에 없다. 반드시 외부와 관계를 맺고 빌붙어 있다. 소라도 비빌 언덕이 있고 원숭이도 손을 내밀어 붙잡을 가지가 있고 웹페이지라도 링크가 걸려 있다. 엮여 있다. 고립계가 아니다. 세상은 일의 집합이고 일은 서로 엮여서 성립한다. 일의 내용은 환경과의 관계가 결정하고 우리는 구조를 통해 그러한 내막을 살필 수 있다. 일을 하려면 최소 3자가 모여야 한다. 일단 연필이 있고 종이가 있어야 한다. 연필과 종이만으로 일이 안 된다. 사람이 에너지를 투입해야 일이 진행된다. 비로소 글자가 써진다. 연필과 종이는 대칭을 이루고 에너지는 양자를 통일한다. 연필이 너무 세면 종이가 찢어지고 종이가 너무 강하면 연필이 미끄러진다. 그래서 대칭이다. 에너지는 연필에 가해지고 종이에 전달되는 필압으로 작동한다. 필압이 연필과 종이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때로는 종이를 돕고 때로는 연필을 돕는다. 통제한다. 축과 대칭이 갖추어지면 일은 준비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실질적인 일의 진행이 있고 최종적인 일의 결과물이 있다. 대칭은 상대적이다. 매커니즘은 그것을 절대성 안에 가둔다. 양자를 통일하는 조절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일은 시간상에 진행되므로 그것이 있다고 말할 때는 눈에 보이는 구조를 말할 수밖에 없다. 악기는 공간에 놓여있지만 음악은 시간에 걸쳐 있다. 공간의 위치를 지목할 수 있지만 시간의 위치를 가리킬 수 없다. 연주가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 위주로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일은 연결되어 있음으로 딱 분리해서 지목할 수 없다. 사건은 계를 지정해 분리한다. 하나의 에너지 입력이 하나의 사건이다. 일은 복잡하게 엮여 관계를 맺는 것이며 사건은 거기서 하나를 분리하여 구조를 드러낸 것이다. 세상은 일의 집합으로 존재하며 우리는 거기서 닫힌계를 지정하여 하나의 사건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개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고립계는 아니다. 사건은 다른 사건과 연결된다. 원인측에서 보는 점이 중요하다. 속성으로 보는 관점은 사건의 결과를 보는 것이다. 일이 끝난 다음이다. 에너지는 사라지고 없다. 달리는 자동차가 아니라 멈춰선 자동차를 보는 것이며 살아있는 물고기가 아니라 죽은 생선을 보는 것이다. 멈춰선 자동차의 관점은 자동차와 비행기를 구분하는 데 쓰이고 달리는 자동차의 관점은 운전하는 데 쓰인다. 대상을 통제하려면 사건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운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근본 세계관의 문제다. 비뚤어진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자가 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을 약자로 놓고 피해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발언권을 얻을 목적 때문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발언권이 없으면 발언하지 말아야지 왜 발언하려 해? 자동차는 피해야 해. 사고 날 수 있잖아. 하는 식이다. 그런 식이라면 평생 운전면허를 취득하지 못한다. 도전자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피해자 코스프레 곤란하다. 내가 피해를 봤으니까 나도 사건의 당사자야. 나도 대화에 낄 자격이 있어. 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대가 진리를 찾는 학자라면 이미 사건 속에 들어와 있다. 자격획득을 위한 노력은 필요 없다. 학계 안에서 보는 시선과 학계 밖에서 어떻게 엉겨보려고 시비를 거는 자의 시선은 다른 것이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프로토콜을 맞추지 못하니 대화가 안 된다. 반작용이 아닌 작용측, 결과가 아닌 원인측, 사물이 아닌 에너지, 존재가 아닌 일, 피해자가 아닌 주최측이어야 한다. 개인이 아닌 대표자, 피동이 아닌 능동, 약자가 아닌 강자, 방어가 아닌 공격, 보수가 아닌 진보의 관점을 가져야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애들은 가라. 약자는 가라. 보수꼴통은 가라. 발언권 얻으려는 자는 가라. 에너지가 없는 자는 가라. 숨으려고 하고 도망가려고 하고 소극적으로 적응하려고 하는 자는 가버렷. 운전자의 시선을 얻지 못한 자는 운전석에 앉지 마라. 승객의 관점을 가진 자는 얌전하게 좌석에 앉아 있어라. 자신의 무대를 설계할 야심을 품은 자만 구조론을 배울 일이다. 원래 진리는 바보들에게 필요 없는 것이다. 인간 중에도 지도자급에게나 필요한 지식이다. 극장에 가서 영화가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사람 있다. 소설을 읽고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자들 있다. 그런 식으로 자기소개하는 자들은 어른들의 대화에 끼워줄 수 없다. 감독의 시선을 갖지 않고 티켓값 9천 원을 아까워하는 자들 말이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자신이 작가라면 이 대목을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해야 한다. 작가가 그 부분을 얼버무리면 비웃어주는 재미가 있다. 감독의 눈으로 영화를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화가의 눈으로 그림을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생산자의 눈으로 제품을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공급측이 아닌 수요측에 서 있는 자는 자격이 없다. 에너지를 틀어쥔 주최측의 입장에 서면 비로소 만유의 엮여있음이 보이고 관계가 보이고 에너지가 보이고 사건이 보인다. 구조가 보이고 메커니즘이 보이고 시스템이 보인다. 에너지가 진행하여 가는 결이 보인다. 만유의 조절장치가 보인다. 계기판이 보이고 핸들이 보이고 클러치가 보이고 엑셀러레이터 페달과 브레이크가 보인다. 그것이 눈에 보여야 대화할 수 있다. 감은 눈을 결코 뜨지 않겠다는 자는 전람회에 입장 시켜 줄 이유가 없다. |
"개인이 아닌 대표자, 피동이 아닌 능동, 약자가 아닌 강자, 방어가 아닌 공격, 보수가 아닌 진보의 관점을 가져야 진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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