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론은 언어감각으로 아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구조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문법을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게 아니다.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오고 동사가 오는 것은 말하다보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마찬가지다. 주어가 앞에 오듯이 에너지가 앞에 온다. 에너지가 사건의 원인이다. 에너지는 토대의 공유에서 나온다. 공유하면 효율적이고 효율이 있는 곳에 에너지가 있다. 관계는 공유된다. 주변과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동원력이 있다. 에너지가 있다. 인맥이 있고 학력이 있고 배경이 되는 세력이 있다면 더 많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 우리가 독점보다 공유를 꾀하는 것은 그곳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에너지의 사용이 공유를 사유화하는 형태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에너지를 공유하기만 하면 사용하지 못하고 사유화하면 고갈되어 지속가능하지 않다.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 것이며 수순은 선공유 후사유가 정답이다. 바둑으로 말하면 초반의 포석은 이후의 행마과정에서 공유된다. 포석만 하고 있어도 지고 포석을 하지 않아도 진다. 균형이 필요한 것이며 수순은 포석이 먼저다. 초중고 교육과정은 무언가를 학습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공유하는 게 목적이다. 호르몬을 나누며 같은 교실에 앉아있는 게 중요하다. 공존을 훈련하는 것이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은 지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같은 편끼리 팀플레이를 못한다. 그것은 호르몬 차원이고 무의식 차원이므로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서열싸움 하는 개들처럼 반드시 문제를 일으킨다. 서열이 없으면 서로 눈치를 보며 불안해한다.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려면 동료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신뢰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메커니즘은 공유되고 시스템은 공유된다. 같은 반에서 배운 학생들 사이에 형성된 끈끈함이 공유되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의 자산이다. 그런 것에는 보통 이름이 없다. 에너지는 그 이름없는 것에서 나온다. 구조론은 간단히 원인과 결과 둘로 설명되는 사건을 다섯으로 세분한 것이다. 주사위를 던졌다면 눈을 결정하는 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과정과 땅에 떨어져서 굴러가는 과정이 있다. 던지는 과정이 원인측의 상부구조라면 굴러가는 과정은 결과측의 하부구조다. 사건이 두 개로 나눠지는 것이다. 어떻게 던지느냐도 중요하지만 바닥상태도 중요하다. 바닥이 미끄럽다든가 하면 결과는 달라진다. 작용과 반작용이 있는 것이며 작용측의 사정과 반작용측의 사정이 있다. 원인을 한 개로 설명하기는 틀려먹었다. 게다가 공기의 상태도 중요하다. 주사위를 어떻게 쥐는지가 첫째 중요하다. 둘째 어떻게 놓느냐가 중요하다. 셋째 공기의 영향을 받는다. 넷째 바닥의 상태가 중요하다. 다섯째 주사위를 멈추게 되는 과정도 중요하다. 즉 5회에 걸쳐 변수가 있는 것이다. 각각 질 입자 힘 운동 량을 이룬다. 사건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원인>결정>결과의 셋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원인측과 결과측에서 각각 원인>결정>결과가 있으므로 곧 공중에 던지는 과정에서의 원인>결정>결과와 땅바닥에 굴러가는 과정의 원인>결정>결과가 있으므로 여섯이지만 상부구조의 결과가 하부구조의 원인이므로 중복을 제거하면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다섯으로 사건이 완성되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은 에너지의 입력절차와 출력절차에서 각각 인과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즉 두 사건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때문에 두 사건이 합쳐지지 않는 경우는 없다. 성냥으로 불을 켠다면 성냥개비를 적린에 마찰시키는 절차와 부싯깃에 옮겨붙이는 절차다. 질은 적린과 성냥개비가 충돌하고 입자는 성냥개비에 불이 옮겨붙고 힘은 불씨를 부싯깃에 옮기고 운동은 부싯깃을 입으로 불고 량은 불이 완벽하게 붙는다. 이 과정을 둘로 나누면 성냥개비로 적린을 치는 절차와 부싯깃에 옮겨붙이는 절차로 나눠진다. 주사위를 던지는 절차와 굴러가는 절차다. 하나의 사건을 둘로 쪼개서 각각 살펴봐도 다시 다섯이 되며 그 각각을 쪼개봐도 다시 다섯이 된다. 왜 이 부분이 중요한가? 사건이 이곳저곳으로 옮겨붙기 때문이다. A 사건이 B 사건으로 옮겨붙으려면 중간에 사건이 하나 더 필요하다. 성냥을 치는 사건, 옮겨붙이는 사건, 옮겨붙은 사건이다. 당구공을 친다면 큐대로 치는 것이다. 그런데 공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쿠션도 수상하다. 큐대와 공과 쿠션 세 곳에 스파이가 뭔가 농간을 부릴 수 있다. 야구라면 방망이를 잘 휘둘러야 하지만 공이 공인구가 아니면 날아가지 않을 수 있다. 야구장의 규격을 키워놓으면 홈런이 외야플라이가 된다. A 사건과 B 사건 사이에 양자가 공유하는 C 사건이 있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둘로 해석하면 이 부분을 놓치게 된다. 자동차가 고장나도 못가고 목적지가 멀어도 못 가고 도로상태가 불량이라도 못 간다. 작용측과 반작용측 사이에 겹쳐진 숨은 사건이 하나 더 있다. 공유하는 무엇이 항상 있다. 이 점을 파악하지 못하면 순환의 오류에 빠지게 된다. A가 B에게 주면 B가 C에게 건네고 C가 다시 A에게 주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오면 준 것이 아니다. 줬다고 했으므로 줘야 한다. A와 B와 C를 하나의 라인에 직결시켜야 되돌아오지 않고 확실히 상대방에게 건네지는 것이다. A가 B에게 줬는데 B가 바로 A에게 돌려줬다면 A는 B에게 줬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사건은 불성립이다. 이런 걸로 헷갈리지 않으려면 A>B>C로 일직선상에 도열해야 한다. 다시 C>A로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사건 안에 A B C 셋이 다 있어야 한다. 키커와 공과 골대가 나란해야 한다. 원인과 결과 둘만 있으면 이런 부분에서 곤란해진다. 언어가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 셋이 있어야 의미가 전달되듯이 사건은 반드시 주는측과 받는측과 전달물까지 셋이 있어야 한다. 원인과 결과만 있다면 택배를 준 사람도 있고 받은 사람도 있는데 택배물건이 없는 것이다. 물건이 어디로 갔지? 상식적으로 이건 아니잖아. 물건이 어디갔어? 내 물건 내놔. 이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만 있다면 주어와 동사만 있는 셈이다. 목적어가 없잖아. 택배가 중간에서 사라졌잖아. 배달원도 있고 주문한 고객도 있는데 짜장면은 어디갔지? 그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구조 안에 다 있기 때문에 구조론은 설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모르는 사람은 한국말을 모르는 것이다. 발송한 사람의 사건과 수신자의 사건과 중간에 우편물의 사건으로 셋이 있어야 하며 다시 이 셋은 합쳐서 하나의 사건 안에서 통일되어야 한다. 따로 놀면 순환의 오류에 빠진다. |
"그것은 공동의 자산이다. 그런 것에는 보통 이름이 없다. 에너지는 그 이름없는 것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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