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역학의 창시자 볼츠만은 동료 과학자들의 비웃음 때문에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했다고 한다. 집합론의 창시자 칸토어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고. 여기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근본적인 철학적 대립의 지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푸앙카레는 칸토어의 집합론을 수학적 질병이라고 불렀다. 미친놈의 헛소리라는 말이다. 칸토어의 무한 개념을 수학의 언어로 인정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볼츠만의 통계열역학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과학의 세계에 우연성이 지배하는 확률개념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한때 열역학은 물리학이 아니라고 말했다는데 그게 맞는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열역학이라는 게 뭐야? 일어나기 쉬운 일이 잘 일어난다는 거 아냐? 하나마나 한 소리잖아. 이게 어떻게 과학이 될 수 있어? 이런 식이다. 물론 볼츠만의 편을 들어준 과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주류 과학계는 불연속성을 앞세운 볼츠만의 분자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대립각이 있다는 거다. 과학철학자 에른스트 마흐를 중심으로 한 주류 과학계는 분자나 원자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연속적인 전자기적 상호작용으로만 이해하려고 했다. 입자의 불연속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에는 돌턴의 원자론도 써먹기 좋은 가설 정도로만 받아들였다고 한다. 연속성이냐 불연속성이냐다. 여기서 정면충돌이다. 연속은 매끄럽다. 불연속은 계단식으로 중간에 딱딱 끊어진다. 끊어지면? 자투리가 생긴다. 이거 어떻게 처리할래? 0.00000으로 무한대까지 가버리면 칸토어 이 답답한 양 반아! 니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거야? 책임질겨? 무한대는 정말이지 골때리는 것이다. 수학자를 좌절하게 한다. 왜? 모양이 이쁘지가 않잖아. 흐지부지 쩜쩜쩜이라니. 이게 뭐야? 수학이 장난이야? 이래놓고 수습이 되냐구? 무한대를 인정한다면 영화 기생충의 검은 상자를 열어버리는 거야. 판도라의 상자라구. 과연 그랬다. 무한대를 인정하고 열역학을 받아들이자 많은 이공계 학생들이 머리를 싸쥐고 골머리를 앓는다. 어쩔 수 없다. 세상이 그런 것을 어쩌리? 학문의 한 층위를 올라서면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열지 말라는 검은 상자를 과감하게 열어버려야 한다. 학생들이 골머리를 앓더라도 어쩔 수 없다. 구조론으로 보면 자연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각 단위에서 불연속적이다. 무한대의 자투리들은 어쩌지? 각 단위에서 소거한다. 지운다. 겁먹지 마시라. 다 해결이 된다. 구조론은 단순하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거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의 조건은 전제고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진술이다. 전제가 진술을 제한한다.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다. 왜? 이는 언어의 규칙이다. 질이 입자를 제한하고 입자가 힘을 제한하고 힘이 운동을 제한하고 운동이 량을 통제한다. 사회에선 권력이다. 먼저 선점한 자가 뒤에 오는 사람의 역할을 제한한다. 설계가 시공을 제한한다. 설계변경 하면 안 된다. 권력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작동하는 것이다. 수학은 언어의 규칙을 추구한다. 구조론은 만유의 내재적인 규칙성을 탐구한다. 규칙의 제 1 항은 전제의 진술 제한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에너지는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을 통제한다. 확률은 실험조건을 엄격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험조건을 넉넉하게 잡아서 확률로 우회한다. 실험조건을 소립자 단위로 엄격히 하면 자연은 YES와 NO다. 어쩌다가 동전을 잃어버렸다. 동전은 어디에 있을까? 주변에 있다. 확률은? 백퍼센트다. 지나가던 고양이가 먹고 튄다면? 실험조건을 어긴 것이다. 고양이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놓고 동전을 잃어야 한다. 주사위가 둘로 쪼개져서 5와 6의 눈금이 나오면? 억만 분의 일이라는 희박한 확률로 11이 나온 게 아니고 실험조건을 어겼다. 언어는 언어의 규칙을 따라야 하며 언어의 규칙을 어긴 언어는 언어가 아닌 거다. 무한동력은 언어가 아니다. 동력이라는 말부터 정의해야 한다. 중력이나 관성력이나 자력은 동력이 아니다. 영구자석을 들고 와서 이 자석에 무한한 힘이 들어있잖아 하는 바보들이 있지만 그것은 동력이 아니다. 동력은 정지한 것을 움직이는 것이며 물질은 원자단위로 보면 정지해 있지 않다. 정지한 것을 움직이려면 자신도 거기서 정지해야 한다. 무한동력의 무한은 정지상태를 깼으므로 일단 동력이 아니다. 수력발전이 그렇다. 발전소를 한 번 지어놓으면 무한히 전기를 생산하지만 수력발전이나 태양광발전이나 풍력발전은 무한동력이 아니다. 그런데 무한히 에너지를 생산해낸다. 무한히 동력을 생산한다고 해서 무한동력은 아니다. 태양이 생산하기 때문이다. 태양이 바닷물을 운반하고 기온을 높여 바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무한 뒤에 동력이 붙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마찬가지로 타임머신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귀신, 유령, 내세, 천국, 사탄, 마귀, 영혼 따위는 다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과거에는 전염병을 오해해서 귀신이라 부른 것이다. 당신이 죽어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아니고, 당신이 천국이든 어디든 간다면 그 간 사람은 당신이 아니다. 단지 언어를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거의 해결된다. 왜 볼츠만과 칸토어는 우울해졌을까? 언어의 문제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는 실험으로 증명하면 되는데 언어의 문제는 다르다. 언어를 증명하려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구조론이다. 구조론은 언어체계 안에서 완결된다. 볼츠만은 세상을 불연속으로 이해했듯이 구조론은 불연속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 다섯 번에 걸쳐 YES와 NO를 판정하여 의사결정하고 끊어내고 자투리를 지워서 골치 아픈 무한문제를 원천적으로 해소해 버린다. 왜 바보들은 연속을 좋아할까? 시간과 공간이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아인슈타인이 해결했다. 시공간은 독립적이지 않고 물질에 대해 상대적이다. 물질이 시간과 공간에 맞추어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물질 따로, 시간 따로, 공간 따로 3위일체가 아니다. 구조론은 사건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싸그리 해소한다. 근본적인 충돌의 지점을 지워버린다. 볼츠만과 칸토어는 말을 못 해서 답답해서 죽은 것이다. 말끔하게 마무리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의 문제는 실험과 검증으로 답을 찾으면 되는데 언어의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꽉 막혀버린다. 사건이라는 개념을 알았다면 살았을 텐데. 우주는 사건의 연결이지 사물의 집합이 아니다. 사물은 연속적이지만 사건은 원래 불연속적이다. 완전성이 있다. 완결된다. 사물로 보면 우주는 시공간의 연속성 때문에 연속적이지만 무대와 배우의 불일치 때문에 그 부분을 해결하려면 잘게 쪼개야 하는데 그러면 연속이 될 수밖에 없지만 사건으로 보면 불일치가 없다. 당구공을 친다고 하자. 여기서 당구대의 규격이 있다. 당구공의 사이즈가 있다. 당구대가 시간과 공간이고 당구공이 물질이라면 이 둘 사이에는 수학적으로 절대 해소되지 않는 무한소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연속성으로 물타기해서 얼버무려야 한다. 0.0000으로 무한정 점을 찍어야 정확해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문제를 간단히 해소할 수 있다. 빛이 피사체를 비추는데 그림자가 생긴다고 치자. 피사체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덩달아 움직인다. 이때 피사체와 그림자의 관계는? 여기서는 무한히 점을 찍을 이유가 없다. 이건 똑 떨어지는 값이다. 우주는 곧 물질과 시공간의 관계는 당구대와 당구공의 관계인가? 아니면 피사체와 그림자의 관계인가? 아인슈타인이 풀었다. 당구대를 지지하는 것은 지구다. 당구공을 치는 것은 사람이다. 이 둘은 매치되지 않는다. 자투리가 생기고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피사체와 광원을 통일하는 광원이 있다. 하나의 광원에 의해 피사체와 그림자의 갈등은 자투리 없이 해결된다. 완벽하다. 이 도리를 안다면 우주가 무모순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것이고 그렇다면 볼츠만과 칸토어가 자살하고 정신병원에 갇힐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기 생각이 분명히 맞는데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취약한 부분 때문에 볼츠만과 칸토어는 말도 못 하고 답답해서 죽은 것이다. 광원의 존재를 알면 해결된다. 구조론에서 광원은 사건을 정의하는 계다. 계 안에서 물질과 시공간의 관계는 당구공과 당구대의 관계가 아니라 피사체와 그림자의 관계다. 야구장으로 보자. 똑같은 안타인데 어떤 안타는 홈런이라며 점수를 더 얹어준다. 이거 이상하잖아? 어떤 공은 비거리가 무려 120미터를 넘었는데도 외야에서 슈퍼캐치로 잡힌다. 어떤 공은 비거리가 불과 99미터인데 홈런이라고 만세를 부른다. 왜 120미터 날린 사람은 울고 99미터 친 사람은 만세를 부르는가? 야구장 규격이 엉망이잖아? 이 야구장 누가 만들었어.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잡아다가 국회에서 청문회를 열어야 할 참이다. 볼츠만과 칸토어가 하느님을 초치해서 문초할 수도 없을 테고. 이때 하느님이 청문회장에 딱 나타나서 야들아. 니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야구공과 야구장의 절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피사체와 그림자의 상대적인 관계라니깐 하면 뇌의 전구에 불이 반짝 들어오면서 모든 문제가 하루아침에 해결되니 베개를 높이 베고 편하게 잠들 수 있다. 볼츠만이 들었다면 덩실덩실 춤을 출 일이다. 엔트로피는 자연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것은 저절로 움직일 수 없게 될 때까지 저절로 움직인다는 거다. 자연은 저절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산 것은 죽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죽은 것은 움직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었으니까. 저절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왜냐하면 저절로 움직일 수 없으니깐. 너무 쉽잖아. 사실 다 동어반복이다. 전제 안에 진술 있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로 조직된다. 저절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엔트로피다. 왜 저절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을까? 저절로 움직일 수 없다고 미리 전제했으니까. 나와 있다. 제한을 걸었다. 전제가 진술을 제한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언어만 믿을 수 있다. 언어는 언제나 이렇듯 제한을 걸기 때문이다. 1은 1이다. 1은 왜 1일까 하고 물으면 안 된다. 1이라고 이미 규정했잖아. 규칙을 정했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 자기 이름을 홍길동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그런데 왜 내 이름은 하필 홍길동이죠? 하고 물으면 안 된다. 자기 입으로 홍길동이라고 말했잖아. 자가당착이라면 곤란하다. 첫 번째 온 사람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뒤에 온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을 수 없다. 이미 먼저 온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힘이 센 사람이라면 그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거지 강짜를 부린다 치면? 그 사람은 인간 중에도 악질이다. 자연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 자연을 자연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다. 억지를 부린다면 스스로가 아니라 작위로다. 후건이 전건을 칠 수 없고 진술이 전제를 칠 수 없다. 1의 자리를 1로 정한 순간 2의 자리부터 무한대까지 자리는 이에 연동되어서 전부 정해진다.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2를 1로 하겠어. 이런 식의 언어파괴는 무효다. 언어에 의지해서 말하면서 언어를 때려 부수는 짓은 금지된다. 대부분의 속임수는 언어파괴의 수법을 쓴다. 사실은 그냥 놔두고 말을 헷갈리게 해서 속인다. 무한동력 혹은 영구기관이라는 말은 언어적으로 불성립이다. 무한 뒤에는 동력 없다. 동력은 정지상태를 변경하는 것이다. 정지상태를 변경하려면 자신도 정지해야 한다. 모든 동력은 유한동력이어야 한다. 대부분의 허튼소리는 잘 살펴보면 주어가 없거나 혹은 목적어가 없거나 문법에 맞지 않는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왜 전제가 진술을 결박하는 것일까? 앞에 말한 대로 양자를 통일하는 광원 때문이다. 광원이 언어의 의미다. 의미가 전제와 진술을 결박한다. 진술이 전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언어의 의미가 죽는다. 언어도단이다. 마찬가지 그림자가 피사체 밖으로 나가는 순간 조명이 꺼지고 깜깜해서 보이지 않는다. 광원이 꺼진 것이다. 광원에 의해 피사체와 그림자는 결박된다. 의미에 의해 전제와 진술은 결박된다. 에너지에 의해 유한과 동력은 결박된다. 그 결박된 둘을 분리할 수 없다. 비례에 의해 1과 2의 위치는 결박된다. 2가 나는 4가 좋더라. 하고 3을 불러서 앞으로 보내고 자신은 4 앞에 가서 선다면? 그런 자는 쳐 죽여야 한다. 언어파괴는 사문난적이다. 자연은 계에 결박되고 그림자는 광원에 결박된다. 연동되고 복제된다. 언어는 의미에 결박되고 프로토콜에 결박된다. 결혼을 한 부부는 결혼식에 참여한 증인들에 의해 결박된다. 제 3자가 보증을 서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히 맞다. 되물릴 수 없다. 어떤 둘이 있다면 반드시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자가 있으며 구조론의 용어로 그것은 토대의 공유다. 반드시 그것이 있다. 연동과 복제가 있다. |
"어떤 둘이 있다면 반드시 양자를 통일하는 제 3자가 있으며 구조론의 용어로 그것은 토대의 공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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