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와 구조론 존재는 사물이 아니라 사건이다. 사물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사건은 원인에서 결과까지 공간과 시간을 타고 진행한다. 우리가 사물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믿는 이유는 관측자와 나란히 가기 때문이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에 가만있어도 1초에 400미터 간다. 관측자인 인간과 나란하므로 상대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아는 사물은 관측자인 인간에 대칭된 상대적인 모습이다. 사건은 자연이 에너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유지하는 절대적인 모습이다. 인간이 손을 뗐을 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막을 들추어야 한다. 사물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힘에 반응하나 사건은 자체 에너지에 의해 움직인다. 자체 에너지를 운용하는 힘은 구조의 효율성에서 얻는다. 물질이 어떤 형태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는 더 안정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수소나 산소 분자들은 안정상태에 도달해 있다. 거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불안정해진다. 에너지를 뺏기고 구조가 깨진다. 핵분열이나 핵융합이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단계의 안정상태에 도달한다. 안정상태>변화상태>안정상태로 바뀐다. 그런데 처음의 안정상태와 달라져 있다. 닫힌계 안에서 안정될 때는 에너지를 잃게 된다. 닫혔기 때문에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려면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잃는 수밖에 없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은 구조의 안정상태이고 구조의 변화를 거쳐 사건의 최종결과는 또 다른 안정상태이며 구조변화가 일어났으므로 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에너지의 일부는 반드시 계를 빠져나간다. 연결되어 닫힌계가 성립하지만 구조변경 과정에서 일부 연결이 끊어진다. 열역학 1법칙은 끊어진 부분을 회수하여 계산한다. 바둑이라면 죽은 돌을 포함시켜 집을 계산한다. 열역학 2법칙은 끊어진 자투리를 빼고 계산한다. 자투리를 잘라내는 과정에 들어간 일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총량은 변화가 없지만 안정상태에서 또 다른 안정상태로 바뀌는 동안 구조는 일부 손실된 것이다.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하며 사건의 닫힌계 안에서 구조는 항상 손실된다. 구조 손실분을 반영하지 않으면 열역학 1법칙이고 반영하면 열역학 2법칙이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할 때는 외부에서 개입한다. 실험을 할 때 과학자가 개입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실험대상을 자르고 붙인다. 그러나 양자역학과 같은 미시세계에서 과학자의 개입은 결과를 교란시킨다. 외부의 개입을 차단해놓고 자연이 스스로 어떻게 움직여 가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자연은 구조의 차이에서 오는 효율성을 빼먹는 방법으로 자신을 유지한다. 잘라주고 붙여줄 과학자의 손길이 없으므로 스스로 자르고 붙이는데 그 자르고 붙이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자연은 어떤 안정상태에서 변화를 거쳐 보다 효율적인 안정상태로 바뀌고 그 효율을 빼먹는다. 외력의 작용에 맞설 때는 외부보다 질이, 질보다 입자가, 입자보다 힘이, 힘보다 운동이, 운동보다 량이 안정된 상태다. 상대적으로 더 효율적이다. 더 이익이다. 그러므로 그 방향으로 움직인다. 구조의 변화에 따른 효율성이 없으면 에너지가 부족해서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을 새로 시작할 때는 그 효율적인 배치가 더 비효율적이다. 관성력을 빼먹기 때문이다. 병사에게 월급을 안 주면 더 효율적이다. 그런데 싸울 수 없다. 병사가 굶어 죽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런 식이다. 효율은 착취에서 나오고 착취할수록 망가져서 착취할 수 없게 된다. 서 있는 사람보다 앉아있는 사람이 더 안정된 상태다. 더 착취된 상태다. 앉아있는 사람보다 누워있는 상태가 더 안정된 상태다. 누워있는 병사는 에너지 소모가 적어 양식을 덜 축낸다. 자연에서 외부의 도움이 없이 일하려면 서 있다가 앉으면서 그 이익만큼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앉은 사람은 누우면서 한 번 더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누운 사람은 일할 수 없다. 일하려면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그러려면 추가 에너지 투입이 필요하다. 추가로 에너지가 들어오면 새로운 사건이다. 닫힌계가 부정된 것이다. 하나의 사건 안에서 일어선 상태에서 눕는 상태로만 간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순서는 움직이는 사람이 멈춰섰다가, 구부렸다가, 주저앉았다가, 드러눕는 순서다. 드러누우면 더 힘을 쓸 수 없다. 사건의 진행은 거기서 끝난다. 움직이는 사람이 멈춰서기, 구부리기, 주저앉기를 거치지 않고 드러누울 수 없다. 순서대로 구조를 다운시킨다. 드러누울수록 효율적이지만 자력으로는 일어설 수 없으므로 막다른 지경에 몰린다. 효율을 얻으려다 궁지에 몰린다. 벽을 등지고 싸우면 이익이다. 등 뒤에서 공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점점 구석으로 몰려서 독 안에 든 쥐가 된다. 이익을 취하려 할수록 상태는 더 나빠진다. 사건은 움직임의 질>멈춰섬의 입자>구부림의 힘>주저앉음의 운동>드러누움의 량으로 조금씩 구조를 망가뜨리는 형태로 일어난다. 외부에서 보기에 에너지가 보존되지만 구조의 손실이 분명히 일어났다. 드러누운 상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비가역성 때문이다. 1법칙과 2법칙은 관측자인 인간이 개입한 상태와 인간을 배제한 상태의 차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이니 인간을 배제하고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스스로 움직일 때는 구조변경을 통한 효율성의 차이를 에너지 낙차로 빼먹는다. 에너지 낙차가 결이니 에너지는 결 따라가는 것이다. 최초 움직이는 상태는 그 움직이는 힘으로 주변과 관계를 맺는다. 보통 질량이나 중력이라는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만있는 바위도 중력의 도움으로 땅과 친구를 맺는다. 에너지의 중첩이다. 움직임 상태에서 멈춰선 상태로 모드가 바뀌면 주변과 관계 맺는 라인이 하나 끊어진다. 사차원에서 3차원, 2차원, 1차원, 0차원으로 가면서 하나씩 주변과 연결하는 라인을 잃어먹는 것이다. 잃어먹은 구조는 닫힌계 안에서 복구될 수 없다. 사건은 닫혔기 때문이다. 사건은 날아가는 화살과 같아서 진행 중인 동안 질서를 바꿀 수 없다. 모두 연결되어 에너지 여유가 없다. 사건은 움직이는 동이고 전원이 동원되어 여유가 없다. 0차원은 주변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 1차원은 하나의 라인이 개설된다. 2차원은 라인이 두 개다. 3차원을 거쳐 4차원은 넷이다. 자신을 포함시키면 다섯 개의 값이 있다. 세균은 0차원 점이고 버섯은 균사체라서 선이라고 한다. 식물의 잎은 면이고 동물은 3차원 입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타인과 약속을 공유하는 점에서 4차원의 특별한 존재다. 차원 개념은 몇 가지를 동시에 공유하는가다. 사건은 4차원 에너지에서만 촉발되며 3차원, 2차원, 1차원을 거쳐 0차원에서 끝나고 그사이에 공유상태를 잃게 된다. 자연의 물체는 부피가 있으므로 3차원이고 거기에 에너지를 더하면 4차원이다. 그러므로 사건은 무조건 4차원에서 일어난다. 3차원까지는 자기를 유지하기도 바빠 사건을 격발할 수 없다. 에너지는 움직이는 동이며 동은 그 자체로 사차원이다. 그냥 머무르는 3차원은 우주 안에 없다. 자연은 3차원으로 보이지만 사건은 움직이고 그 움직임에 의해 연결되며 그 연결에 하나의 차원이 에너지로 추가된다. 즉 0차원을 포함해서 하나의 존재는 주변과 다섯 가지 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사건은 에너지를 태운 4차원에서 일어난다. 3차원이면 단절된다. 계급으로 비유하면 왕과 귀족과 평민과 농노와 노예의 차이는 타인과 라인을 공유하는 정도의 차이다. 왕은 외교를 구사해 외국 군대를 빌려온다. 라인이 있다. 귀족은 외교를 못 하지만 부하를 동원할 수 있고 평민은 가족을 동원하고 농노는 동료를 데려오고 노예는 동원할 수 없다. 도와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태가 노예다. 사건은 왕에서 시작하여 귀족과 평민과 농노를 거쳐 노예로 종결되며 그 과정에서 친척을 잃어 라인이 끊긴다. 외교를 잃고 부하를 잃고 가족을 잃고 동료를 잃어 대항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잃어먹는 쪽이 주변보다 효율적이다. 귀족은 외교를 하지 않아도 되니 효율적이다. 평민은 부하를 챙기지 않아도 되니 이익이다. 농노는 가족을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 노예는 친구도 챙기지 않고 세금도 안 내고 군대도 안 간다. 노예가 가장 이익이다. 그런데 뺏긴다. 이익이 클수록 새로 사건을 일으킬 수가 없는 딜레마다. 이는 실용주의의 한계다. 노숙자는 인생을 효율적으로 산다. 하숙비도 공짜고 세금 한 푼 안 내고 데이트 비용을 고민하지 않는다. 단, 사건을 일으킬 수 없을 뿐이다. 실용주의는 효율적이지만 대신 구조를 손실한다. 일어난 사건에서 이익을 취할 뿐 새로운 일을 착수하지는 못한다. 이명박이 실용주의를 추구할수록 신용을 잃고 원칙을 잃고 규율을 잃고 동료를 잃어 점점 시체가 된다. 부하들은 배반한다. 그러나 어떤 일어난 사건 안에서는 실용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일은 터졌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한데 계가 닫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사건은 외부의 도움이 없다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므로 실용을 추구하여 얻는 약간의 이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대신 구조가 파괴된다. 그러므로 발전한다는 것은 뒤로 많은 것을 손실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좋아지는 것은 나빠지는 것이다. 이왕 잃을 바에는 잘 잃어야 한다. 생물의 진화는 유전자의 기능을 잃는 것이다. 인간의 지능이 향상된 것은 머리가 좋아지는 것을 막는 차단장치가 망실된 것이다. 머리가 좋아지면 대뇌가 더 많은 에너지를 가져가므로 살아남을 확률이 적다. 머리가 좋으면 에너지의 과소비로 죽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개체들이 있었다. 그 개체는 좋은 머리로 불을 발명하여 고기를 익혀 먹었다. 익혀 먹으면 압도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획득하므로 번성할 수 있다. 진화는 이런 식의 유전자 기능의 망실 형태로 잃어나므로 인간은 초파리보다 유전자 숫자가 많지 않다. 뭔가 차단장치가 해제될 때마다 생물은 진화된다. 진화를 촉발하는 변이의 결과는 99.999퍼센트 죽음으로 귀결되지만 운 좋게 하나가 환경과 맞아떨어지면 대박을 낸다. 그다음에는 진화된 종이 환경을 바꿔서 장악해 버린다. 모든 진보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마이너스시킨다. 무언가를 잃어먹는다. 기회를 잃고 가능성을 잃는다. 100년 후 한국인은 유전적 다양성을 잃고 모든 남녀가 정우성과 김태희로 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그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사건에서 진보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빅브라더 탄생으로 조지 오웰의 '1984년' 된다. 그러나 새로운 사건을 일으켜 문제를 해결한다. 공산주의가 망하는 이유는 새로운 사건의 여지를 차단하여 죽음으로 가는 직행열차에서 탈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해진 하나의 사건 안에서 무조건 고립되어 망한다. 사건은 효율을 찾고 효율성은 구조를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효율성이 높은 기업이 나올수록 무언가 망가지고 만다. 포드시스템이 나오고 대가족이 깨지면서 인류는 많은 것을 잃었는데 인공지능이 나오면 우리는 또 무언가를 잃어먹는다. 그러나 또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서 얼렁뚱땅 수습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역사의 도전과 응전은 계속된다. 엔트로피의 요체는 세상이 공간의 사물이 아닌 시간의 사건으로 이루어지며 사건에 의해 모두 연결되어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 사건은 움직이고 움직이면 연결과 단절이 명백해진다. 무리가 이동하면 함께 할 사람과 남아있을 사람이 나누어진다. 우주는 움직이는 동적 존재이고 움직이면 연결되거나 혹은 끊어진다. 세상은 사건의 연결과 단절만 존재하며 사건은 연결에서만 일어나고 단절로만 진행하며 그 연결을 끊는 것은 1의 의사결정으로 가능하나 단절을 복구하는 데는 2의 의사결정이 필요하니 1을 얻을 때 2를 잃는다. 사건이 잃는 것은 구조다. 구조를 잃었으므로 표면으로는 피해가 드러나지 않는다. 상대와 대결하다 보면 구조손실이 드러난다. 수능 만점 받은 학생이 만점을 얻었을 때 뒤로 인성을 잃은 것이다. 도덕을 잃고 정의를 잃고 분별력을 잃고 망가졌으니 학생이 망언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을 얻든 1을 얻을 때 보이지 않게 뒤로 2가 슬그머니 빠져나간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필요한 것을 얻는 최적화를 지향해야 한다. 게임할 시간을 버려서 성적향상을 얻는다면 현명한 결정이다. 음주와 흡연을 버린다면 솔로신세를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버려지는 것에 의해 세상은 작동하는 법이며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손해보겠다는 자가 없으면 정당은 망할 수밖에 없다. 따로 전략예비를 빼놓지 않으면 전쟁은 이길 수 없다. 의리는 그 누군가 손해보는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스스로 손해볼 결정을 하는 것이 의리다. 모두가 이득 보려고 하면 구조가 망한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영리추구에 의해 망한다. 세상이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공유하는 토대를 보호하는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비열해지면 망한다. 각자도생이면 망한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인류의 진보도 없다. 남을 희생시키고 자신이 밟고 올라서려고 하면 망한다. 독점하는 것을 얻는 그룹은 망하고 공유하는 것을 얻는 집단은 흥한다. 자신의 독점하는 2를 버려서 남과 공유하는 1을 얻을 때 사회는 흥한다. 사익을 좁히고 공익을 늘리면 흥한다. 공유되는 것은 1로 2를 감당하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공유한 것이 아니라 방치한 것이다. 주택은 사유되고 도로는 공유된다. 우리는 부지런히 길을 닦아야 흥한다. 승용차는 사유되고 지하철은 공유된다. 공유되는 지하철에 이익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공유에서 사유로 갈아탈 때 이득을 얻는다. 도로는 공유되지만 내가 그 도로를 걸어가면 내가 차지한 면적만큼 사유된다. 공유하는 도로를 그대로 방치하면 당연히 망한다. 모두가 공유하는 도서관과 공원을 이용해야 한다. 거실은 공유되고 안방은 사유된다. 그 거실을 사용해야 흥한다. 각자 자기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망한다. 사건은 내부를 연결한다. 내부가 연결되면 외부가 단절된다. 모두 연결된 상태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하려면 의사결정 비용은 구조손실에서 뺀다. 구조의 손실로 효율을 빼먹으면 계는 비효율적인 구조가 된다. 완전 비효율로 바뀌었을 때 사건은 종결되고 새로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
"세상이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공유하는 토대를 보호하는 의인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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