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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챠우
read 1918 vote 0 2019.06.14 (18:25:04)

20대였다. 어느날 엄마가 니 옷은 빨아서 햇빛에 말려야 한다고 박박 우겼다. 겉으로 보기에 깨끗하다며 따졌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때까지 나에게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후로 가끔 겉옷을 세탁기에 두번 돌리곤 한다. 땀을 많이 흘리지 않는 친구들 중에는 빨래를 자주 하지 않는 놈도 있었다. 지하철 한쪽 노인석 근처에 가면 할배 냄새가 난다. 어쩔 땐 저게 죽음의 냄새인가 싶기도 하다. 


택시 운전을 하면 뒷좌석 손님의 지위를 냄새로 알 수 있다. 논현동에서 탄 손님들은 향수가 범벅이다. 그런데 의외로 커플들은 향수를 쓰지 않더라. 남자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여자들도 향수를 쓰지 않는다. 여자측의 배려일듯 싶다. 애기 엄마한테는 애기 똥냄새가 난다. 아재들은 담배 쩐 냄새가 난다. 강남역 뒷거리에서 탄 사람들은 찌개 냄새가 난다. 아마 마늘향인듯.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일할 사람이 없어 흑인난민을 쓰는 것도 이유가 있다. 거꾸로 할배 택시를 타면 할배 냄새가 난다. 슬며시 창문을 내려본다. 


당신은 모르는데 남들은 아는 치부를 들킨 적이 있는가? 냄새는 이 문제이다. 차라리 시각/청각적인 건 잘 보인다. 물론 이것도 오랫동안 신경써야 보인다. 인간은 365일 맡고있는 나의 냄새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시각/청각은 상대가 가릴 수 있다. 하지만 냄새는 가릴 수가 없다.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냄새를 가리는 방법은 그 공간을 벗어나는 방법뿐이다. 치명적이다. 상대가 날 배려하고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살인의 충동이 일어나는게 당연하다. 왜? 들켰기 때문이다. 이걸 상대도 잘 안다. 그래서 더더욱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피할 뿐이다. 


인간의 시각이 대상이라면 후각/청각은 배경이다. 대중문화는 모니터와 스피커를 쓰기 때문에 시각과 청각이 주류를 이룬다. 학습할 자료가 넘친다. 어릴 때는 냄새를 잘 모른다. 남자들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냄새가 고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호르몬이 바뀌기 때문이다. 얼굴에 여드름이 나고 겨털이 나는게 다가 아니다. 털은 반드시 냄새를 수반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냄새가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학습하기엔 아직 너무 어리다. 보통 남자들은 결혼하고 깨닫는다. 개갈굼을 당하기 때문이다.


좀 과하긴 했지만 영화 '향수'에서는 이런 향기의 의미를 좀 더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절대향수 같은 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당신의 무의식에는 향기가 영향을 미친다. 영화에서는 딸을 죽여 그녀의 향기를 가진 남자 앞에 무릎꿇는 아버지를 묘사한다. 올리버색스의 책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는 시각인식 장애를 가진 남자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는 시각적 맥락을 인지하는 우뇌부위가 망가졌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제라도 사건을 파악하고 있다. 사건의 중핵은 편이다. 판단이다. 적이냐 아군이냐다. 


송강호가 상대를 찌른 이유는 들켰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지이고 상대가 부자인 건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다. 그냥 뜯어먹을 생각만 한다. 권력에 순응한다. 하지만 원초적 권력 문제가 붉거지자 그는 태도가 달라졌다. 영화에서는 개연성 때문에 딸을 사용하지만 딸은 별 상관이 없다. 시작은 냄새였다. 결정적인 장면은 수풀 뒤에 쪼그리고 있을 때였다. 내가 선을 넘는 것을 상대가 참고 있었다는 걸 직접 폭로 당한 것이다. 인간은 상대에게 직접적으로 치부가 폭로되면 흥분한다. 알아도 내가 알아내야 하고, 제3자에게 듣는 것은 괜찮다. 권력 문제를 비끼기 때문이다. 


맥락을 건드리면 화내는 게 인간이다. 인신공격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눈앞의 대상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인간은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맥락을 건드리면 살인자로 돌변한다. 에너지가 맥락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동기부여 한다. 영화는 마당의 송강호 씬에서 끝났어도 좋을 뻔했다. 괜히 질질 끌었다. 그럼 카뮈의 이방인이 되었을듯. 이는 진중권과 조영남류가 잘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깐 욕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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